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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품 명 |
윤명철교수와 함께하는 하얼빈/고구려유적지 답사 6일 (OZ) | ||
답 사 일 정 |
2014년 6월 29일(일) ~ 7월 04일(금) |
인 원 |
성인 40 명 |
HOTEL |
4성급 2인 1실 | ||
답 사 경 비 |
1,350,000원(1인) | ||
포 함 사 항 |
왕복항공료(아시아나항공), 유류할증료 및 TAX, 4성급 호텔(2인1실), 식사, 입장료, 한국어가이드, 전용버스(55인승), 열차비(2등석), 가이드/기사 TIP, 해외여행자보험(1억원상당), 단체비자비 | ||
불포함 사항 |
개인 경비 | ||
REMARK |
1. 전 일정 동국대 윤명철교수의 강의 2.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방문 3. 요녕성박물관(심양), 상고성자/하고성자(환인), 국동대혈(집안), 호산장성(단동), 장하석성(장하) 등 일반 패키지여행에서 방문할 수 없는 곳을 답사하는 최고의 고구려 유적지 답사 일정 4. 단동의 압록강유람선 등 일체 포함으로 선택 관광 없음 5. 북한식, 샤브샤브 등 포함된 최상의 식사 6. 노팁, 노쇼핑, 노옵션으로 품격 있는 답사 | ||
집 결 |
인천국제공항 3층 M카운터 앞으로 07:00까지 집결 |
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주 요 일 정 |
식 사 | |
제1일 6/2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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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천
대 련
여 순 대 련 |
OZ301 버 스 |
07:00 09:40 09:55 |
인천공항 집결 후 출국수속 인천 출발 / 대련 향발 대련 도착 후 시내로 이동 ▶ 발해만 조망 후 여순으로 이동 (약 1시간 소요) ▶ 여순감옥, 여순국제재판소(관동법원구지) 답사 대련으로 귀환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기내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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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대련 홀리데인 호텔(★★★★) OR 동급 | |||||
제2일 6/3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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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련 장 하
단 동 |
버 스
유람선 버 스 |
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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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후 장하로 이동 (약 3시간 소요) ▶ 장하석성 답사 단동으로 이동 (약 3시간 소요) ▶ 압록강(유람선) ▶ 호산장성(도보), 단동 압록강 단교 답사 샤브샤브로 석식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불고기 석:샤브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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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단동 진주도 호텔(★★★★) OR 동급 | |||||
제3일 7/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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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동 집 안 |
버 스 |
전 일 |
호텔 조식 후 집안으로 이동 (약 4시간 30분 소요) 전일 답사 ▶ 고구려 수도방어의 요지 [국내성터] ▶ 고구려 역사의 자존심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 고구려 전통양식의 적석묘 - [장군총], [5회묘] ▶ [국동대혈], [환도산성], [채석장유적-조망]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북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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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집안 홍콩성가일 호텔(★★★★) OR 동급 | |||||
제4일 7/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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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환 인
심 양 |
버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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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 |
호텔 조식 후 환인(졸본)으로 이동 (약 2시간 30분 소요) 전일 답사 ▶ 오녀산성 (유네스코 문화유산) 답사 ▶ 고구려에 관련된 [오녀산성박물관] 답사 ▶ 고분군, 평지성터 [상고성자, 하고성자] 답사 심양으로 이동 (약 3시간 소요) 심양 도착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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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심양 장미 호텔(★★★★) OR 동급 | |||||
제5일 7/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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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양
하얼빈 |
버 스
