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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진리는 하나라고 말한다.
조그만 강물들이 바다에 이르듯 모든 견해와 교리는 그 속에 이미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견해이든, 누구의 견해이든, 설사 자신의 교리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선법인지, 불선법인지를 나누어 분별한다.
이는 부처님과 대등한 성인으로 여겨지는 나머지 성인들의 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나머지 성인들의 교리와 삶에 대해 논하여 본다.
출생년도는 학설에 따른 이견들이 많아 대표적인 것을 기재한 것일 뿐이다.
1. 석가모니(BC 624년 ~ BC 544)와 노자(BC 604 ~ BC 531)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 1장 구절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을 감추고 소욕지족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노자가 설한 진리는 '도'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날 때 '덕'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덕'은 드러난 모습일 뿐 '도' 자체는 아니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상대적으로 높고 낮음 혹은 옳고 그름이 정해지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참된 진리인 '도'는 현실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을 뿐 현실에 드러나는 것들의 뿌리가 곧 '도'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도'는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드러낼 수 없지만
현실에서 '덕'으로 드러나니 '덕'에서 '도'를 역추론해서 발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노자는 그러한 인간의 의지적 사고와 행위 마저 부정한다.
단지 대자연의 흐름에 순응(무위자연)함으로 인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지적 사고와 행위 자체는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장애를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옛부터 도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깨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몸매하게 만들었지.
다스리기란 어려운 일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이지.
지혜로 다스리는 자는 나라를 망치지만
지혜로 다스리지 않는 자는 나라의 복이 되네.
이것은 두 가지 원칙,
이것을 아는 것이 본래의 덕이라네.
본래의 덕은 깊고도 멀어라.
이는 모든 것을 되돌려
커다란 하나에 따르게 하는구나.
- 노자 도덕경 65장, 조현숙 역 중
부처님이 설한 바른 법에서 보면 노자의 견해는 우연발생론에 속한다.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진리를 괴로움을 알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사성제법)으로 한정짓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주자연의 흐름에 대한 거대한 진리를 안다고 해서(그런 것이 있다면)
자기자신의 눈앞의 괴로움이 과연 해결될 수 있겠느냐는 모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참된 도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을 해결하게 하는 법이어야 하고,
그것은 사성제법을 꿰뚫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진리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른 안내자 역할을 하며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인간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법답게 행하는 자는 선과(괴로움 없음)을 받고
법답게 행하지 못하는 자는 불선과(괴로움 있음)을 받을 뿐
현실의 과보는 신, 숙명, 우연의 작용이 아닌
자기자신의 의도적 행위인 신∙구∙의 삼업에 의함일 뿐이라고 설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한 참된 진리는
자기자신의 의도적 행위를 현실에서 괴로움 없도록 제어하는 법이 된다.
그 법을 아는 자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삶을 살아가고,
그 법을 모르는 자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허덕이며 살아가게 된다.
시하여, 나는 업지음 없음을 가르친다. 나는 몸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는 자에게 여러 가지 나쁜 불선법을 짓지 말 것을 가르친다. …
시하여, 나는 업지음을 가르친다. 나는 몸으로 좋은 행위를 짓고 말로 좋은 행위를 짓고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짓는 자에게 여러 가지 선법들을 지을 것을 가르친다. …
- 시하 경(A8:12),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중
2. 석가모니(BC 624년 ~ BC 544)와 공자(BC 551 ~ BC 479)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편삼절(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 가죽끈이 세번 끊어짐)의 일화나,
그가 남겼다고 하는 저서들인 십익이 모두 주역의 이해를 돕는 글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참된 진리는 자신의 미래(운명)을 아는 것일 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후대 제자들이 남긴 저작인 논어를 보면
그가 제자들에게 주로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고(치세)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긋나지 않는 법(인∙의∙예∙지)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는 자신처럼 타인을 배려하고 돌보는 마음가짐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자공이 묻기를 “한 마디 말로서, 평생토록 행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은 ‘서恕’이니,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 논어, 위령공(衛靈公) 중
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앞서 언급했듯이 철저한 자업자득의 가르침이다.
