|
|

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2)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한편 왕실에서는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왕실의 공보 부문 고문이었던 삐야 말라꾼(Piya Malakul)이 소유한 고급잡지 <디찬>(Dichan)은 1986년 8월 및 1987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왕세자에 우호적 관점의 장편 인터뷰를 게재했다. 왕세자는 또한 1987년 6월에 '태국 외신기자 클럽'(Foreign Correspondents Club of Thailand: FCCT)의 특별 회견을 통해 국제 언론인들과도 대담을 가졌다. 왕세자는 이러한 언론과의 접촉 기회들을 통해, 젊은 날의 무분별한 행동들이 이미 과거의 일임에도 자신이 여전히 오해를 받고 있으며 악의적 소문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총리가 이끌던 당시 정부와 관료들과 군부는 일년 이상의 기간을 두고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의 탄생 6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들은 이 행사가 국왕의 생일(1987년 12월 5일)보다 몇달 앞서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이후 푸미폰 국왕의 재위기간이 쭐라롱꼰 (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 국왕이 갖고 있던 태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기간을 넘어서게 되는 1988년 7월까지 국가 전체의 축제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계획했다.
쁘렘 총리는 푸미폰 국왕에게 '마하랏'(maharaja)이란 칭호를 추존하여 '대왕'(大王)으로 모실 것이라고 발표했다. 태국 역사에서 푸미폰 국왕 이전에 '마하랏' 칭호의 영예를 가졌던 국왕은 [총 8명 중] 3명에 불과하다. 라마 9세의 통치를 축하하는 장기간의 대규모 국가 축제가 진행된 후, 1988년 하반기가 국왕이 빛나는 영광 속에서 퇴장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도록 기획됐다.
1987년 9월,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일본을 국빈방문했다. 일본 방문은 왕세자 자신이 성숙함과 진지함을 갖고 있다는 점을 국제무대에 확신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결과가 그렇게 나빠지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왕세자는 일본 방문을 앞두고 자신의 정식 부인이었던 솜사왈리 끼띠야꼰(Soamsavali Kitiyakara: 1957년생) 왕자비 대신, 당시까지는 아직 첩의 신분이었던 유와티타 뽈쁘라셋(Yuvathida Polpraserth: 별명-'몸 벤츠'[Mom Benz])을 동반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외교상의 의전절차를 이유로 왕세자의 요구를 거부했다. 왕세자가 일본에 도착하자 가뜩이나 나빴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바바라 크로셋(Barbara Crosette)은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썼다.
|
태국 국내 신문들이 일본을 방문했던 자국 왕세자에 대한 "모욕들"을 보도하면서, 도쿄와 방콕 사이에 외교적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태국 왕세자는 공군 조종사이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는 연대도 갖고 있는 육군 소장이기도 하다.
방일 중의 태국 왕세자 차량을 운전하던 일본인 운전기사는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차량을 멈추기도 했다. 일본의 관리들은 해당 운전수가 몸이 아픈 것을 느껴 교대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왕세자는 또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좌석을 부적절하게 배정받아 한 동상 제막식에 사용될 끈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태국 왕세자는 예정보다 3일 먼저 귀국했고, 그의 행적을 두고 양국 사이엔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다. |
양국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자, 태국의 극우 민족주의 [준-군사] 조직들 중 하나인 빌리지 스카우트(Village Scouts, ลูกเสือชาวบ้าน [룩쓰어차오반], 약칭-'어써'[Or Sor], 의역-의용방위군[VDC]) 회원들이 방콕(Bangkok)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사과를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쁘렘 총리는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주장이 전적으로 거짓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본 정부에 왕세자 및 태국 군주제를 모독한 것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를 의무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푸미폰 국왕이 며칠 후 아들을 설득하여 태국 국민들이 일본을 비판하지 말도록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했다. 이후 몇주 동안 양국의 외교관들과 정치인들은 조용하게 이 혼란을 수습했다. 하지만 이 일이 만일 와치라롱꼰 국왕의 치하에서 발생할 일을 맛보기로 보여준 것이라면, 태국 국민들이 푸미폰 국왕의 퇴위에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7년 말경이 되면, 푸미폰 국왕이 양위한 후 섭정처럼 자신의 아들을 배후에서 보살피며 정사를 돌본다는 생각은 이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으며 실패할 운명인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1988년 1월, 수쿰판 버리팟(Sukhumbhand Paribatra: [역주] 현 방콕시장이자 왕실 종친)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 지에 새로운 글을 기고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매우 세심한 정치적 용어들을 사용했지만, 태국 기성체제의 지도급 인사가 영어권의 잡지를 통해 왕세자에 대한 회의감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932년 이후 태국에서 군주는 국가수반으로서 다양한 기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국왕의 주요한 의무들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됐고, 그의 역할은 정치를 넘어선다. 그렇지만 국왕이 하나의 제도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수용되는 것은 발전을 위한 촉매제로서 작용하는 후자(=인격체로서의 국왕)의 역할 때문이며, 이러한 점은 국왕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을 다소간은 불가피한 요소로 만들고 있다.
