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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태영)의 부모님(정광식)을 도우며 살아온 농업종사 이야기《1》
1952년생으로 2019년에는 68세가 된다.
유현초등 1959~1964
군북중 1965~1967
함안농고 1968~1970
정영조(큰형님)이 부산 수정동에서 1963년 10월부터 쌀장사를 했고, 내가 함안농고 3학년인 1970년까지는 아버지(정현락)와 큰형님은 딴살림(농사 별도)를 했다.
함안농고를 졸업한 1971년부터 내가 분가한 1980년까지는 부산에서 쌀장사를 하면서 9년간은 공동살림(공동 농사)을 했다. 비료대와 농약대, 인건비(모내기, 수확 등 품삵)을 대었으나, 가을철 수확 미곡을 쌀장사에 매년 자본금으로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큰아들 쌀장사가 잘되는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무렵에 시장통을 산 것이 현재의 수정동 집(정병태 협의 상속 소유)이다. 막내인 내가 있어 아버지 농사를 도왔기에 공동농사도 가능했다. 아버지와 나는 무료 노임이다. 내가 도시로 나갔다면(공장 진출 등) 또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 농사일을 힘껏 도우니 덕분에 결혼도 일찍하게 되었다.
농고 졸업 후 고향에서 방위병 이전의 아버지와 농사 전담 ; 1971(20세)~1973(22세)
축농증이 있어 방위병 1년 2개월(14개월) 복무(군북 향토예비군 중대)하면서 농사 전담 ; 1973(22세)~1974(23세)
1974(23세)~1977(26세) ; 아버지 농장 논밭을 도맡아서 농사일을하며
1977(26세) 결혼하여
1980(29세) 분가 때까지 3년간 아버지(정광식) 집에서 머슴 조홍제(월촌 사람), 이어서 이피옥(유현 민등 사람)과 농사를 전담했다. 아버지는 1912년 임자생으로 당시 연세가 69세로 올해(2019년 기준) 내 나이 68세보다 1살 위의 연배였다. 아버지는 농사 감독관, 나는 머슴과 같이 농사 현장 소장격이었다.
부산 정영조 형님은 품삵, 비료, 농약 등 농비를 대면서 아버지의 기존 농토(현재 병권과 딸네 상속 경지정리 토지)로 공동 살림(농사)를 했지만, 부산 수정동에서 쌀장사를 했기에 농사일을 직접 한 적은 없고, 내가 아버지 농사일을 도맡아 하며 경운기, 탈곡기 등 농기계 운용도 머슴과 함께 벼 모내기에서부터 가을 수확에 이르기까지 농사 현장 일은 내 담당으로 근로 감독관 아버지의 지시를 받들어 순종하며 성실히 일했다.
1971년 내가 농고를 졸업하여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농사를 전담하면서 1980년 분가할 때까지 약 9년간이 큰형님(정영조)과 아버지와의 공동농사 최전성기로 부산 쌀장사도 9년간의 쌀 자본금 투입으로 최성황기로 그 기간에 벌판 3개를 매입했다. 벌판 3개란 봉산마을 정두식 줄대밭 1,295평, 마산 수원백씨 초지 1,173평, 육풍길 이태리 버들밭 2,685평 합계 5,153평을 말한다. 현재는 매각되어 소유하지 않는다.
분가 후에도 아버지는 농사 감독관 직책을 놓은 시기는 내가 분가한 1980년 후반기 부터다. 실제로는 1981년(70세)부터 아버지는 농사일에서 해방되어 유도회 향교(함안, 의령) 등을 출입하면서 유유자적의 여유로운 생활로 유림과 교우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기존 농사 농토를 내가 전부 인수받아 전담했는데, 내가 직접 머슴으로 조영래(일명 조철도, 유현 봉산 사람)를 10여 년간 고용했다. 분가 후에는 아버지 농토를 전담하되, 가을 벼 수확은 절반으로 정영조 형님과 나누는 방법(소작의 한 형태)으로 경작했다.
집사람은 컴바인으로 벼를 수확한 후 떨어진 낱곡을 주우며 이런 농담을 자주 말하곤 했다. ''이 이삭 한 묶음도 아까와서 주워 보태면 부산 아주버님과 반반씩이다''(나누어야 된다)
우리는 반반 소작이지만 상호 이익이라 생각하며 수확증대를 위하여 참 열심히도 일했다. 큰형님은 장자로서 아버지(정현락) 보유 토지의 특권적(우월적) 음덕을 입었음을 큰형님 후손 조카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부모의 그늘이 백리를 뻗친다'는 옛 속담 그대로이다.
