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74주년 광복절 #황병학 황순모 장군 전적
올해는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해인데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광양시 전역이 태극기 물결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경제보복이
한 달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맞이하는 제74주년 광복절은 감회가 새롭습니다.
호국항쟁의 고장인 광양시는 애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는 시민의 뜻을 담아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광복절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감사함을 표현하는건 어떨까요.! ^^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죠.
광양의 선조들은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광양은 구한말 항일 투쟁을 벌인 매천 황현선생, 황순모 장군, 황병학 장군 등의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구국의 고장인데요.
그럼 지금부터 광양출신 독립운동가 황병학, 황순모 장군의 망덕포구 전투지와
출생지인 진월면 비촌마을을 찾아 그 정신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광양의 대표 먹거리타운인 망덕포구는 섬진강의 끝이자
남해바다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포구의 한편에 자리 잡은 항일시인 윤동주 선생의 시비 앞에
'황병학 의병 전투지'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황병학 장군은 망덕포구에서 어업권을 침탈한 일본 세력에 맞서
1908년 일본 어민과 잡화상의 배와 가옥을 불사르는 등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3년 5월 이곳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하면서
‘황병학의병전투지-망덕포’로 이름 지었는데요.
안내판의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안내판의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황병학 의병 전투지 – 망덕포
관리자 : 광양시장
관리번호 : 55-1-47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망덕포구 일원
1908년 9월 황병학의병이 어업권을 침탈한
일본인을 처단한 곳이다.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은 1908년 여름 산포수
100여 명을 모아 광양 백운산에서 부대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9월 황병학의병은 광양 망덕포구의 어장을 침탈한
일본 어민과 잡화상을 공격하여
그들의 가옥과 어선을 불태웠다.
황병학 의병은 광양을 비롯한 여수ㆍ순천의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09년 후반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해산하였다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은 을사늑약과 광무황제 강제 퇴위 및 군대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몰아내기 위해
1908년 여름에 황순모(黃順模)·한규순(韓圭順)·고견(高堅) 등과
산포수(山砲手) 100여 명을 모집하여 백운산에서 의병을 결성하였는데요.
이들은 망덕만(望德灣)에 이주하여
한국의 어장을 침탈한 일본 어민과 잡화상을 개설한 일본 상인들을 처단하여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망덕포전투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저지하기 위한
황병학 의병부대의 대표적인 항일투쟁 사례로 독립운동사에 기록되고 있는데요.
그 후 의병들은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의 연해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황금어장으로 소문난 광양만은 일제의 조선이주정책에 따라
이주해 온 일본 어민들이 제법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일본 헌병과 경찰의 비호아래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를 사용해
황금어장을 싹쓸이했기 때문에 지역 어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광양어민들의 불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황병학 의병부대는
일본어민과 일본인을 기습 공격하여 망덕항에 살고있던 일본어민과
일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일본군이 토벌에 나서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고 해요.
황병학 의병장은 1876년에 이곳 광양시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태어났는데요.
일제가 의병 마을이라 해서 불태워버린 예전의 비촌마을은
1974년 건설된 수어댐 때문에 물속에 잠겨 버렸다고 해서 아쉬웠습니다.
황병학, 황순모 장군의 정신이 녹아있어 그런지
한여름 수어댐의 경치는 아름답기보다는 장엄하게 느껴졌어요.
비촌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황병학장군과 황순모 장군의 추모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황병학(黃炳學, 1876~1931)장군과 황순모(黃珣模, 1873~1908)장군은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으나 작은 아버지와 조카 사이였다고 하는데요.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항일의병운동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분들입니다.
1908년 황순모, 황병학 장군이 의병을 일으키자,
백운산(白雲山) 묵백에 100명 정도의 의병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전남 동부 및 경남서부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 대부분은 농민들 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자리에서 의병모집을 주도했던 황순모는 선봉장에,
지략과 담력이 남달랐던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됩니다.
백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의병들의 근거지로 안성맞춤이었는데요.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 묵백 계곡의 임방골에서 훈련을 하면서
야철로(쇠를 녹이는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 직접 무기를 제작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진상면 황죽리 생쇠골과 진상면 어치리에는 아직도 야철로가 남아 있다고 해서
마을 어르신께 여쭈어 봤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일제는 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의병군의 가족들에게도 온갖 폭력과 협박, 고문을 자행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촌마을을 의병마을이라하여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일제는 백운산을 무대로 해 활동하는 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것이 쉽지 않자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가족들을 수시로 찾아와 위협하면서 자수를 종용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황순모 장군은 가족들을 살펴보기 위해
산에서 비촌마을로 내려왔다가 매복해있던 일본군에 잡혀 총살당합니다.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했다고 하는데요.
3·1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 장군은 군자금을 모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임정의 임무수행을 위해 1927년 국내로 잠입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1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에는 진상면 비촌리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자기 목숨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두 분의 의병장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두 분 의병장이 남겨둔 과제,
잘 마무리 지어 제2의 광복을 이루어 내는데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74주년 광복절 #황병학 황순모 장군 전적지
최설민 광양시 블로그기자
[출처] 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74주년 광복절 #황병학 황순모 장군 전적지|작성자 광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