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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작가: 이은집
그날도 하늘이 이처럼 짙은 회색이었고, 그리하여 숲속은 대낮인데도 달밤을 연상시켰으며,
현으로 하여금 무서운 맹수가 노리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
왜 이 산속길을 걸었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읍내장에 간 아버지 아니면 외갓집 나들이의 어머니 마중이었든지….
아무리 생각을 돌이켜도 그 양끝은 뭉툭한 단절이다.
단지 떠오르는 것은 하늘마저 가리우던 무성한 잎사귀들….
솔잎, 떡갈잎, 참나무잎, 박달나무잎, 수리나무잎, 오리나무잎, 물푸레나무잎….
산은 완전히 잎사귀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현은 허둥지둥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신었던 짚신도 벗어 들고 발가락이 돌뿌리에 채여 피가 나도록 마구 달렸다.
『엄마─! 아빠─!』
그렇게 소리쳤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현은 깜짝 놀랐다.
『─아─! ─아─!』
틀림없이 누군가 대답했다.
『엄마—! 아빠—!』
다시 한번….
『─아─! ─아─!』
또….
현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이따금 숲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뿐이었다.
『…응?』
현은 갑자기 무서움이 더했다.
『엄마—! 아빠—!』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자꾸만 울었다.
울면 눈물이 나왔고, 눈물이 나오면 다시 울었다.
¼톤 짚은 멈추었다.
선임하사의 뒤를 따라 현은 따홀‧뻑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단결!』
사수가 될 유병장이 선임하사에게 거수경례를 한 후 현에게 다가왔다.
『지상병! 오느라고 수고 많았지?』
『네, 뭘요.』
현은 내어미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에 굶주린 그는 퍽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지피(GP)는 산꼭대기에 있어.』
유병장이 앞장을 서며 길을 안내했다.
현은 따홀‧빽을 둘러메고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키를 훨씬 넘는 무성한 잡초와 아람드리 수목이 길 양쪽으로 우거져 있었다.
더러는 고목이 되어 쓰러져 있기도 했다.
십 수년을 완전히 인적이 끊겼을 저 산들.
현은 뜨거운 열기같은 것을 느끼며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희미한 기억을 되살렸다.
골짜기의 저 강과 앞산의 바위들, 맞은편의 노루봉….
산하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더욱 두터운 수림의 옷으로 단장했을 뿐이었다.
목책문을 밀고 들어서자 원형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다시 목책이 구축되어 있다.
지피는 그 안에 있었다.
유병장이 속삭이듯 설명하였다.
『입구 오른편의 조그마한 천막은 발발이라고 잠복근무를 하는 수색중대원들이 있는 곳이고,
왼편 창고는 一종과 二, 四종 창고야. 바로 우리 발전실이 이곳이고, 옆의 망대가 대공 초소지.
저쪽 구석이 상황실, 내무반이 제일 큰 저 막사이고 방송실도 그안에 있어.』
그밖에도 현은 탄약고와 스피카, 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이 전신을 휩쌌다.
『자! 그만 들어가지.』
유병장이 내무반을 지나 방송실로 현을 이끌었다.
야간근무를 위해서인듯 몇 명의 지피요원들이 곤히 잠들고 있었다.
이윽고 현이 따홀‧빽을 관물대에 올려놓고 침상에 걸터앉자 유병장이 라디오의 다이얄을 틀었다.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가 홀러나왔다.
『이것이 유일한 낙이지』
유병장은 콧노래로 곡조를 맞추다가 물새(지피장)와
인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선임하사에게 재빨리 의자와 담배를 권했다.
『어때? 요즘 장비에 이상은 없나?』
선임하사가 담배를 피워 물며 유병장을 바라보았다.
『네! 신형장비가 들어온 후로는 아직….』
『KLS 一三〇〇(방송기재)적엔 고생들이 많았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선임하사는 현에게 다짐을 했다.
『오늘부터 지상병은 여기서 근무하게 됐으니까 유병장 지도를 잘 바아야 한다.