나는 농사 짓는 노동의 댓가로 큰형님은 장자로서의 권한 행사였기에 수확을 절반씩 나누었지만, 상부상조 공생관계였지만 큰형님과 나는 상호간 다 이득을 보긴 했어도 요즈음 유행어처럼 갑과 을의 관계였다.
8남매의 끝자락으로 아들과 같은 나이 또래의 농고 출신의 전문 농사꾼 동생이 있었기에 벼 수확이 현재까지 가능했다. 막내 동생이 없었다면 남에게 소작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남과의 공생관계는 불편했을 게다. 아버지 농사일은 가장 많이 도운 아들은 부산의 정갑영 형님과 내가 될 것이다. 현재도 나는 트랙터, 컴바인 등 기계화된 농업을 하고 있다.
남강댐이 1969년10월 7일 완공되기 전까지는 큰홍수가 나면 황토물이 소름모탱이 아래 육맹수 논 아래까지 물이 차기도(들기도) 했다. 홍수의 수위(높이)는 해에 따라 달라도 물이 매년이다시피 신촌마을 우물 있는 곳까지 들었다.
남강댐이 완공된 이후에도 남산벌 석교천 둑이 완공되기까지는 홍수가 선들뱅이 아래 오리금 저습지까지 물이 침수됐지만, 아버지 농토는 지대가 높았기에 매년 그런대로 80~90% 이상의 풍작을 거둘 수 있었다.
참고로 낙동강 수계의 남강댐은 1969년 10월, 안동댐은 1976년 10월, 합천댐은 1989년 5월 준공되었다. 그 후 안동 임하댐은 1991년 12월 담수 개시(준공 ; 1993.12.31)이다.
낙동강 수계의 안동댐, 임하댐, 합천댐은 진주 남강의 수계는 아니지만, 창녕 남지와 함안 대산면의 합강정(合江亭)에서 두 강물이 만나기에 낙동강 수계가 높아지면, 본류인 낙동강의 수위가 북받쳐 올라와서 함안 대산면의 송도교(양쪽 산 사이 좁다란 병목처럼 생긴 협강:狹江이 있음)에 남강 물이 본류 낙동강으로 나가지(빠지지) 못하여 옛날에는 함안 저지대 침수 수해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석교천 제방이 1981년 완공되어서야 무딩기 아버지 전답은 옥토가 되었지만 완전한 옥토는 1982년 이후 부터다.
그것도 1981년에는 남산벌 석교천 제방이 준공되었으나 첫해에는 둑이 견고하지를 못하여(새둑으로 다져지지 않아) 배수장 주변의 둑이 터져서 그해는 농사를 완전 망친 해도 있었다. 경지정리는 1982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의 농토가 되었다.
아버지 무딩기 농토는 남강댐 준공 이후로 침수가 남강댐 준공 이전보다 1/3 수준으로 덜했지만(낮아졌지만) 완전한 옥토가 된 것은 1982년 부터이다.
영조 형님이 농비(농사 비용)를 대면서 가을 수확물 쌀 전량은 해마다(매년) 1년(12달) 회전의 쌀장사에 투입되면서 살림이 일시에 일어나 봉산 정두식 줄대밭(유현리 1025 ; 잡종지 1,295 평), 마산 수원백씨 초지:풀밭(유현리 1026 ; 잡종지 1,173 평), 육풍길 이태리 포플러 버들밭 잡종지 3필지 중, 1960년 4월에 1차 분할 매각한 1049 - 5 잡종지 1,190평 제외, 잡종지 2필지 ; 1049 - 6, 1049 - 13, 전 3필지 ; 1049 - 1, 1049 - 3, 1049 - 5, 답 1필지 ; 1048 - 1, 구 1필지 ; 1049 - 4, 합계 1,495.25평, 전체 육풍길 버들밭 평수 2,685.25평도 매수할 수도 있었다. 합 5,153평이다.