기 차 버 스 |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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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후 ▶요녕성박물관 답사 ▶서탑거리 답사 후 기차역으로 이동 (열차탑승) 심양 출발 / 하얼빈 향발 하얼빈 도착 ▶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곳 [안중근의사기념관] 답사 ▶ 소피아성당(외관), 러시아거리(중앙대가) 답사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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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하얼빈 곤륜 호텔(★★★★) OR 동급 | |||||
제6일 7/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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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인 천 |
버 스
OZ340 |
오 전
14:30 17:50 |
호텔 조식 후 ▶ 조린 공원 중식 후 공항으로 이동 하얼빈 출발 / 인천 향발 인천 공항 도착 후 답사 종료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기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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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일정은 항공 및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 또는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요녕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랴오닝성박물관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의 허핑구[和平區] 스웨이로[十緯路]에 있는 박물관. |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
중국지린성[吉林省]지안현[集安縣]퉁거우[通溝]에있는고구려제19대광개토대왕의능비(陵碑).중국에서는'호태왕비'라고부른다. |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있고,비신이 대석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부분은 경사져있다. 대석은 3.35×2.7m이다. 네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판독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당국이 단층형의 대형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있다. |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중화인민공화국지린성지안현퉁거우에있는고구려제19대광개토왕의능비이다. |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미터,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1]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
장군총(將軍塚)장수왕릉(長壽王陵)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고구려의 석릉(石陵). |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의 용산(龍山, 또는 土口子山)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 |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
화강암표면을정성들여가공한절석(切石)을7단의스텝피라미드형으로쌓았는데,기단(基壇)의한변길이33m,높이약13m이다.기단의둘레에는너비4m로돌을깔았으며,그바깥둘레에너비30m의역석(礫石)을깔아능역(陵域)을표시하였다.널방[墓室]은화강암의절석을쌓아지었는데,천장석(天障石)이있는굴식[橫穴式]이며,2개의널받침[棺臺]이있다. |
1905년일본인학자도리이[鳥居龍藏]가처음으로현지조사하고,프랑스학자E.샤반과일본인세키노다다시[關野貞]등이조사하여《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등에발표한뒤부터학계에알려졌다. |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것 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있다. |
[출처]장수왕릉|[네이버지식백과] |
장군총 배총 |
장군총 북쪽에는 본래 다섯 개의 배총이 동서일렬로 배열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동북쪽에 한 개만 남아 있다. |
배총(陪塚)은 딸린무덤이라고 하는데 무덤의 주인을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장군총주변에는1개의 작은 돌무덤을 비롯해서 4곳에 비슷한 규모의 배총흔적이 남아 있다. |
남아있는 배총을 기준으로 밑면의 길이는 각 9.2m터 정도이다. |
기단부의 높이는 1.9m가량이고 그 위에 노출된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태가 고인돌과 닮아 있다. |
-문화콘텐츠닷컴- |
국내성(國內城) |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首都). |
고사(古史)에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이다. AD3년(유리왕22)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지린성(吉林省)지안현(輯安縣)에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국내성이라고 보고있다. 국내성성벽의 전체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지안현 서북쪽2.5km지점에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위나암성)이있는데, 평지에있는 국내성이 공격받을 경우에 이곳으로 피란하여 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3∼427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가 427년(장수왕15) 평양으로 천도를 행하였다. |
[출처][네이버지식백과] |
고대채석장 |