쓸데없는 잡념은 버리고…. 알았나?』
그리고 유병장에게도 건네었다.
『처음엔 모두 당황하기 쉬우니까 이곳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유병장은…!』
유병장은 고참답게 시원스레 대답했다.
이때 내무반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식사하라는 전달이 왔다.
하늘은 끝내 짙은 회색인 채로 날이 저물었다.
현은 대공초소로 올라갔다.
높은 망루에서 내려다 본 산들은 커다란 짐승의 자세로 수굿이 엎드려 있었다.
그 등줄기에 적의 지피도 있는 것이다.
바로 맞은 편 노루봉…. 현은 시선을 모았다.
아직 서 있다. 저 커다란 홰나무….
날이 가물면 온 동네가 떨쳐 나서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
그런데 이제는 그 홰나무에 적의 커다란 스피카가 입을 벌리고 있다.
현은 눈을 감았다.
월순네 마당─.
남의 집 품팔이로 끼니를 이을망정 마당 하나는 무척 넓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으례히 그곳에 모여 놀았다.
겨울엔 팽이치기를 했고, 여름엔 술래잡기를, 가을엔 상수리따먹기를….
그리고 이것은 여름이었다.
한창 찌는듯 날이 무더워 강에 나가 헤엄을 치고 왔을 때 한두송이 떠돌던 뭉게구름이 금시 시커멓게 변하고,
그러면 항상 노루봉은 어둑어둑해졌다.
소낙비가 쏟아지려는 것이다.
참새떼처럼 재잘대던 아이들은 어느새 손과 손을 마주잡고 한 줄로 늘어섰다.
『노루봉에 비들어 온다, 멍석말세!』
누가 소리를 먹이면
『멍석 말세!』
일제히 외치며 그들은 한 군데로 뭉쳤다.
『잔장군 애들이 저 지랄들 하는 게 비가 오려나보다.』
그럴 때면 물동이를 이고 가던 여인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현은 눈을 떴다.
그 노루봉에 구름이 꽉 차있다. 비라도 한 줄금 오려는가?
『멍석 말세!』
현은 아득히 먼곳으로부터 이러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산속의 밤은 짐승의 울음속에 깊어갔다.
그것은 바람소리에 실리어 멀게 혹은 가깝게 들렸다.
습관이 된 듯 유병장은 깊이 잠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현은 좀체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우─ 우─!』
저건 노루일거야.
『우웅─! 으앙!』
흡사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 늑대다.
『캐캥─!』
여우….
현은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역시 월순네 마당….
동네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었다. 올무에 노루가 옭혔다. 그리하여 산 채로 지게에 져왔다는 것이다.
네 발이 묶이운 노루는 용을 썼다.
그러나 어른들은 짚을 깐 후 몽둥이를 노루의 목에 걸고 짓밟았다.
『우─우─!』
노루는 그 순한 눈에 흠뻑 눈물을 담고 울부짖었다.
현은 어른들의 바지 가랑이 사이로 똑똑히 보았다.
그 마지막 애처럽던 울음소리….
『우─우─!』
끝내 노루는 네 다리를 버르적거리다가 숨이 끊어졌다.
그때 월순 아버지가 시퍼런 부엌칼을 들고 나와 노루의 목을 땄다.
순간 시뻘건 피가 콸콸 솟았다.
동네 어른들은 그것을 사발에 받아, 온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채 서로 다투어 마셨다.
그날밤 현은 노루의 꿈 때문에 몇번이나 가위에 눌려야 했다.
늑대의 이야기─
옛날에 남매가 있었다.
엄마 혼자 뿐이었는데 잔치집에 가시고 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늑대가 왔다.
엄마가 왔으니 문을 열라 했다.
목소리가 다르다고 손을 좀 보자고 했다.
늑대는 창호지 문을 푹 찢고 앞발을 디밀었다.
『우리 엄마는 털이 없어요.』
밀가루를 얻어 발랐다.
