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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은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 신학 맥을 3가지로 구분했다.
① 교회적 보수주의(길선주와 박형룡)
② 사회적 진보주의(윤치호와 김재준)
③ 문화적 자유주의(최병헌과 정경옥)
강근원은 《한국교회 신학의 흐름과 전망》에서 한국 신학의 계보를 4가지로 구분했다.
① 근본주의
② 복음주의
③ 사회참여적 행동주의
④ 종교문화적 자유주의
1884~1930 태동기 선교사 지배하의 보수적 복음주의 일원론
1930~1960 정초기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이원론
1960~현재 개화기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복음주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1. 한국적 신학의 등장
해방 후 한국 신학은 서구 신학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류영모 선생의 독창적 사상이 나타났다. 그는 기독교에서 출발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포괄했고, 동양적 천일합일 경지를 가르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안병무, 김흥오 등이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 함석헌과 다석 류영모
맨발의 성자 이현필 무궁화 박사 류달영 안병무 박사
⑴ 토착화 신학―감리교신학대학을 중심으로 60년대 출발
유동식―그리스인들은 로고스 개념을 채택하여 메시아를 이해했다. 그는 동양인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도(道)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착화란?
① “초월적 진리”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일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적응되도록 자기를 변화하는 것”
② 혼합주의가 아니라 “주체자의 현실에 대한 적응”
전경연의 반론 ― 토착화는 복음의 토착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문화가 토착화 되는 것이다. 복음의 공격에 의해 모든 것이 불태워 진후 “새롭게 솟아나는 새싹”이다. 이 주장은 서구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이식하는 형식이 된다.(전경연은 바르트주의자였다)
이장식의 주장 ― 복음은 문화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에 ‘순수한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윤성범과 박봉랑의 논쟁
윤성범―단군신화의 황인, 환웅, 환검(단군)은 하나님이며 삼신사상은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이라는 대단히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박봉랑―민족 문화나 전통, 신화는 기독교 계시와 무관하며, 토착화는 문화에 대한 복음의 심판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박봉랑은 바르트주의자였다.)
윤성범은 1970년대에 “성(誠)의 신학”이라는 토착화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유교경전과 율곡이 말한 성(誠) 사상은 성육신과 통한다고 주장했다.
김의환―“성서적 토착화에 충실하자 복음의 종자는 토양에 따라 변경될 수 없다.”
유동식―《한국종교와 기독교(1965)》에서 유ㆍ불ㆍ선이 한국인의 심성이다. 1970년대 무교연구를 통해 무교가 한국 문화의 기층이며 유ㆍ불ㆍ선과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풍류가 한국사상의 원조라고 보고 한국 무교의 원형을 풍류에서 찾고 복음을 풍류의 빛에서 해석했다. 그는 전통적인 죄와 구원의 형식대신에 조화와 멋을 강조했다.
변선환은 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는 1992년 종교 다원주의를 용납했다는 이유로 목사직과 교수직을 박탈 당했고, 토착화신학의 기반은 더욱 협소하게 되었다.
소금 유동식 교수 해천 윤성범 교수 변선환 교수
⑵ 민중신학
① 1970년대 유신시절 민주화 인권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태동했다.
유신치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모순으로 민중의 생존권과 인권이 위협을 받았다. 이때 소수의 신학자들과 양심적 그리스도인들이 민중의 고난의 현실에 눈을 뜨고 함께 투쟁하고 고난을 받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여 제시한 신학이다.
② 민중신학의 자양분
함석헌의 씨알사상
한국사학계의 민중사관
김지하의 민중문학
대학가의 탈춤으로 대변되는 민중 예술
③ 민중신학 내부의 차이점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 서광선 등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해직과 투옥을 경험했고, 민중사회과학자, 민중사학자, 민중예술가 등과 교류하면서 연구하고 논의했다.
서남동은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 전통을 합류하여 민중 신학의 과제를 찾았다. 그는 텍스트에서 컨택스트로 가는 방법론을 뒤집고,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가는 해석학을 주장했다. 그는 “한(恨)의 사제(司祭)”라는 글을 통해 한국민중의 심성에 깊이 뿌리 내린 恨을 신학적 주제로 끌어내었다.
안병무는 “민중은 민족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무리(오클로스)에 주목하면서 “민중”을 예수 사건의 중심으로 이해했다. 기존의 성서연구가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주변의 오클로스가 바로 “민중”이었고 예수님의 선교는 바로 하나님이 벌이시는 민중 선교로 해석했다.
현형학은 “탈춤” 연구를 통해 조선민중들이 탈춤을 통해 기존 종교와 지배층을 해학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비판을 생산적인 에너지로 승화를 시켰다고 주장했다. 민중의 문화속에서 종교비판적인 초월성을 찾았다.