집안의 채석장 전경 - 집안 고대 채석장은 집안현성 북쪽 23㎞ 되는 지점의 녹수교(錄水橋)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채석장의 석질은 견고하여 가공했을 때 모양이 좋기 때문에 대형의 석조 건축물을 짓는데 적합하다. 그리고 이 석재는 고구려시대 장군총에 사용된 석재의 질과 완전히 동일하다. 통구하무덤군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벽화묘 고분석실에 사용된 것들도 역시 재질상 이 석재에 속한다. 따라서 이 곳은 고구려시대의 채석장으로 추정된다. 채석장의 길이는 약 1000m, 폭은 약 100m, 면적은 10만여㎡에 달한다 |
출처-문화콘텐츠닷컴 |
고구려의 제천의식과 관계가 있는 국동대혈(國東大穴) |
통천동(通天洞)은 국내성(집안현현성)에서 17km정도 떨어져있으며 압록강물이 언저리를 흐르고, 건너편에는 북한의 만포가 있다. |
바로 이곳에 고구려왕이 수신(隨神)을 맞이한 곳이라는 국동대혈(國東大穴)이 있다. |
국동대혈은 고구려의제사, 신앙, 풍속 등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 가된다. |
"10월이되면 나라사람들이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베푸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이를 수혈(隨穴)이라 부르며, 10월의 국중대회에서 수신(隨神)을 맞아 나라 동쪽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
국동대혈의 동굴 입구모습 - 국동대혈은 국내성(집안현 현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높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혈에서 남으로 압록강까지의 거리는 400m이다. 대혈은 암석동굴인데 굴 어귀는 동남으로 향하였고 높이 10m, 너비 25m, 깊이 20m이다. 큰 굴 어귀에는 평평한 대가 있는데 그 면적은 약 30 X 20 평방미터로서 능히 100여명이 활동할 수 있다. 이 큰 굴에서 서쪽으로 약 100m 가량 올라가면 또 용암동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천동(하늘과 통하는 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마다 10월이면 고구려 왕은 군신들을 거느리고 통천동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때문에 국동대혈은 고구려의 제사, 신앙, 풍속 등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성산산성(城山山城)고구려의석성(石城)으로추정 |
중국요령성(遼寧省)장하현(莊河縣)성산진(城山鎭)사하촌(沙河村)만덕둔(萬德屯)성산 |
고구려가 요동반도에 설치한 지방성의 하나. |
성을 처음 축조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이 성은 요동반도 남단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바닷길을 방어하는 요충성으로 축성되었다. 산성의 형태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은 산능선을 따라 잘 다듬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길이는 2,898m에 이른다. 성문터는 모두 4곳이 남아 있으며, 동문지의 북쪽 100m에는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의 북서쪽 정상부에는 잘 다듬은 돌을 쌓아 피라미드형태로 축조한 구조물이 있는데, 축조방식은 고구려의 성벽 축조방식인 퇴물림식과 유사하다. 동남쪽 면에는 상부 3단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 구조물의 기능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은데, 군사 지휘소로 보기도 하고 또는 천신에 제사지내던 천단(天壇)으로 보기도 한다. 성의 동북쪽 끝부분에는 작은 구획을 지어 3중으로 축조된 시설물이 있는데, 가장 끝 부분에 자리잡은 장대(將臺)는 후대에 지어진 것이며, 그 남쪽에는 봉화대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산성의 서북쪽에는 벽류하(碧流河)의 지류인 협하(夾河)가 흐르고 있으며, 그 너머 입자산(砬子山)에는 길이 5km의 성축산성이 축조되어 성산산성과 서로 호응하고 있다. |
성산산성은 규모나 시설로 보아 고구려 당시에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고구려의 석성(石城)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성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당태종의 대규모 침략이 실패하고 2년 후인 647년에 당의 장군 우진달(牛進達)과 이해안(李海安) 등이 바닷길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백여 차례 전투를 치러 석성을 함락시킨 기록이 있다. |
성내 중앙에는 법화사(法華寺)와 묘(廟)가 있다. |
참고-문화콘텐츠닷컴- |
박작성(泊灼城)現호산산성(虎山山城) |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 |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의 하나이다. 이 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고구려와 당(唐)과의 전쟁 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
645년(보장왕 4)에 당태종의 대규모 고구려 침략이 실패한 지 3년 후인 648년에 태종은 대규모 전함을 축조케 하는 한편, 설만철(薛萬徹)로 하여금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박작성을 공격케 하였다. |
설만철이 압록강을 거슬러 박작성 남쪽 40여리 지점에 진영을 갖추자, 당시 박작성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이 1만여명의 군대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으며, 고구려 장군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과 안시성(安市城)의 군대 3만여기를 거느리고 구원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
박작성의 지리가 압록강 입구에서 100여리 떨어진 강북안의 험준한 산을 끼고있는 지세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 위치는 현재 중국단동시(丹東市) 동북 15km 거리에 있는 호산산성(虎山山城)에 비정된다. 박작성 인근의 압록강하구에는 고구려의 대행성(大行城)도 자리잡고 있어, 박작성(구련성)과 서로 조응(照應)하고 있었다.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산성하고분군 |