작금의 현실에서,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러한 역할은 태국의 정치 시스템을 통합시키고 있다.
그러한 일 중 하나가 국가 단합의 상징이란 점이다. 비록 태국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국왕은 사회적 차이들을 공유하는 데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국왕은 또한 여타 정치적 제도들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연속성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1932년 이래, 태국에서는 13번의 개헌과 16번의 쿠테타, 그리고 46번의 내각 교체가 있었다. 또한 국왕은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가 발생했을 때 국가화합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가령 과거 '태국 공산당'(CPT)의 강력한 근거지였던 지역들에서 진행된 왕실 사업들이 그에 대한 증거이다.
국왕의 두번째 주요 역할은 체제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위기에 달했을 때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란 점이다. 1973년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군부 세력이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유혈사태를 일으키거나 예측불가능한 위기를 조성하려 할 때, 왕실은 군부의 세력을 자제시키는 데 개입했다. 이러한 일은 군부, 관료, 정당들, 재계 등 당시의 권력 세력들 사이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시키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줬다.
태국의 정치 경제 발전에 있어서 군주의 역할 및 왕실이 국민들의 마음과 정신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주제의 미래와 관련하여 조그마한 불확실성이 존재해도 그것이 일으키게 될 엄청난 불안감은 불가피한 일이다.
부왕인 푸미폰 국왕처럼 국민들 및 주요한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 강력한 정치적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지, 그에 대한 왕세자의 능력과 관련한 의문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대부분은 사적 대화에서 표명되지만, 이제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또한 왕세자가 부왕과 마찬가지로 태국 정치에서 미묘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지속되고 있다.
모든 백성들과 제도들이 변화와 과도기를 겪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이 나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고, 예고도 없는 상태에서 군주제라는 제도를 물려받았지만 그러한 일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따라서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후계자들에게는 거의 성취하기 불가능한 표준이 될지도 모른다. 장차 군주에 의한 지도력이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영향력이 줄어들어야만 한다면, 심각한 정치적 결과가 있게 될 것이다.
주요한 정치세력들이나 정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정한 균형이 파괴될 것은 확실하며, 응집력 있는 권력 독점과 조직화된 결집력, 그리고 언론 및 풀뿌리 차원의 정치적 장악력을 고려한다면, 그 권력 공백을 메울 세력은 틀림없이 군부가 될 것이다. 많은 태국인들에게 궁극적으로 근심의 근원이 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일이다. |
수쿰판의 사례는 이제까지의 움직임 중 가장 공개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쁘렘 총리를 비롯한 기성체제의 또 다른 지도급 인사들도 배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왕세자의 왕위승계를 방해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왕실 관리들은 라마 9세(=푸미폰 국왕)가 퇴위하지 않을 것이란 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토록 급작스레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라마 10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킨 후 폐기시킴으로써, 가뜩이나 문제만 쌓여가던 왕실 내에서 갈등과 경쟁의 골만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

|
|
(사진: 태국 정부 제공) 잉락 친나왓(중앙) 총리가 태국 전통설날인 '송끄란'을 맞이하여, 2012년 4월 27일 낏띠랏 나 라넝(좌측) 부총리 등과 함께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우측) 장군의 자택을 예방해 환담을 나누는 모습. |
1988년,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 신분을 유지하고, 군대의 연례 인사이동에 개입하며, 선도적인 "국왕의 사람"이란 위상을 유지하여, '네트워크 군주제' 내에서 좌장 역할을 계속해나갔다.