현실은 자신의 의도지음의 결실일 뿐 정해진 운명 혹은 숙명이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돌보고 배려하기 이전에
나 자신의 괴로움과 그 원인이 되는 의도지음부터 살피라고 설한다.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일단 내버려두고
자기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들이 결국
세상과의 관계와 세상에서 배운 지식들에서 오는 것들이지만
그러한 것들에 의미부여하고 묶여나가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공자의 가르침처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자신과 가정을 잘 다스려, 세상의 평안함을 이룬다)를 공부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눈앞에 괴로움 없음이 드러나도 그것은 그에게 족함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의 평안함을 위해 나 자신의 괴로움 없음 쯤은
희생되어도 마땅한 것으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는 데와닷따가 부처님께 보다 강한 계율을 승가에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부처님이 논파하는 일화이다.
"스승이시여, 세존께서는 항상 고행자의 삶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호사스럽게 사는 비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략)
"스승이시여, 출가수행자가 반드시 수용해야 될 다섯 가지의 행동지침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어떤 형태의 사회생활도 피하고 평생동안 숲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전적으로 탁발한 음식에만 의존하고 어떤 초청도 수락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그는 재가신자들이 제공한 옷감 대신 넝마로 만든 가사를 입어야 합니다. 넷째, 그는 안락한 주택에 기거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다섯 째, 그는 결코 고기 혹은 물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며, 완전한 채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을 떠나 출가한 수행자들의 삶은 이렇게 준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은 비단 수행의 목표에 보다 빨리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도 찬탄할 만한 것이 되게 할 것입니다."
"됐네, 데와닷따." 붓다가 대답했다. "거기 인기 경쟁이 없도록 하게! 어떤 비구가 모든 번뇌로 부터 자유 자재하다면 나는 그의 생활을 숲 속에 제한시켜야 된다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연못 속에 물에 젖지 않는 채 피어 있는 연꽃처럼, 깨달은 제자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과 남을 해하지 않고 오히려 위대한 인간에의 봉사자로 살 수 있다. 데와닷따, 숲속에 피었다가 거기서 지고 마는 아름다운 꽃이 어디에 소용되겠는가?"
(중략)
"스승이시여, 만약 제자들이 따라야 할 분명한 규율이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데와닷따가 물었다.
"데와닷따, 고정된 율법을 채택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오직 인간의 삶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고정된 법칙에 의해 다스려질 때에 한해서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고정불변의 법률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런 법칙을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물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나는 세계를 변해가는 과정중에 있는 존재라고 공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승가의 규율을 위해 불가침의 법을 제정할 수 있겠는가?
데와닷따, 이 세상의 고뇌는 인간 개개인의 성벽 혹은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성벽과 성향은 다양하게 조건지어진 것이다. 행복은 바로 모든 성향의 평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향이 다양하게 조건지어진 것이라면,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길 또한 각기 다를 수 있다. 데와닷따, 따라서 나는 수행의 목표는 하나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혁명가 붓다, p 308 ~ p 301 중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른 법을 토대로 스스로 사유하여 괴로움 없음에 이르는 길일 뿐
타인을 위해 행하거나 계율에 의해 성취되는 그런 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3. 석가모니(BC 624년 ~ BC 544)와 소크라테스(BC 469 ~ BC 399)
소크라테스는 현실의 감각기관은 순수영혼을 깨닫는데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육체에서 벗어난 순수영혼을 경험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순수영혼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이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후대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에게
이데아, 순수이성, 절대정신, 초인 등의 이름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하는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영혼으로부터 벗어나 분리된 육체의 상태
육체로부터 벗어난 분리된 정신의 상태가 아닐까?
그것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철학자란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영혼을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육체가 지식을 탐구함에 있어 그것은 방해가 되겠는가?" 즉
시각이나 청각이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르쳐주는가 하는것일세,
이것들은 우리에게 정확하지 못한 것을 전해주는것으로 생각하네
그런데 이것들마저 정확하지 못하고 분명치 못한 것이라면 나머지 감각은 어떻다고 해야 옳겠나?
시각이나 청각은 모든 감각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니 말일세 이에 동의하는가?"