『그렇게 희지도 않아요.』
아주까리잎으로 싸서 보였다.
남매는 문고리를 벗겨 주었다.
욕심장이 늑대는 한꺼번에 남매를 잡아먹고 배가 터져 죽었다.
월순이가 들려 준 이야기이다.
천정에서 거미가 오르내리던 날이었다.
단 둘이 포대기에 발을 묻고 있었다.
어른들은 들판으로 일을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날 밤이었던가?
문풍지가 윙윙 울던 것으로 보아 겨울이었던 것 같다.
현은 이불속에 누워서 어머니의 바느질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뒷산을 스쳐지나가는 바람결에 묻혀 들려오던 은은한 소리…….
『캥─!캥─!.』
차츰 그것은 가까워졌다.
허나 어머니는 잠잠히 바느질만 계속했다.
현은 머리끝이 쭈볏해서 이불속으로 푹 파고들고 말았다.
이윽고 그 울음소리는 뒷곁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잠시후에 꼬꼬댁 하고 닭이 풍기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우야!』
뒷문을 박차기와 동시에 어머니는 뛰어 나갔다. 맨발인 체였다.
현은 와들와들 떨려서 꼼짝도 못하고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이윽고 한참 만에야 어머니가 들어왔다. 목이 찢기운 닭을 쥐고 있었다.
여우는 용케도 닭의 목을 물었던 것이다.
눈이 내려 훤하지 않았으면 못찾을 뻔 했다며 어머니는 닭을 웃목 구석에 팽개쳤다.
『씨암탉을 그놈의 여우가…….』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그러나 현은 사뭇 떨리기만 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현은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때 그 짐승들일까? 새끼들일까? 그 새끼의 새끼들일까? 분명히 그중에 하나 일 것이다.
그것들은 아직 그 산속에서 살고 있다.
현은 눈을 감았다.
억지로라도 이제는 자야 한다.
늦잠이 들었던 탓인지 골치가 띵해왔다.
기어이 비가 내린듯 숲은 말끔히 씻기웠고 노루봉의 적 지피가 더욱 가까이 보였다.
『지상병! 어때? 첫 밤을 지낸 감상이…?』
유병장이 발전실을 둘러보고 오며 물었다.
『글쎄요.』
현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난 맨처음 이곳에 오니까 괴뢰군 구경이 제일 하고 싶더군.
도대체 그 자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허나 육안으로도 저렇게 보이지만 포대경으로 본즉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어.』
노루봉으로 시선을 돌리며 유병장이 설명했다.
그러나 현은 그보다 산 아래 강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었다. 바로 저 강이다.
그 여름에 삼베잠방이까지 훌훌 벗고 해엄치던 곳…….
얼마나 맑은 물이며 넓고 깊었던가!
희뿌연 안개가 아직도 덜 걷힌 그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있다.
현의 눈길은 강물을 따라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산자락이 우묵하게 휘말린 곳에서 멎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곳을 쏘아본다.
어린시절의 꿈과 생활이 알알이 박힌 그 곳…….
『왜…? 수상한 무엇이라도 발견했나?』
유병장이 의아한듯 현에게 다가왔다.
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유병장님! 저 강에 내려 갈 수는 없습니까?』
『식수를 떠오는 곳인데……. 허지만 우리 비둘기(대적방송요원)는 그런 일 안해도…….』
『아니! 꼭 좀 가보고 싶어 그럽니다.』
『지뢰가 매설돼 있고 적이 숨어있을지 모르는 위험지댄데…….』
현은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계령이 앞뒤에 늘어선 후 케이블식으로
스피아깡을 매달아 지피요원들이 물을 긷는 틈에 기어이 끼어 들었다.
이윽고 험한 비탈길을 내려서 강에 이르자 현은 이젠 폐허가 된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로 통하는 길은 잡초로 해서 전혀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다만 무너진 돌담과 깨어진 장독대,
허물어진 집터만이 한 때는 사람이 살았던 동네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현은 머뭇거렸다.