기성체제 인사들 가운데 보다 현대적 특성을 보인 사람들, 특히 점차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던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의 측근들은 쁘렘의 경직된 보수성향과 군국주의적 성향이 낡고 불쾌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1990년대 태국 정치의 역학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는 기성체제 내에서 이뤄지는 보수파와 자유파 사이의 투쟁이었다.
가장 주요한 논점은 태국 정치에 있어서 군부의 적절한 역할에 관한 것과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입장이었다. 기성체제 보수파와 자유파 모두 왕세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측면에서는 통일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세자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최선책인가에 관해선 의견이 갈렸다.
1990년대에 발생한 두 가지 주요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기성체제 내 보수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회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기습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그러한 변화는 "왕당파적 자유주의자들"(royal liberals)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형세를 바꾸어놓았다. 점차로 정치에 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도시 중산층들은 정치 및 부패에 관해 상당한 도덕주의적 태도를 갖게 됐고, [최소한 1990년대에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짐으로써 쁘렘 장군 및 푸미폰 국왕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 2월의 쿠테타에 이어 1992년 정치위기가 발생했을 때, 쁘렘 장군과 푸미폰 국왕은 기득권 엘리트 세력 중 권위주의적인 군부를 지지했지만, 중산층들의 강력한 반대와 집요함에 충격을 받았다. 1992년에 발생한 '피의 오월'(Black May) 사태는 푸미폰 국왕 치세 기간 내내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쿠테타 관행을 종식시키는 것처럼 보였고, 겸허해지면서 굴욕감을 맞본 군대는 어쩔 수 없이 병영 안으로 돌아가 행정부에서 배제되는 모습을 보였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푸미폰 국왕은 가까스로 이 사태를 자신의 명성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만들 수 있었다. 국왕은 TV로 생중계된 유명한 중재에 나서, 1992년 5월 20일 밤 군부 지도자 겸 총리였던 수찐다 끄라쁘라윤(Suchinda Kraprayoon: 1933년생) 장군과 시위대 지도자였던 짬렁 시므앙(Chamlong Srimuang: 1935년생) 예비역 육군 소장을 함께 '찟라다 궁'(Chitralada Palace)으로 불러 꾸짖었다. 이를 계기로 며칠간 이어지던 충격적인 유혈 폭력사태는 종언을 고했지만, 국왕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결정적인 개입을 했다는 오해가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은 짬렁과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소위 민주주의"라고 조롱조로 지칭하여, 그의 노여움은 주로 짬렁과 시위대를 향하고 있었다. 태국 중산층들은 바로 이 점을 무시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
|
|
(동영상) 1992년 5월 20일 밤, 푸미폰 국왕이 총리였던 수찐다 장군과 시위 지도자 짬렁을 불러 훈계하는 모습. 이 자리에는 추밀원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도 배석했다. 수찐다 장군은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 |
[태국에 20여년간 거주한]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 1948~ )는 푸미폰 국왕의 미숙한 "충족경제"(sufficiency economy) 철학을 칭송하면서 국왕에 대한 섣부른 찬양조의 책을 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정치에 관해 통찰력 있는 분석을 보여주었다([역주] 크리스 베이커는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행한 <2007년 태국의 인적 계발 보고서: 충족경제와 인간 계발>(Thailand Human Development Report 2007: Sufficiency Economy and Human Development)의 주저자로서, 이 보고서에서 푸미폰 국왕의 충족경제론을 찬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
1976년에 발생한 드라마(=탐마삿대학 학살 사건) 이후, 태국의 엘리트 계층과 중산층 내부의 주요 세력은 국왕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상정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총부리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군인들이나 돈의 위력으로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려는 사업가들에 맞설 때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이 쏠리지 않게 하면서도 국왕이 지닌 엄청난 도덕적 권위를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들은 1973년 및 1992년의 사태에서 국왕이 '평화의 중재자'(peace-maker)였던 것처럼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1976년 사태는 어물쩍 넘어가는 데 공모했고, 민주주의가 국왕의 하사품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1932년 혁명'(=군부에 의한 절대왕정 체제 전복)은 무시해버렸다. |