산성하 고분군 전경 - 환도산성과 통구하[通溝河] 사이의 넓은 들판에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
현재 남아있는 무덤만 1582기로 세계 최대의 무덤군이다. |
이곳 무덤의 형태는 대부분 적석묘와 절천장묘, 귀각총 등 몇몇 무덤에서는 벽화도 발견됐다. |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
환도산성 |
환도산성은 일명 산성자산성으로 집안시(국내성) 북방 2.5Km 지점에 있는 산성이다. |
국내성이 평지의 도성인 반면에 환도산성은 전시성의 역할을 하였다. |
환도산성은 산 정상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자연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였으므로 산등성이의 높이에 따라 성벽의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성벽은 산의 능선에 따라 기복과 높이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4~5m에 이른다. |
석재는 대개 길이가 50~90cm(너비20~50cm), 높이가 10~30cm 정도의 직사각형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
현재 남쪽 성벽을 제외하고 동,서,남,북벽은 대체로 남아있다. |
[출처]위나암성|[네이버지식백과] |
오녀산성(五女山城) = 흘승골성(紇升骨城) = 졸본성(卒本城) |
중국랴오닝성[遼寧省]환런현[桓仁縣]오녀산에있는산성 |
환런현[桓仁縣] 중심에서 8km 떨어져 있다. 해발 820m에 있다.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았다. 오녀산성의 전체 평면은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30~300m이다. 1996년부터 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 2천여 점이 발굴되었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天池)라고 하는 샘이 있다. 2004년 다른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
[출처] 오녀산성 |[네이버 지식백과] |
하고성자(下古城子) |
하고성자는 환인현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요녕성 환인현 육도하자향 하고성자촌에 있다. 유적에서 동북쪽으로 10km 지점에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오녀산성이 있다. |
이 유적은 현재 서, 남, 북쪽의 성벽 흔적 일부가 남아 있다. 동벽은 원래 혼강과 접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홍수에 의해 유실되었다고 한다. 성은 흙으로 쌓은 전형적인 장방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전체 길이는 대략 800m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대략 2m 정도 높이의 서북쪽 모서리가 가장 잘 남아 있는 편인데, 그나마 성벽을 기반으로 하여 민가가 들어서 있어 훼손이 심각한 실정이다. 서벽 바깥쪽으로는 너비 10m의 해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 수심이 깊은 곳만 양어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최근에 서벽북쪽 일부를 발굴한 결과 서로 다른 종류의 흙이 층을 이루며 단단하게 다져 넣어진 것을 확인하였다.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조각들은 그 형태가 오녀산성의 고구려초기문화층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형태로서, 이곳이 바로 고구려 건국초기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하고성자 유적지가 오녀산성을 산성으로 하는 고구려초기의 평지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출처 동북아 역사넷 |
오회분(集安五盔墳) |
中國吉林省集安市우산하고분군에 속하는 고구려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으로, 집안분지 중앙에 투구모양의 고분5기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어서 오회분이라 부른다. 서쪽고분이 1호분이고 동쪽으로 가면서 5호분까지 매겨져있다. 오회분 바로 뒤편에는 통구사신총과 방단돌무지무덤(方壇積石塚) 등이 분포한다. 4호분과 5호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
[네이버지식백과]오회분[集安五盔墳](고고학사전,2001.12,국립문화재연구소) |
오회분 5호무덤 |
오회분5호무덤(五盔墳5號墓,통구5호무덤)은 중국길림성집안현태왕향우산촌에 있다. 인접한 오회분4호무덤과 함께 투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오회분(五盔墳)이라 불리운다. 통구평야중심부에 있는 5기의 대형 흙무지돌방무덤 가운데 정식으로 조사된 벽화고분으로, 이 고분군 가운데에서 가장 동쪽 끝에 있으며, 규모가 제일 크다. |
[네이버지식백과]오회분5호무덤(한국미의재발견-고분미술,2005.1.10,솔출판사) |
뤼순형무소(LushunPrison) |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있는 일제 시대의 형무소.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되었던 곳이다.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곳은 1909년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수감되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고, 그후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
첫댓글 진흥원 해외답사 일정이 점점 알차고 품격있는 여정으로 진화하는 모습이 아주 좋슴니다.
참가 하겠습다. 이번 기회에 많은 회원님들 함께 하시기 바람니다.
심은숙 이덕희 심달현 최혜순 선생님 신청입니다
최종진 조창엽 선생님 신청입니다
권찬수 한안상선생님 신청입니다
안희경 신청입니다
김창기 김봉옥 함께 가겠습니다.
오랜만에 고문님과 함께 즐거운 답사 하겠네요^^
좋은 기회이네요..유연숙 신청합니다.
좋은기회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임연선 참석합니다
김충원선생님 신청합니다.