그날밤 이불속에 누웠던 곳이 저쯤일까?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문득 눈에 띄는 것은 장독대 곁의 살구나무……. 아! 저 살구나무…….
저 나무에 어머니는 빨랫줄을 매었고,
저 나무에 아버지는 수수이삭을 꿰달았고, 저 나무에 나는 그네를 매었다.
그런데 무슨 포탄에라도 맞은듯 원둥치는 부러지고 다만 곁가지가 쳐서 몇 개의 살구를 맺고 있을 뿐이다.
동네에서 단 하나 뿐이던 저 살구나무…….
그리하여 살구가 열리면 동네 아이들에게 뽐낼 수 있었던 현이었다.
현은 걸음을 옮겼다.
월순네 집─.
그 넓던 마당이 보인다. 편편한 풀밭이다.
아니 벌써 너댓키나 되는 잡목이 드문드문 서 있다.
거의가 상수리나무다. 현이들이 상수리치기를 하느라 땅속에 묻은 후 그대로 떠나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혹은 산짐승이 통으로 삼키고 여기에 배설했기 때문일까?
개똥참외란 그런 예의 하나였다.
현은 그날 노루가 버르적거렸다싶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시퍼런 부엌칼을 들었던 월순 아버지…….
피묻은 얼굴들…….
그러나 이제는 다만 풀만이 무성했을 뿐이다.
『지상병! 한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밤이 되었을 때 유병장이 화툿장을 넘기며 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그리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지?』
『….』
『구테어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라도 있담 더 캐묻지 않겠다만….』
유병장은 화툿장을 치우며 벌렁 누웠다.
현은 왠지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슴만 꽉 메어 올 뿐이었다.
내무반에는 야간근무 교대를 하는지 술렁거렸다.
『남반부 국군장병 여러분!』
적의 스피카에서 대남방송이 시작되고 있다.
여자의 음성이다. 독설로 가득찬 원고를 여자는 과잉된 감정의 격한 어조로 읽고 있다.
순간 현은 갑자기 월순이 떠올랐다.
월순─.
그녀는 지금…? 현은 이곳으로 오면서 줄곧 그녀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전부가 그녀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했다. 월순과 현은 둘도 없는 소꿉동무였다.
그런데 갖가지 추억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머쓱한 일이 하나 있다.
진달래가 온 산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봄일 게다.
그러한 산에는 용천백이(문둥이)가 숨어 있다고 해서 현은 산에 오르지를 못했다.
좀 꺾어다가 꽃떡을 해먹고 싶어도 무서워 못갔다. 그러나 월순은 혼자 가서 한 아름씩 꺾어 왔다.
그날도 월순이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와서 꽃잎을 따서는 솔잎에 싸서 땅에 묻고 쾅쾅 밟아 꽃떡을 해 먹었다.
그리고 소꿉놀이가 시작되었다.
물론 월순은 엄마이고 현은 아빠가 되었다.
현은 강가 언덕에 돌로 담을 쌓고 그 안에 마른 풀잎을 뜯어다가 깔아 방을 만들었다.
월순은 빤빤한 돌을 모아 그릇을 삼고 풀잎반찬과 돌가루밥을 지었다.
둘이는 밥을 먹은 후 현은 나무를 하고 월순은 설겆이를 했다.
밤이 되었다.
대낮인데도 세끼 밥을 지어 먹고는 밤이라 작정하는 것이었다.
둘이는 방에 누웠다. 자연히 서로 마주 끌어안고 자게 되었다.
『이제 오래 살았으니까 애기를 낳아야 할 텐데….』
월순이 살짝 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
『홀레를 해야 애기를 낳지 뭐!』
현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어느날 동네 개가 서로 붙어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으례히 소가 새끼를 낳을려면 역시 월순네 큰 마당에서 황소와 암을 붙여야 했다.