아난 빤야라춘과 쁘라웻 와시(Prawase Wasi, ประเวศ วะสี: 1932년생)가 이끌고 있던 엘리트 계층 내부의 보다 진보적인 인사들은 1992년 이후 '네트워크 군주제'가 푸미폰 국왕의 사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개혁돼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쁘렘 띠나술라논 같은 보수파들은 그러한 생각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던칸 맥카고(Duncan McCargo)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대로, 푸미폰 국왕 역시 최초에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
1992년 5월의 폭력사태는 군부와 군주에 의존하는 일을 멈출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고, 철저한 헌법적 기반 위에서 정치 개혁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모든 증거들을 살펴보면, 푸미폰 국왕 자신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1992년 5월의 폭력사태는 푸미폰 국왕에게 명백하게도 강력한 위상을 부여했다. 그는 정치위기 해소를 위해 표면상으로는 성공적인 개입을 했고, 그에 따라 최상의 정치적 심판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개입은 그의 권위에 관한 최고의 징표도 동시에 보여줬다. 그가 군부를 일관되게 지지한 일은 태국 정치 및 사회질서에 관해 그가 한물간 이해를 갖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
이것이 바로 '국민의 헌법'(People’s Constitution)이라 불린 <1997년 제정 헌법>에 관한 투쟁의 배경이 됐다. 보수파는 1997년 헌법 초안이 군주제에 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고, 바트화 폭락에 이은 '1997년의 아시아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마도 개헌을 저지했을 것이다. 경제위기로 우려가 고조되자 보수파는 개헌 반대를 포기했고, 푸미폰 국왕도 개헌안을 인준했다.
새로운 헌법이 나오게 된 배경이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국왕이 되었을 때 그를 견제할 수도 있는 헌법적 틀을 만들 필요성 때문이란 사실에 관해, 아난과 쁘라웻은 놀랄만치 솔직했다. 그것은 헌법적으로 제도화된 네트워크 군주제였다. 푸미폰 국왕의 "착한 신하들"은 보다 강화된 행정부에 대해 견제와 균형 작용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정부기관들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것은 국왕의 비공식적 개입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세자가 만일 라마 10세로 등극할 경우, 그는 단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게 되어 있었다. 드디어 태국이 참다운 입헌군주국이 된 것이다.
이제 모든 계획들은 미래의 와치라롱꼰 국왕 시대를 겨냥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국 엘리트 계층 대부분은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 확신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왕세자가 너무 미쳐서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조만간이든 그보다 먼 미래에든 너무 지독하여 수용 불가한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았고, 그러한 일이 왕세자를 밥줄경쟁에서 배제하게 될 것이란 점을 숨기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제법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왕세자는 모든 종류의 어두운 특성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시아오'(Sia-O)라는 [조폭 스타일의] 경멸조 별명도 얻고 있었다.
1996년 2월 28일, 하시모토 류타로(Ryutaro Hashimoto, 橋本 龍太郎) 일본 총리가 정상회의 참석차 '던므앙 공항'(Don Muang airport)에 내렸다. 하지만 그의 보잉 747 전용기는 F-5 전투기 3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레드카펫에 접안하는 데 20분 동안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전투기 3대 중 1대의 조종사는 와치라롱꼰 왕세자였다. 이러한 일은 자신이 9년 전 일본 방문 때 무례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한 왕세자가 공개적인 복수를 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후 1996년 5월, 태국은 푸미폰 국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세자는 이때 스캔달을 일으켜 국내외 언론을 경악시켰다. 그가 당시 자신의 아내였던 수짜리니 왕자비(유와티타 뽈쁘라셋: 별명-'몸 벤츠')가 자신의 부관과 간통을 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그녀를 왕궁은 물론이고 태국 땅에서도 공개적으로 추방해버린 것이다. 와치라롱꼰이 몸 벤츠와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파경을 맞이한 일은 그 끔찍한 공개성 때문에 관심을 받았기도 했지만, 그의 왕위계승 전망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왜냐하면 왕세자가 그녀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4명도 의절한 채 함께 추방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이제 더 이상 적법성을 지닌 남성 후계자를 두지 않은 셈이 된 것이다.
|

|
|
(사진) 드물게 남아있는 수짜리니 왕자비(유와티타 뽈쁘라셋)와 왕세자 소생 자녀들의 가족사진. |
|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