최금선 선생님 신청합니다
최양선 선생님 신청합니다
정병호선생님 신청입니다
안희경선생님...하얼빈 함께 못해 아쉽습니다. 다름아니라 안중근에 대해 너무 좋은 동영상이 있는데 꼭 올려 보고 가시면 좋을것 같아서요. 안중근 치면 아래 동영상 몇개중에 "일본인마저 울린 45분짜리 안중근 영상"
일본인도 안의사를 존경한 나머지 사형후 감옥장인 치바도시지는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네요
이젠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면 안되지요..테러리스트는 묻지마식 아무나 살해하는것이지요. 국가와 평화를 위해 의연하게 저격하고 도망가지않고 ㅂ이또의 15가지의 죄목으로 살해했다고 당당하고 차분하고 대단한 학식을 가진 분이며 일본인도 존경해야합니다. 양심이 있는자...그는 천국갈것이고......
예 김성한선생님 감사드려요 그 동영상은 지난번 황영엽자문위원님께서 한번 올려주셨었답니다. 함께 못해 아쉽습니다^^
같이가요.^^*
예 선생님 반갑습니다^^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서 참가하겠습니다.
권택홍선생님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현재까지 고구려유적지답사 신청자
최하경 심은숙 이덕희 심달현 최혜순 최종진 조창엽 권찬수 한안상 안희경
김창기 김봉옥 유연숙 임연선 김충원 최금선 최양선 정병호 김용혜님외1인
박賢숙 권택홍님이십니다.
정병오님 신청 취소입니다.
신기홍, 곽은경, 최영일, 김혜란 선생님 참가 신청하셨습니다.
노경순선생님 참가 신청 하셨습니다. 윤명철교수 사모님이십니다.
고구려답사 일정이 항공예약문제로 6월 30일에서 6월 29일로 변경되었습니다. 하얼빈이 휴일에는 개관하지 않는관계로 마지막일정으로 잡혀있던 대련과 여순이 첫날로 바뀌었고 처음 공지드렸던 답사내용에는 변경이 없으나 하얼빈에서 조린공원이 추가되었으며 비용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정에 다소 변경이 생겨 죄송스럽스럽습니다.
조린공원은 중국의 항일운동가 이조린을 기념하는 공원이나 조린공원은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가 일본군에게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를 받고 3월 26일 중국 요년성 대련 여순감옥에서 처형되기까지 시신이 묻혀 있던 곳으로 사형직전 두동생에게 "내가 죽은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 고국으로 봉환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뜻깊은 장소가 여행일정에 추가되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까지 신청자 정병오님을 제외하고 26분입니다.
정상훈, 이선애선생님 참가 신청 하셨습니다.
전영남, 이원형선생님 신청입니다
백남석 신청합니다
이상엽, 김슬기님 신청하셨습니다.
김경덕선생님 신청입니다
나용호선생님 신청입니다.
허융 손용문선생님신청입니다
신성준선생님 신청하셨습니다.
현재까지 신청하신 선생님 명단입니다.
최하경 심은숙 이덕희 심달현 최혜순 최종진 조창엽 권찬수 한안상 안희경
김창기 김봉옥 유연숙 임연선 김충원 최금선 최양선 김용혜 임성락
박賢숙 권택홍 신기홍 곽은경 최영일 김혜란 노경순 정상훈 이선애 전영남
이원형 백남석 이상엽 김슬기 김경덕 나용호 허융 손용문 신성준
총 38명입니다.
위 신청 명단에서 한 분이 빠졌습니다.
김영남선생님까지 현재 39분 신청하셨습니다.
이애선선생님 신청입니다
나용호, 임연선 최양선 선생님 개인적인 일로 신청취소입니다.
신성준선생님 취소하셨습니다.
현재까지 신청자명단입니다
최하경 심은숙 이덕희 심달현 최혜순 최종진 조창엽 권찬수 한안상 안희경
김창기 김봉옥 유연숙 김충원 최금선 김용혜 임성락 박賢숙 권택홍 신기홍
곽은경 최영일 김혜란 노경순 정상훈 이선애 전영남 이원형 백남석 이상엽
김슬기 김경덕 허융 손용문 김영남 이애선 36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