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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1:5-11(1301) “자기 힘으로 신(神)을 삼는 자” 2018/ 9/ 30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왕자가 자기별을 떠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임금님의 별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신이 왔다”며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 생활이 따분해집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임금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갑니다. 이 때 임금님은 어린 왕자를 법무장관에 임명할 테니, 자기별에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어린 왕자는 “여기는 아무도 없는데 법무장관이 왜 필요하지요?”라고 말합니다. 그 때 임금님은 “아무도 없다면 너 자신을 재판해 보라. 남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신을 재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네가 훌륭히 자신을 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과 화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서야 하는 자리에 자신이 나서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합니다. 왜 교만한 사람들을 벌하시나요?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잠 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어떤 자가 교만한 자 일까요? 어떠한 사람이 교만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이것 저것 다 가지고 다 누리는 사람이 교만할까요? 아니면 자랑할 것이 없이 소박하게 사는 사람이 교만할까요?
대부분의 교만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들보다 더 많이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내가 너 보다 더 부자고, 내가 너 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똑똑하다”는 것이 사람으로 교만하게 만듭니다. 가지지 못하고 없는 사람이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실 교만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교만한 척 하는 사람은 허풍쟁이입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사람은 교만하기 보다는 위선자입니다.
이처럼 교만한 자는 대부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억 누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공부를 많이 하여서 지식으로 교만한 사람,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가져서 돈으로 교만한 사람,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교만한 사람.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보면, 다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교만을 두고 말하기를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으로 분류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들보다 구별되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교만이라는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이런 교만에 대하여 전 12:3에서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라” 말합니다. 왜 배우고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있는 교만이 망하게 됩니까? 교만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교만에 취해 있는 자는 쓰러집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자도 역시 패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기를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1. 당당함과 위엄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자랑합니다.
7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본문에 보면, “그들은”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한 번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7절,8절,9절,11절. 무려 네 번이나 “그들은”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10절은 빠져 있지만 NIV 번역본 영어 성경을 보면, they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왕들을 멸시하며”라는 문구입니다. 이렇게 연달아 등장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6절에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혀 줍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여기의 갈대아 사람은 바벨로니아 사람을 말합니다. 고대 문명을 꽃 피웠고, 남유다 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 사람입니다. 이 갈대아 사람들의 속성을 6절에서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①사납고 성급(맹렬한)한 사람들. ②자신의 소유가 아닌 땅들을 점령하는 사람들.
이 표현대로 바벨론 사람들은 당시 중동지역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에굽은 이미 노쇠하여 힘을 잃어 버렸고,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에 의하여 중동이 다스려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남 유다 나라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함으로 나라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마음에 드는 땅들은 언제든지 침공해서 점령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적 힘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 나라와 갈대아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눈치를 보면서 슬슬 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합니다. 7절의 말씀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당당함과 위엄이 자신들 스스로에게서 나온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7절을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바빌로니아 사람은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무엇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며, 자기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옳다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힘이 있으니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대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오만과 교만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능력이 있다 보니,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교만의 함정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라는 구절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신만을 드러내는 이런 당당함과 위엄은 없어도 됩니다. 교만해서 다른 사람을 눈 아래로 깔보는 당당함은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 전 부산성시화본부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전문적으로 안내하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안내를 합니다. 척 보아도 이벤트소속의 아가씨 같은데, 키가 얼마나 크고 다들 늘씬한지, 키 작은 사람이 기가 죽을 정도입니다. 부산시내에 있는 여러 교회 목사님들이 모였더라구요.
이런 모임에 참석해서 느끼는 것은, 유달리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테이블 이 자리 저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나누는 목사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붙임성이 좋아서 인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드러내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용하게 행동을 합니다.
저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절대 돌아다니면서 설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숙이고 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덕민교회 담임목사이고, 제가 어떤 잘못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들을 대합니다.
이런 당당함은 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어깨를 펴고, 고개를 쳐들고, 내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알리고 단점을 숨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반대의 모습과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허리를 곧추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리를 숙여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힘을 빼라는 말입니다. 어깨에 힘주지 말고 목에 힘주지 말고 겸손하게 허리를 꺽고 고개를 숙이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미국 프로야구를 시청했습니다. 야구 경기를 보다 보면, 경기가 잘 안 풀리는 날이 있습니다.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잘 던지지 못합니다. 타자는 쉬운 볼인데도 헛방망이질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해설자가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선수 오늘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힘을 빼야 되요!”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 경직되어서 투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공을 던져 넣지 못합니다. 타자는 힘이 들어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윙을 하지 못하면서 헛방망이질을 합니다. 고로 경기를 망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힘을 빼고, 마음을 내려놓고 집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경기가 잘 풀리게 됩니다.
힘을 빼는 것이 운동입니다. 힘을 빼는 것은 야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운동에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야 하고, 힘을 빼야 하고, 고개를 숙여 상대방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있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내 어깨에 힘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으로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깔보며 억누르는 당당함은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는 행동입니다.
성도가 당당해야 할 곳은 따로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당당함으로 세상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몰래 숨어서 다녀야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 주십시오.
대중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식기도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대중식당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식기도를 자연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어느 한순간부터 교회에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처럼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생활합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당당함,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당당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예수 믿는 것은 드러내지만, 내 자신의 우월함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교만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로마인의 이야기”라는 책에 복음이 로마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복음의 열정이고, 2)둘째는 부활신앙이고, 3)도덕적 순결성이고, 4)순교를 감당할 복음의 당당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당당함으로 나가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에는 당당하지 마시고, 겸손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11절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바벨론 사람들을 두고 하박국 선지자는 말하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기들이 믿는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자기들의 힘>이 무엇일까요? 자기들의 힘은 “돈이 주는 물질의 힘이고, 많이 배운 지식의 힘이고, 남들보다 강인한 육체의 힘이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미모의 힘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1800년대 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가서 비스마르크재상을 만납니다. 독일 육군의 사열을 받으면서 비스마르크가 이토에게 “우리 독일 군대는 하나님 외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토는 일본 천황군이 더 용맹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우리 일본군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인 줄 압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힘이 있는 나라들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평화ㅑ유지군의 모습으로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자랑합니다. 소련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군사적인 힘을 키웁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힘을 바탕을 제 3세계나 약소국가를 경제적 침탈까지 합니다. 이처럼 세상 권력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흔히 하는 말대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아야 합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힘을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한평생 건축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삽질을 참 잘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삽질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트럭 적재함 가득 채울 수 있는 포크레인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신이 가진 힘을 의지하면서,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가소롭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꾀를 믿으며, 자신의 힘과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는 교만에 빠지지 맙시다. 오롯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달려 나가는 10월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습1:7)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사41:1) 성경은 반복해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잠잠하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 치지 말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마크 애터베리가 쓴 “삼손 신드롬”이란 책을 보면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이 강인함이 강한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고 했습니다.
혼자 강한 사람은 실패합니다. 혼자 성공하려면 실패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삼손에게는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나귀턱뼈 하나로 불레셋 정예군인 1천명을 죽일 정도로 삼손은 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만 삼손은 결국 패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혼자 강한 삼손이 보여주는 성경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서, 그 힘을 하나님처럼 의지해 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겠다는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행여 이런 생각을 아예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자가 진정한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위대하심을 인정해야 진정한 강자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참된 겸손은 참된 지혜입니다.
내일은 10월의 첫 날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10월의 모든 시간 속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