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년 노정 (10월 6일 제출과제물)
순우가 돌이 되었다. 낟알도 아끼시는 어머님은 다라니에 쌀을 푹푹 퍼서 많이 씻었다. 또 아버님은 지게에 쌀을 얹어서 방앗간에 서 떡을 쪄오셨다. 많은 친지들이 순우의 돌을 축하해주러오셨다. 그래도 이 맹추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맘도 별 없었다. 으레 치르는 행사처럼 지났다. 어머님은 친지들에게 떡을 사주려고 종이를 찾다가 장롱 위에 내가 보물처럼 보관했던 교회에서 나온 신문 성화지 1호부터 모아온 그 신문으로 모두에게 떡을 사주었다. 완전 역사자료인데. 나중에 보니 다 없어졌다.
그럴때 또 스승게서 임지를 정해주시며 3년동안 임지에 나가서 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시부모님의 허락 받을 일이 태산이었다. 우리 부모님뿐 아니라 전국 어느부모 물론하고 아이를 두고 어미가 타지에 나간다는 건 놀라자빠질 일이었다. 우리 어머님도 “나는 아이는 무서워서 못 본다” 하며 펄펄뛰셨다.
나는 우선 아이 젖부터 떼느라. 젖을 안 먹이자 겨울철이라 젖이 탱탱하게 불어서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말고 너무 아프고 추워서 아이를 업은채로 또 포대기를 덮어쓰고 안방 아랫묵에 엎드려 있었다.
어머님이 그 모습을 밖에서 들어오시디가 보고는 사람들에게 “우리 어멈은 전도를 못 나가게 했더니 매친 것 같다면서 ”똥 궁댕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우시더라고 하였다. 일부러 쳐들은 건 아니고. 젖이 너무 아파서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처럼 당신 딸과 사위의 설득으로 나도 간신히 허락이 되었다. 버스타는데로 가서 임지인 경남하동으로 가려고 버스에 올랐는데, 아기였던 순우는 고모등에서 업혀서도 추워서 코가 빨개가지고는 나를 쳐다 보았다. “순우야 빠이빠이” 하고 손을 흔들자 아이는 멋 모르고 손을 반짝반짝 돌리면서 웃는데. 그 때부터 흐르는 눈물이 해가져서 하동에 도착할 때까지 흘렀다. 그 시대의 가요는 슬픈 것뿐이었는데 특히 장거리 버스에는 으레히 가요가 계속 흘러나왔다. “홍도야 우지마라” “유정천리”. 우리가 가는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해도 아기를 두고 가는 길은 너무너무 슬펐다.
임지에 도착하자 아기를 두고 온 우리가정 부인들은 젖을 짜내면서 모두는 아이 생각이 어쩌면 그리 애닮은지, 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 없다. 인간 조상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지옥 같은 세상이 되었으니 후손인 우리가 반드시 천국을 회복 해드리는데 일조해야 된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씀을 전하기로 했다.
그 때 후배 대원들은 자기들끼리 활동 구역을 나누는데, 자기들은 중심지에 정하고 내 구역은 목넘어 비탈이진 마을이었다. 완전 달동네 같은 동네다. 그런데 집도 아프리카에 움막처럼 가난으로 찌들어보였다.
그런데 비탈로 올라 가 어느 집에 들어가자, 돼지우리를 손질하든 젊은 아저씨에게 “한번 오셔서 들어보시라“고 했더니 “우리 같이 바쁜 사람이 어떻게 그런댈 갈 여유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 아저씨가 와서 원리강의를 들었다. 나는 또 이틑날은 동지에게서 집에 급히 오라는 전보가 와서. 집으로 내려 오게되었다.
집에 오자 딸 순우는 그 새 엄마를 잊어버렸는지 나를 보고도 할머니에게 떨어지지 않았고, 오라고 하니까 할머니 뒤에 숨는 모습이 더 슬펐다. 그 동안 할머니는 아기가 감기들까 봐 아이를 당신 고쟁이 속에 넣어 서로 알몸으로 잤다고 하였다.
내 임지 하동에서는 내가 없어도 그 아저씨는 혼자서 계속해서 밤마다 원리강의를 들으러 왔다 한다. 대원들은 자가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니까 별 신경도 안쓰자 “무슨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데 가르쳐 주지도 않으냐” 면서 계속해서 배우려고 하여 혼자 수련도 가고 말씀도 배워서 둘째 아이를 낳아서 업고 다시 갔을 때는 교회에 주인인 어엿한 집사가 되어있었다.
임지를 마칠 때는 신집사를 성남으로 이사오게 하였다. 성남으로 이사 올 때 기어다니는 아기로부터 아이가 넷 이었다. 집사님은 장사도 할 줄을 몰라서 염소 뼈를 도매로 사서 외칠 줄을 몰라서 하루종일 지고 다니다가 해질녁에 큰 소리로 외치자 팔려서 용기를 얻고 손수례를 사서 채소를 실고 고개가 유난이 많은 성남을 골목마다 다녔다. 몇 년을 그러다가 모란장에서 쌀장사를 시작 하였다.
동지는 가끔씩 어머님 뵈러 모란 갈 때면, 교회에 들러서 신집사가 11조를 얼마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한달의 수입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그분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하나같이 명문대학 졸업에 삼성전자 직원, 교사 모두 하나같이 반듯하게 되어서 맡은바 업무에 충실하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아기를 늦게 얻은 큰딸도 3남매 모두 서울 명문대를 다닌다. 부부는 또 강원도 인제군 임계면 넓은 땅에 교회도 세우고 또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케이트볼 구장도 만들어 주민들과 같이 어을려서 지내며 농사도 지으면서 고향에 말뚝 같은 목회를 하고 있다. 후손 모두는 나발처럼 탄탄하게 발전하며 살아간다.
집사님은 입교하신 날부터 일구월심 지상천국을 위하여 그렇게 충성하고, 자식들 위해서 기도하더니 하늘의 보호하심인지 후손들이 다 잘 되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내게는 다시없는 보람이고 영원히 없어질 수 없는 삶의 보배이다.
천국은 아직 요원하지만, 반세기가 지나자 당대에 이와같은 축복을 받은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 왔다가 이와 같은 이념의 동지를 만들어 인간관계를 맻어 자녀들까지 서로 얽히면서 잘되기를 빌어주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스승의 이념이 아니었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와 같이 진실한 사람을 만날 수 가 있었겠는가. 믿음을 전수해준 분들은 우리 가정 아이들에게도 스승의 말씀처럼 울타리가 되어주고있다.
돌아가실 때는 그분은 장노님이되어서 무었보다도 하늘이 우선이었다. 그분은 성화하여 靈界에 가셨지만 나도 끊임없이 그 후손들의 발전을 빌어주고 있지만, 항상 우리가정을 보살피고있는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믿고 있다..
신장노님으로 하여 조카 또 믿음의 자녀들은 한국을 위시해서 일본 또 각처에서 반듯하게 잘 살아간다. 순결한 세상은 요원하다 해도 순결을지키겠다는 사람이 세계 각처에서 불어나고 있다는 건 기적이며 인류의 희망이자 曙光(서광)이 아닐 수 없다. 스승 아니었다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와 같은 충신들을 만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