부자지간 장자와의 공동농사에서 할아버지의 공적을(이바지함) 묵과 할 수 없을 게다. 상기 합 5,153평(큰형님 정영조 매입) 이외의 나머지는 아버지가 일군 땅으로 7남1녀에게 분가하면서 배분되고, 평촌마을 본가 윗쪽 골짜기 농토와 산판(유현리 산 78 - 3)은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으로 공동소유가 되었다.
정두식 줄대밭과 마산 수원백씨 풀밭 2개 지번은 석교천 제방 준공 후 수리안전 답(논)으로 농사를 짓다가 잡종지이기에 정영조 형님 생존시 (주)성일SM(구, 성일기업) 우양호에개 매도되어 수정동의 정병태 집 매입과 한의원 개업 비용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안다. 육풍길 버들밭(8개 지번)은 정병권 소관으로 매각되어 현재 소유하지 않는다.
육풍길이 버들밭 중 남은 잡종지 등 1,495평은 농토로 경작하다가 정영조 형님 사후 한국제강 하성식에 정병권이 모두 매도하였다. 하성식은 다시 가격을 높여서 재매도하여 현재는 고철 집하장 기업인 함안자원(주) 본사가 입주해 있다. 함안자원(주)는 군북면 유현리에 2곳, 함안 칠서면 1곳 등 3곳의 집하장을 둔 고철 집하장 업계의 거부 사업가다.
상기 토지 줄대밭, 초지 풀밭, 이태리 포플러 버들밭은 군북면 장지리, 사도리, 유현리와 법수면 강주리 일원의 남산들의 1981년 석교천 제방 준공 이전에 매입했기에 기존 논값의 1/5~1/8 수준의 시세였기에 매입금은 헐값이었다(약했다).
수년내(장래에)에 제방이 될 것이라 미래를 내다보고 토지(땅)에 욕심이 많은 아버지(정광식)와 시골의 정삼영 형님의 적극적인 권고로 매입이 이루어졌다. 큰형님(정영조)은 쌀장사 호황으로 돈은 벌었지만, 벌판 풀밭의 장래성에 대하여는 아예 몰랐다.(부산 거주라 문외한 수준이었다)
나는 함안농고 졸업후 방위병포함 10년간(1971~1981, 아버지 연세 ; 60세~70세 동안)을 경운기 등 농기계를 사용하며 농사일에 머슴과 함께 일했다. 아버지는 연세 관계로 심한 노동은 못하시고 감독만을 하시고, 농기계 운용은 내가 전담했다. 아내 조호자도 일꾼(머슴)의 아내로 3년간 힘껏 도왔다.
평촌 아버지 본가에서 딸 범진, 범은 둘을 낳아서 신촌으로 분가했다. 분가 때 신촌마을의 대지와 건물(가옥)은 박정희시대 고속도로 주변 촌락(마을)의 환경정비시책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정부의 저리 융자로 지었고, 아버지로부터 지원금은 당시 화폐로 50만원을 받았을 뿐이다. 정부 융자는 내가 농사 수익으로 모두 상환했다. 아버지 농기구인 경운기와 농기계 몇개는 내가 승계했다.
병권 장조카는는 정영조 큰형님이 8남매의 장남으로 6남 1녀 동생들 전부 결혼 시켜서 분가(제금) 시키고, 상속으로 논밭을 갈라주고(나눠주고), 아버지 정광식은 허수아비로 방관자 수준으로 구경만 했던 무능력한 할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아버지가 매입한 헐값의 무딩기 벌(벌판)은 남강댐이 준공되면서 옥토가 되었다. 어떤 것은 사는 것 마다 훗날 남해안고속도로 편입으로 수용되어 보상 받기도 했다. 농토 재복 하나만은 타고 나신 분이었다. 그것으로 7남 1녀(실제는 7남 2녀, 홍역으로 1녀 잃음)를 낳아 성혼 시켰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사실과 너무 달라서 그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호가 유은인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신 분이지만 8남매를 낳아 어긋나지 않게 엄한 교육과 자식 사랑으로 가풍을 일구신 대단하신 어른이시다.
아버지는 5시에 일어나 개똥을 줍고(거름하려, 옛날에는 집집마다 똥개 사육), 쟁기질, 써레질, 무딩기 두레박 물퍼기, 보리와 밀, 벼농사, 참외밭, 담배밭, 삼밭, 목화밭, 고추밭 등, 나중에는 대동공업사 발동기를 사용한 양수기, 벼와 보리타작기계 도입 등 억척같이 일하신 분이다. 발동기, 벼와 보리 타작 기계는 군북면에서 우리집이 최선두로 도입했다.