현은 그러한 것을 늘 보아왔다. 그러니까 사람도 아마 그래야 애기를 낳을 것이다.
막연하지만 현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 홀레해!.』
그런데 월순은 부끄럼도 없이 치마를 걷어 올리며 현에게 바싹 대어들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할라구…?』
현은 왠지 그것이 무서웠다.
『보긴 누가 봐? 우리 둘 뿐인데….』
『가만 있어봐. 그럼….』
현은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마을쪽은 녹음속에 묻혀 있고 근처에 인기척은 하나도 없었다.
『빨리 해!』
월순이 재촉했다.
『응!』
현은 얼떨떨하여 그녀가 이끄는 대로 했다.
그 후 현은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월순도 역시 함께 다니게 되었다.
조그만 시골학교여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한 교실에서 배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로 일 이등을 다투었다.
일학기에 현이 일등을 하면 이학기에는 월순이 일등을 했다.
특히 국어점수는 둘이가 항상 백점이었다.
읽기, 쓰기, 짓기, 무엇이나 서로 똑같아서 담임선생님은 너희 둘은 국어점수 매기기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종합성적으로 현이 앞섰지만, 그것은 남자를 우위에 두는 재래의 관습때문이었는지 몰랐다.
허지만 월순은 그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경쟁자이기 때문에 틀어지기 쉬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이는 누구보다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학년 때였던가? 현이네 학교에서 학예회를 한 적이 있었다. 현과 월순은 <이야기>에 출연을 했다.
한귀절 한귀절을 서로 엮어나가는 것이었다.
그게 어떠한 줄거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퍽 재미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구경왔던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그때 월순은 검정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었고, 현은 검정 바지에 하얀 저고리와 남색 조끼를 걸쳤었다.
무명이 아니라 명절때에도 얻어입기 힘든 무슨 인조견이었다.
얼마나 기뻤던가? 허나 이 학예회를 위해 현과 월순은 남모르는 고생을 해야 했다.
학습장에 무려 열 장이 넘는 내용을 술술 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과 월순은 식전과 저녁때면 으례히 저 노루봉에 올라가 큰소리로 암송을 했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던지 목이 쉬었다.
그런 날이면 월순은 달걀을 몰래 가져다 주곤 했다.
목이 쉰 데는 달걀이 그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목청이 패이라고 악악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월순도 물론 따라서 했다. 그러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아─!』하면 『아─!』하고 『어─!』하면 『어─!』하고….
둘이는 사뭇 합창으로 외치기도 했다.
학예회 사흘을 앞두고 밤에까지 연습을 했을 때 둘이는 서로 손과 손을 꼭 마주 잡고 걸었다.
산 모퉁이를 돌아 올 때는 공연히 섬찟한 생각이 들어서 더욱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그곳에 옛날엔 상여집이 있었고 가끔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어른들이 마을 사랑에서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의 가슴이 유난히 콩콩 뛰었던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월순의 손길에서 야릇한 흥분을 느꼈던 것이다.
따스하고도 보드랍던 그 감촉…. 현은 아직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일들은 그 후에 있었다.
마당가의 감나무가 제법 열매를 맺고 들판이 한창 검푸르게 빛났으니까 초여름이라는 것이 알맞은 계절이다.
어느날 새벽에 현이 오줌이 마려워 어머니를 깨우자 어둠속에서 여기라고 요강을 땅땅 두드려주어 겨우 더듬어 찾았을 때,
그리하여 찔끔 몇 방울은 헛 간 데로 싸고 간신히 조준하여 배설을 하는데 지동이 치듯 쿵쿵 천지를 울린 것이다.
문고리가 덜컹거리는 것으로 보아 진원은 멀지 않은 곳 같았다.
『웬일일까?』
어머니는 혼잣말이었지만 걱정스레 외었다.
『글세….』
아버지도 깨어 있었던 모양으로 어머니의 말을 받아 대꾸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고
이튿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건너 노루봉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풀잎으로 위장한 수많은 병정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너무나 질리신듯 문구멍으로 겨우 그들을 내어다 보았다.
