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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목사님설교)
요15:5-17/ 피택자와 그 책임 / 한경직 목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오 十五․十六)
이 말씀은 물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여기에 두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해서 세웠노라" 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내가 너희를 이렇게 택한 것은 과실을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말씀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해서 우리가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또 우리를 이렇게 택하여 세운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피택(被擇)자와 그 책임에 대해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과 그 책임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속에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피택자올시다. 택함을 입는 사람들입니다. 혹은 선민이라는 말도 씁니다. 선택함을 입은 백성입니다. 이것은 온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시는 진리입니다. 그리해서 에베소 一 장 三절 이하를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創世)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에 택하셨다는 말씀과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八장 三十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한 이들을 불려서 의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구절을 우리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해하기는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온 성경의 교훈이요, 역사의 사실이요, 또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택해서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택해서 부르시고 그 후손으로 선민을 삼았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시고 불러서 이스라엘의 구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택하시고 불러서 선지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택하여 불렀습니다. 모든 선지자를 택하여 불으신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택하여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과 야고보를 택하여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세관에서 불러서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모든 제자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신령한 가운데 불러서 이방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학습을 서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실상 내가 하는 것이 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될 때에 부르심으로 이와 같은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잃은 양이 목자를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먼저 잃은 양을 찾은 것입니다.
햇빛과 비를 주시니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슬이 먼저 흡족히 내리니 백합화가 아름답게 활짝 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를 주시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어떻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내가 예수 믿고 싶어서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이가 혹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내 친구의 권면(勸勉)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방송을 듣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다 자기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을 마음이 생겼고, 그러므로 친구의 권면을 듣게 되었고, 그러므로 방송을 듣고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해서 에베소 二장 八ㅡ九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나니 이것이 너희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합이니라." 우리에게 무엇 잘난 것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 우리를 불러주신 까닭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모든 믿는 사람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주께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거기에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가운데 요한 복음 十一장 十一절로 十六절까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네 가지 목적으로 우리를 불렀습니다. 十一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은 천재(天災)와 지변(地變)이 있고 환난과 재앙이 많고, 죄악이 많고, 질병과 고통이 많아서 흔히 한숨의 세상이라 하고 눈물의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약을 읽어보면 신약 시대에는 믿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二장을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더라." 그들은 피차에 이런 말로 항상 권면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행전 十六장을 읽어 볼 것이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한 밤중에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깊은 감옥에 앉아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라고 자기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五장 三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 까닭이라"고 기록했습니다.
第一세기에 있어서 가장 기쁜 생활을 하였던 이는 누구였을까요? 로마의 제왕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귀족들이었던가요? 아닙니다. 부자와 철학자들이었던가요? 아닙니다. 예수를 믿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해서 어떤 분은 그 때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묘사하기를 "우리는 찬송을 부르며 밭을 갈고 노래하면서 배를 저어 가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는 기쁨이 따라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쁜 일이 있어 천당 종치네 우리는 먼데서 돌아왔다"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지금도 우리는,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는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의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로 함께 우는" 동고 동락(同居同樂)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옳게 사는 데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의인들아 너희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시편의 노래와 같이 "저녁에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 기쁨이 오리로다." 인생의 저녁에 눈물이 잠깐 기숙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아침에는 다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기억하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이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눈물과 슬픔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쁨이 우리 마음에 충만해서 사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둘째는 十二절에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것이니라."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세상에는 증오가 많고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고 살벌이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사랑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까지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해서 자기의 귀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귀한 생명까지도 바쳤습니다. 이것도 선한 사람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인과 원수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까닭으로 우리도 피차에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왜? 보이는 형제는 사랑치 못하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가리워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첫 열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하라 사막 같이 냉정한 이런 세상에서 우리 믿는 사람의 집단과 가정은 사랑의 오아시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단체는 사랑의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오아시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제일 큰 은사인데 무엇보다도 이 은사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은사도 구하지마는 이 은사를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와서도 싸움질하고 분규를 일으키기 위하여 택함을 입은 줄 아는 이가 혹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서 피차에 사랑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이며, 이런 사랑을 냉정한 사회에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다.
셋째는 十五절에 "너희는 친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우리 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야고보 四장 四절에 기록하기를 "세상의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와 벗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택함을 받았습니다. 친구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서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관중과 포숙의 교훈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친구는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친구는 피차에 마음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마음 문을 엽니까? 그리스도와 언제든지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까? 친구는 경험을 피차에 나눕니다. 친구는 고락을 같이 합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같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동고동락합니까?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일이 우리가 기뻐하며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시는 일에 우리가 눈물을 흘립니까? 친구는 상부상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받칩니까? 우리가 주를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바칩니까? 정력을 바칩니까? 물질을 바칩니까? 그리스도의 참 친구가 됩니까? 친구는 피차에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친구를 닮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친구 된 생활을 하는 데서 우리의 인격과 모든 것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까? 우리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까?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봅시다. 十六절을 보세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셋째는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넷째는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택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세 가지 방면으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성격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품격, 영어에는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을 씁니다. 크리스천 캐릭터(christian character)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격이 그리스도 화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五장에 볼 것이면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성격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 가 보면 어떤 사람은 성을 내고 큰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하고 회의를 소란케 합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열매가 그 성격에 맺히지 못했습니다. 성격화되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옛날 신의주 제二교회에서 처음으로 교회 일을 볼 때에 어떤 분이 나에게 여러 제직들을 소개하면서, 은근히 나이 많은 집사님에게 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집사님은 열심도 많고 대단히 좋은 분이데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그 집사님은 이따금 메어 때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성질을 아직 버리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성격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둘째는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생활화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특색은 성결, 사랑, 정직, 근면, 공평, 화목, 책임감,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열매가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 되고 그래야 소금이 됩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합시다.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 교회 봉사, 사회 봉사, 애국 운동, 사회 정화운동, 사상 선도 등의 여러 가지 실제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약하지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거기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셋째는 그리스도의 친구로서의 생활을 날마다 하기 위해서, 넷째는 성격과 생활과 사업에 있어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一장 二十七절에는 이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 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약하고 우리가 비록 미련하지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열매를 맺어서 세상에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하여 택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학습을 서신 분들, 세례를 받으신 분들, 그리고 이미 세례를 받고 믿으시는 분들, 택함을 받은 자의 사명과 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