나는 아버지의 성실 근면하신 교훈을 받들어 매일마다 아버지처럼 새벽 5시에는 꼭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젖소 5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현재 100여 마리에 이른다,
남해고속도로 함안지역에는 lC가 3개나 있다. 함안, 장지, 군북이다. 거리가 4~6km로 근접한다. 장지 IC는 가운데 끼여있다. 당시 한국도로공사 사장으로 의령 출신 정동호였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서 군북면 장지리, 소포리, 유현리와 법수면 강주리, 우거리 일대의 주민 500여 명 서명부도 내가 돌면서 받기도 했다. 장지 IC 개설 제창은 내가 최초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서명부를 받아내는 것은 내가 다 했다. 당시 나는 이동성이 있는 오토바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명부 받는데 내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음을 사료로 밝혀둔다. 정동호 도로공사 사장이 의령, 함안, 합천 선거구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기에 민심 획득차원에서 쌍방 이해가 합치되어 성사될 수 있었다. 건설부와 한국도로공사로부터 검토하겠다는 회신도 내 앞으로 왔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유현 문전 옥답 10마지기 2,000여 평을 상속 받아 그것을 종자재산으로 젖소 목장과 쌀농사 겸업으로 1남 4녀 모두를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현재 4녀는 성혼하여 외손자ㆍ외손녀를 8명을 두고 있다. 하나 남은 아들 정범평은 2019년 4월경에 결혼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옥답 2,000여 평의 절반 1,000여 평은 처음에는 논보다 1m 가량 높은 지대의 자갈밭(옛날에 유현천 둑이 터져 수십년 동안 토사와 자갈이 쌓인 밭이었다)으로 아버지의 포도밭 과수원이었으나 수익이 제대로 나지않아 도자로 평탄작업을 하여 현재의 논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도자 평탄작업 비용이 당시 화폐로 15만원이 들었다.
평탄작업 15만원 비용 장만의 뒷 이야기이다. 큰딸 정범진이(1978.6.9생)가 태어나던 그무렵 경운기를 몰고 군북장에 가던 길에 유현초교(현재 폐교) 부근의 정미소 옆 남해고속도로(당시 왕복 2차선) 둑 아래에 돼지 새끼 1마리가 운송 차량에서 떨어져 꿀꿀대고 있었다. 이것을 주어다 농부산물 쌀딩겨와 부엌 꾸중물로 길러서 중돼지가 되어 정영철 전통(재래)결혼식 때 부천아재에게 판 대금 15만원이었다. 새해 2019년은 기해년으로 복돼지해(금돼지해)라고 한다. 복돼지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복은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데서 온다. 부모로 받은 유산은 1개도 팔거나 축낸 적이 없다.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에서 늘리기는 커녕, 하나씩 팔아가는 것을 볼 때, 내 자식도 그런식이 안 되기를 바래본다. 생전에 부모가 어럽게 일군 농토라는 것을 알게끔 가르칠 예정이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95년 3월 2일(음 2.2) 돌아가셔서 옛 사람이 되신 아버지의 크나큰 은혜를 되새기며 자식으로써 항상 감사함으로 살고 있다.
註 ; 상기 글은 유현 동생 정태영으로부터 초안과 구술을 받아 형인 내(정봉영)가 정리한 것으로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연대표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오류는 발견되는대로 수정할 예정이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도 떨어진다. 더 늙기전에 옛날을 회고하여 《2》《3》를 연재할 예정이다.
2018.12.30 무술년 개띠해를 하루 남겨두고서 기록한다.
☆☆☆
註 ; 인물정보
정태영(鄭泰永, 1952. 음 4.8~) 字는 태원(泰原), 號는 경계(景溪)이다. 함안농업고등학교 졸업, 현재 낙농(젖소 100여 두)과 대단위 벼농사를 한다.