병정들은 단지 그렇게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허지만 마을과 학교에는 그날로 변화가 나타났다.
이제껏 남의 집 품팔이로 살아가던 월순 아버지가 읍에를 나다니기 시작했고,
학교에는 선생님들이 거의 모두 바뀌어버린 것이다.
새로 온 선생님들은 나이가 적었고 공부보다는 노래와 유희만 가르쳤다.
아이들의 놀이도 달라졌다.
팽이치기나 술래잡기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고 댓가지를 쪼개어 따발총이라 하고는
온 동네를 누비며 딱딱거리고 다녔다.
그러면 어른들은 외면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이 뒤집히니까 아이들까지….』
허나 그 소리는 혼잣말로만 중얼이는 것이었다.
현은 화랑에 불을 붙여 후우 연기를 내뿜었다.
대남방송은 잠시 중단된듯 밤은 다시 적막을 되찾고 있었다.
『지상병 ! 아직 안자고 있었군?』
한창 코를 골던 유병장이 제풀에 깨어난듯 물어왔다.
『아, 네….』
현은 미안감이 들어 당황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나본데….』
유병장은 짐작은 하나 구테어 묻지는 않겠다는 어조로 다시 반문했다.
『글쎄요.』
현은 애매한 소리로 얼버무렸다.
한 마디로 무어라 답하기가 벅찼다고 할까?
그해 가을이 되어 유난히 가물던 날씨가 제법 써늘해지고 들판이 눕푸르게 변했을 때 세상은 또 한번 시끄러워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비행기가 하늘을 덮어가곤 하더니 하루는 온 동네 사람들이 월순네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월순네 살림살이를 두들겨 부셨다.
허나 월순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단지 월순 어머니만 월순을 끌어안고 집 모퉁이에 서서 눈물도 잊은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었다. 현은 먼 발치에서였지만 아주 똑똑히 보았다.
그때 월순의 눈길이 현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는 왜 못 본 척 했을까?
아니 입술을 꼭 깨물고 무엇인가를 마음속 깊이 다지는 것만 같았다.
현은 그러한 월순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동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어서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후로 동네는 다시 가라앉았고 바심한 마당에서 현이들은 땅뺏기와 자치기등을 하며 놀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눈보라가 몰아쳐 아랫목을 떠나기가 싫어질 무렵 세상은 또 한번 뒤짚혔다.
결국 떠나야들 했다.
다만 월순네만이 남았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월순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월순네 살림살이를 두들겨 부셨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잡혀갔다.
그때 현은 웬일로 언젠가 올무에 옭힌 노루를 잡아왔던 날 부엌칼로 노루의 목을 찌르던 생각이 떠올랐다.
피투성이던 월순 아버지─. 현은 몸서리가 났다.
『남반부 국군장병 여러분…!.』
또다시 대남방송이 시작되었다.
월순이다! 현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노루봉을 휘돌아 메아리쳐오는 저 소리!
현은 벌떡 일어나 다시 잠든 유병장을 깨웠다.
『유병장님! 우리도 방송을 합시다, 네!』
『방송시간도 아닌데…?』
유병장이 의아하여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단 한 마디만 하면 되겠습니다.』
『뭐야?』
그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아니 피곤하면 그대로 주무십시오. 제가 혼자 하죠.』
현은 문을 박차고 나가 발전기에 스윗치를 넣은 후 확성기의 조작을 시작했다.
『지상병! 돌았어!』
유병장의 손길이 현의 뺨에 불꽃을 일으켰다.
순간 현은 그것이 마치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쥐어잡은 마이크에 입술을 바싹 대고 부르짖었다.
『월순─!』
엄청나게 증폭된 현의 목소리는 맞은 편 노루봉에 부딪고 메아리쳐왔다.
『으흐흐…!』
이윽고 현은 온 몸의 피가 새어나는듯한 나른한 환각속에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