김용복은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개념을 통해 민중의 고난과 해방을 해석했다.
김용복 교수 서남동 교수 현영학 교수
④ 1979년 NCCK가 주최하고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가 협찬한 “국제신학심포지엄”은 한국의 민중을 주제로 한 신학에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1990년대 이후 사회민주화와 사회주의 붕괴, 시민운동의 성장으로 민중신학의 열기는 퇴조되었다.
2. 새로운 신학의 수용
⑴ 해방신학 (Liberation Theology)
오랜 식민지 통치와 군사독재에 시달리던 남미에서 1960~70년대에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등장한 신학사조이다.
종속이론(중심부―주변부, 저개발이론)을 수용했고 마르크시즘의 사회분석방법을 사용했다.
전통교회와 신학이 지배 체제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구원론, 교회론, 기독론, 은총과 죄악에 대해 현실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신군부는 통일교의 통일사상연구원, 국민윤리학회, 내외정책연구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의 보수 학자들을 동원하여 해방신학을 비판했고, 보수언론도 비판에 가세했다.
그 결과 해방신학이 무엇인지 국내에 제대로 알려 지기도 전에 비판 작업만 무성했다.
당시 남미와 유사한 사회문제를 가지고 있던 남한에서 진보적인 기독교운동가들은 해방신학을 연구하고 학습하였다.
한국 정부와 보수권의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
그러나 해방신학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었다.
⑵ 여성신학
서구여성신학은 페미니즘 열풍(60년대)과 함께 등장했다. “세계여성의 해”(75년)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여성주의는 삶의 전 분야와 학문분야가 되었다.
여성 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
70년대 서구여성신학의 특징은 여성의 경험에서 신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성을 배제한 경험을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으로 표방하는 전통 신학과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1980년대에는 다양한 여성기독교단체들이 설립되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80), 한국여성신학회(84), 기독여민회(86),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89),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89), 여성교회(89) 등
1994년 장로교(통합)은 여성안수를 허용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여성신학은 거시담론이 아닌 성(性)과 여성의 몸, 교회 여성의 정체성과 같은 주제를 취급하였다. 실천적으로는 교회 안의 성폭력 문제집중하고 있다. 한국여성신학은 한국여성들의 고유한 삶의 자리와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3. 보수신학의 전개
⑴ 새로운 신학의 도입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근본주의 신학에 뿌리가 있다. 1940년대 미국에서 출연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지성적으로 기독교전통주의를 변호하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박형룡은 《신복음주의 비판(1972)》에서 신복음주의가 신학과 과학을 조화시키고 사회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자유주의라고 비판했다.
한국 보수주의의 일반은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현대과학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권순응 및 친미반공주의를 교회의 바른 입장이라고 믿었다. 근본주의 신학에 경도 되어 있던 보수적 한국 신학계는 주류 학문세계에서 소외되었고 교회는 민주화 과정에서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다. 1980년대에 신앙과 세상 사이에서 고민하던 보수주의 청년들은 신복음주의 영향아래 전개되는 영미권의 보수주의 신학을 수용했다.
카이퍼(Abraham Kuyper)와 바빙크(Hermann Bavink)의 신칼뱅주의
신복음주의권 학생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온 우주에 적용되므로, 기독교인들은 문화, 예술, 과학기술, 정치경제에도 일반은총이 실현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칼뱅주의는 미국의 보수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공간적 이해는 언약신학과 개혁신학, 칭의 위주 구원론에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참여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80년대 IVF는 기독교 세계관 관련서적을 번역했고 기독교문화운동, 기독교학문운동, 기독교대학설립운동 등이 나타났다.
⑵ 새로운 신학과 사회참여
1970년대 복음주의 권에서 사회참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1973년 사이더(Ronald J. Sider)와 요더(John H. Yoder) 등은 “시카고 선언”을 통해 복음주의 사회참여 동맹을 발족했다.
1974년 “로잔언약”은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를 모두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규정했다. 이것은 하나님 선교 및 WCC의 상황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대응이었다. 1986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는 “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을 발표했다.
1986년 창간된 〈대학기독신문〉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악을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세계복음주의권은 보수파, 중도파, 진보파로 나뉘어졌고,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주로 보수파와 중도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손봉호는 진보파 사이더의 기독교윤리관에 영향을 받았고, 이만열은 상황화와 해방신학을 전향적으로 평가한 콘(Harvey M. Con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1년 〈복음과 상황〉이 탄생했다.
[출처] 제14장 새로운 신학의 모색(1960-현재) [한국교회사 14]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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