배우자 ; 함안조씨 조호자(趙好子,1954.2.26~)
가계도(자녀와 배우자)
슬하 1남 4녀
장남 정범평(鄭汎平)ㆍ최다워
장녀 정범진(鄭汎眞)ㆍ이희포(李熙捕)
2녀 정범은(鄭汎恩)ㆍ이동주(李東柱)
3녀 정범정(鄭汎正)ㆍ박호상(朴浩相)
4녀 정우주(鄭佑珠)ㆍ구재준
첫댓글 정태영 삼촌이 시골 농사일을 전담하여 고생도 많이하시고 지금까지 열심히해 오시고 지금도 대농으로기계화영농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정봉영삼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함안농고에서 대학 가기위해 1년 재수할때 집안 농사일을 도왔겠지요~
그후 함안농업고등학교3년
->함안거주
진주농업대학교4년
->진주거주
ROTC군 입대및제대,
취업,직장,
결혼->진해,마산거주
언제 정봉영삼촌이 직업적인 농업일을 했습니까?
가끔 알바 하신 모양이죠~
그것은 그냥 부모님을 위해
도운것입니다.
결혼전 부모,형제를 위해 도우는것은 너무나 당연한것 입니다.
결혼을하면 자신의 가정을 위해 살아야 하는것이고~
땅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사람은 평민, 소시민으로 살지라도 대의(大義)가 뭔지를 알고 살아야 한다.
일일이 사소한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상기의 잘못된 부분만 언급한다.
함안중학을 15살에 졸업하여 1년간 재수를 한 것은 경남공고나 함안농고는 공립학교로 전기에 같은 날 시험을 본다. 후기를 가려면 도시에만 후기 모집 학교가 있기게, 그렇게 갈 수가 없기에(형편이기에) 할 수 없이 16살 때 1년간 농사일을 도왔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한 재수가 아니고 후기 모집 고교가 없기에 1년을 어쩔 수 없이 묵힌 1년이다(주저앉은 기간이다)
재수라는 용어는 맞지 않다.
땅 이야기는 내가 먼저한 것이 아니고, 병권이가 먼저 했다.
유현리 대지 3개, 답 1개가 상속받은 내 땅이니,
할아버지 정광식(족보명 ; 정현락)의 아호 유은(柳隱)이 들어간 유은재(柳隱齋 ; '재'란 집이란 뜻), 골짝의 공동 위토와 산판을 표시하는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柳隱後孫宗中) 표지석 2개가 보기 싫으니 뽑아서 옮겨 달라고 요청한데서 발단(단초)이 된 것이다.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은 정유은(정광식:정현락 ; 같은 명칭이다)의 후손 7남1녀, 정영조, 정영만, 정을남, 정삼영, 정갑영, 정창영, 정봉영, 정태영 후손으로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는 후손을 말한다.
장자 정영조에서 막내 정태영까지 포함된 후손이다.
위에 내용을 쓴것은 정태영 삼촌에대한 이야기이고, 정봉영 삼촌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정봉영 삼촌에대한 후안무치,내로남불의 형태에 대해 격분하고 있는것입니다.
정태영 삼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조금도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정태영 삼촌은 농사를 짖고,젖소를 키우고, 근면하고 전문적인 영농인으로 노력하신 분으로 한평생을 고생하며 드물게 성공한 영농인이시며,
지금은 함안 군북면에서 농업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평소 자신의 근면성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함안 군북에서 제일부자로
잘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유림과 교우, 어쩌고" 하는 시대에 맞지않는 말투가 이젠 듣기가 거북합니다.
그러니 유치한짖 그만 두시고
집앞에 불법으로 여러게 석비를 세워 나를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테러 할려는 짓을 그만 두세요.
나와 삼촌이 다투고 경쟁하여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하나의 댓글을 쓸지라도
언어의 선택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후안무치, 내로남불, 형태에 대해 격분, 유림과 교우 어쩌고, 유치한 짓, 테러할려는 짓'' 등 등
상기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지 묻는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아무 말이나 끄집어와서 함부로 사용하네.
거듭된 막말 실언의 연속이다.
국어순화교육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할아버지(정현락)가 함안향교, 의령향교와 각 유림회관에 출석했다는 말이다.
상기는 김해향교와 유림회관 참관기이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닌데,
할아버지 더러 ''유림과 교우 어쩌고 저쩌고, 유치한 짓''이라니?
상기 김해향교와 유림회관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이 ''유치한 짓'' 하는 사람들인가?
각 시군의 향교는 문화체육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옛 사람으로 출입했다는데, ''유치한 짓''으로 매도한다는 것은 상식 부족과 전통을 아예 무시하는 형태이다.
각 시군에는 향교가 있다.