"확실히 영혼은 쾌락,고통,시각,청각같은 모든 혼란에서 자유로울 때 즉
육체를 무시하고 쵀대한 독립하였을때 그리고 가능한한 모든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에 사로잡히지않고 진실을 추구할때 최상의 사유를 할수있다는 말일세"
"오직 정신력만으로 각 탐구대상에 접근해나가고
이성의 활동에 시각이나 그밖의 감각을 끌어들이지 않으며
정신자체의 밝은 빛만으로 참된 존재를 탐구하는 사람만이 그
탐구대상을 가장 순수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즉 눈이나 귀 또는 모든 신체기관이 영혼과 관련되면 영혼이 진리와 지혜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고 가능한 이런 것과 관계를 끊고
이런 것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참된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육체는 우리로 하여금 인정과 욕망, 공포 그리고 온갖 공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결과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사고할 기회를 빼앗아 가고 있네
전쟁,혁명,분쟁들은 모두 전적으로 육체와 육체의 욕망에 기인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진실한 철학자들만이 이처럼 육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하네
실제로 철학자들의 소망은 오직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방에 있네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편, 범우문고 중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외도의 견해일 뿐이다.
부처님은 육체와 정신은 조건지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고 설하신다.
“사띠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한다.’라는 견해가 생겼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합니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쓸모없는 자여, 그러나 그대는 그대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쌓는구나. 쓸모없는 자여, 그것은 그대를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 갈애 멸진의 긴 경(M38),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중
물론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육체와 별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견해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육체와 정신이 조건지어져 있음을 바르게 깨닫는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무상하여 그것에 대해 '나∙내것∙나의자아'라고 묶이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육체와 정신이 '나∙내것∙나의자아'가 아니라면
그는 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크라테스식 견해에 다시 빠질 수 있다.
이를 소크라테스식 견해라 하는 이유는
위의 인용구절에서 보듯이 그는 감각기관의 갖춤이 곧 순수한 영혼이 사물을 있는그대로 보는데
장애를 가져온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안∙이∙비∙설∙신∙의(육근)를 통해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하는 것들(육경)에서 생겨나는 욕탐(탐∙진∙치)을 제거하는 법일 뿐이다.
그 욕탐이 결국 육체와 정신(오온과 오취온)에 대해
'나∙내것∙나의자아'라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생겨남을 알아
괴로움의 원인을 그 뿌리부터 뽑아버리라는 가르침임을 알아야 한다.
4. 석가모니(BC 624년 ~ BC 544)와 예수(BC 4 ~ AD )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부처님에 비해 예수가 우월함을 얘기할 때
가장 자주 드는 사례가 부활이다.
석가모니는 결국 죽을 뿐인 인간이었지만,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만 3일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냐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 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중
위 내용을 보면 죽은 예수가 눈같이 흰 옷을 입고 부활하여 앉아있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육체에 의지하지 않은 영혼이 어떻게 옷을 입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입이 없는 영혼이 무엇으로 말을 하며
귀도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까?
또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들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세를 받은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군병과 유대인들도 자신의 제자로 삼으면 그만이지,
굳이 제자들에게 분부를 내려 기독교가 세상에 퍼지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30년 전쟁, 십자군 전쟁과 같은 끔찍한 종교전쟁도 일어나지 않토록 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예수와 비교하여
부처님은 대반열반경에서 내가 죽고나면 내가 설한 법과 율을 통해 살아가라고 설하고 있다.
6.1. 그 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 대반열반경(D16), 디가니까야 2권 p283
부처님은 신의 섭리에 대해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3.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 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파괴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다.”
- 외도의 주장 경(A3:61), 앙굿따라니까야 1권 p434 ~ p435
신의 섭리를 믿는 순간 삶에서 자신의 의지적 행위가 끼어들 틈은 없게 된다.
잘 되어도 신의 탓, 못되어도 신의 탓인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철저히 신에게 기도하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지만
신을 믿으면 복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만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전부이다.
스스로 한번도 검증하고 시험해본 적도 없이
단지 믿음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거기에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9. “깔라마들이여,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 깔라마 경(A3:65), 앙굿따라니까야 1권 p459
이상 세상에 알려져 있는 위대한 성인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았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면 그들의 가르침은 외도설일 뿐이다.
신 혹은 영혼의 존재문제, 내세와 운명에 대한 문제, 우주자연의 이치에 관한 문제 등에 있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살피고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익히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 법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여
삿된 견해를 논파하는 것(파사현정破邪顯正)이 바른 수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외도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321 ~ p 340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