합천군에는 4개의 향교가 있다. 합천읍 ; 강양향교, 초계면(옛 초계군) ; 초계향교, 삼가면(옛 삼가현) ; 삼가향교, 야로면 ; 합천향교(해인사 아래 조선시대 억불숭유 시책),
함안군에는 2개가 있다. 함안면 ; 함안향교, 칠원면(옛 칠원현) 칠원향교이다.
상기 행사에 시장, 시의회 의장, 국회의원, 시의원, 교수 츨신 박사, 은퇴한 고위직 행정, 사법, 경찰, 교직, 군인들도 참관한다.
'유치한 짓'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번에 김포공항에서 갑질하여 낭패를 본 김해을지구 국회의원 김정호도 이 어른들 앞에서 큰절을 하기도 했다.
다음 사진 2장이다.
김해을 보궐선거(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 ; 2018.6.13, 경남도지사 후보로 진출한 김경수 자리)로 국회의원이 되기전 김정호 당시 '농업법인 봉하마을 대표이사(노무현의 마지막 호의무사 ; 농업인, 농사꾼)가 김해 표충사 송담서원의 봉향례(향사 봉행)하는 어른들을 찾아 큰절을 한 시기는 2018.6.3로 기록에 나온다.
김해을 보궐선거로 국회 초선의원이 된 김정호가 김포공항에서 특권 갑집 논란(목에 힘을 너무 주다가)이 발생한 날짜는 검색해 보니, 2018.12.20로 나온다. 국회의원이 된지 6개월 17일 만에 대서특필되어 계속 안 그랬다고 부인하다가 결국 국민들 한테 엎드려 큰절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정유은)가 유림과 교유, 어쩌고, 유치한 짓'이란 장손자의 말에 대한 반박 증거 사진 1장이다.
조선 초기의 명유(名儒)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는 도동서원(道東書院), 정중당(正中堂)은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한다.
함안, 의령향교 유림회에서 75세 무렵(1986년 경)에 단체 방문한 사진이다.
유은 할아버지는 맨 앞줄 3째와 4째 양복입은 사람 사이 둘째줄에 서 계시다.
옛 선현을 찾아보는 ''유림 교유 어쩌고가 유치하다''란 말인가?
매일같이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나 하고 잘 사십시요.
양반,쌍놈 가리면서 흘러간 옛날 이야기나 하고 자신의 취미에 맞는 사람들하고 어울려 유림의 고풍 이야기를 나누시고 즐겁게 사십시요.
쓸모도 없는 닭 대가리가 되어
우두머리 관리자로 사십시오.
나는 소꽁지가 되어도 좋으니 소가되어 소같이 값어치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세상 만사가 눈에 거슬린다며 비딱하게 보며 비비꼬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에서 제발 탈출하기를 당부한다.
''소 꽁지(꼬리)'' 귀에 경 읽기다''
대화 끝~!!
나(정봉영)는 정유은 아버지로부터 상속으로 받은 유일한 재산은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954 답 3696m²(1,118평)이었기에 새롭게 토지대장을 발급받아 보았다.
형제가 많은 관계로 결혼(장가) 비용에서부터 분가까지 자립하였기에 상기 논 외에는 부모님에게 기대거나 누를(걱정을) 끼친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기 논은 아파트 큰평수 매입 때인(늘리는) 1993.9.6 자로 아버지의 권유로 정태영 동생에게 매매했다.
평당가는 2만원으로 기억된다. 22,360,000원이다. 당시 아파트 평당가는 180~200만원이었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한 푼도 못 받은 친구들이 주변에 많은 것을 볼 때, 평생 농부이신 부모님의 무량한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다
유은재(柳隱齋) 농부(農夫) 유은(柳隱) 정현락(鄭鉉洛, 호적명 ; 정광식:鄭光植) 아버지는 1912. 음 4.22,(양 6.7) 때어나시어 1995. 음 2.2(양 3.2); 84세 卒로 살아신 분이다.
어머니 조복희(趙福熙)와 동갑으로 어머니는 생일은 음 2.6(양 3.24)로 아버지 보다 3달 가량 빠르다.
17세 때인 1928년 결혼하여 장남 정영조(1929년생)를 18세에 낳았다.
많은 하객을 초청 결혼 60주년 회혼례를 1988년에 했다. 함안군수가 회혼례 기념 자개상을 들고 내빈으로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