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六臣 경은(耕隱)선생과 용계서원(龍溪書院)
가 . 耕隱 李孟專(1392~1480)선생
先生의 본관은 경북 星州 벽진(碧珍) 李氏요. 휘는 맹전(孟專)이며 자는 백순(伯純)이요, 호는 경은(耕隱)이다. 선생은 洪武 壬申(1392)년에 善山 형곡리(荊谷里)에서 나서 成火 庚子(1480)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선산 동쪽 延香 미석산(彌石山) 서향지원(西向之原)에 葬事지냈다.
선생은 碧珍之世 將軍 총언(悤言)의 후이고, 進賢館 大提學 견간(堅幹)이 오대조가 되고, 고조 대(玳)는 修文殿 대제학이요, 증조 군상(君常)은 司宰 副正이요, 조 희경(希慶)은 兵馬都元帥이며, 아버님 심지(審之)는 兵曹判書이시고, 어머님 礪山宋氏는 縣令 인손(仁孫)의 딸이다요, 어머님 星州呂氏는 判書 극회(克誨)의 딸이다. 配는 善山金氏 直提學 성미(成美)의 딸이며 90향수를 하고 선생의 묘 앞에 있다.
**묘소 :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문회재 제346호)
**유허비 : 구미시 형곡동(근린공원)(문화재 제346호)
정간공(靖簡公)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선생은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한 계유정난에 정사의 위태함을 보고 외직을 자청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이 되여 淸白吏로서 이름을 알렸다.
선생의 나이 63세(1454)로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善山) 망장촌(網障村)에 퇴노(退老)하여 "눈 어둡고 귀멀다"는 핑계로써 손님과 벗을 사절하였고 " 나는 病을 수양한다 " 하면서 초하룻날 아침에는 해를 향해 절 하면서 " 내 병을 기도한다 "고 하였다.
그래서 비록 집안 사람들도 그 본 뜻을 알지 못했었다. 점필재 선생이 배알(拜謁)함에 심회(心懷)를 터놓고 " 봉려(蓬廬)에서 終死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고나니 흉차(胸次)가 확 트인다 "고 하였다. 이에 점필재가 그 진의를 알았고 임종에 이르러서야 자제들이 비로소 알아 차렸던 것이다.
선생은 誠孝가 특히 出天하여 生事葬祭에 예법을 준수했고 사람을 공경히 대했으며 물질에 다툼이 없어서 家法이 대단히 업숙했다. 그래서 자제들로 하여금 말 타고 종 데리는 것을 금하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주겠습니까?"하면 선생은 " 淸貧을 자손에게 남겨 주겠다"고 했다.
선생의 그 높고 깊은 자취는 우러러
푸른산만 우뚝 솟아 있네 !....................................
나 . 용계서원(龍溪書院)을 찾아 <경북 유형문화제 제55호>
위치 : 경북 영천 자양면 용산리 303
영천에서 국도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4분 쯤 가노라면 왼쪽으로 들어가는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길로 15분 따라 올라가면 눈 앞이 탁 트이는 바다같은 자양댐이 나타난다.
永川市 임고면 삼매 뒷산과 건너편의 산을 연결하여 건설된 이 댐으로 자양면의 6개리가 수몰되었다 한다. 上流에 산업시설이나 民家가 없으므로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어디서 쳐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고 골짝마다 절경인 자양댐의 初入에서 휘적휘적 구비구비 돌며 가다보면 용산마을 좌측편에 "龍溪書院"의 푯말이 보인다.
시루봉 정기받은 生六臣의 한분인 경은(耕隱) 李孟專선생을 모신 書院으로 樓閣形式의 팔작집으로 坐向은 酉坐卯向, 巽方向의 金山形은 太乙星으로 貴星이 나그네를 반긴다. 그러나 北向이 너무 虛하여 靑龍이 조금만 더 감싸주었으면, 개울이 북쪽에서 書院 앞을 감아돌아 흐르니 永遠히 耕隱 선생의 忠孝를 傳하려는듯. 개울을 사이에 두고 옹기 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平和롭다
龍溪書院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生六臣의 한사람인 耕隱 李孟專 先生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6년(1782)에 왕명으로 土谷洞에 건립된 것이다. 耕隱 李孟專 先生은 세종9년(1427)에 親試文科에 급제하여 承文院 正子를 거쳐 正言, 거창현감등을 역임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탐내자 벼슬을 사퇴하고 선산에 내려가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후에 吏曹判書에 追贈되었다.
이건물은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魯巷洞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하다가 1976년 7월 영천댐건설공사로 인하여 현 位置로 옮겨젔다.
익공계형식(翼工系形式)으로 건축된 누각식(樓閣式)의 팔작집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生六臣 耕隱 李孟專 先生 제단(祭壇) <경북 유형문화재 제54호>
이 祭壇은 先生을 제향하기 위하여 숙종(肅宗)39년(1713)에 후손들이 건립한 祭壇이다.
이 건물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높은 기단위에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앞과 뒤쪽에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두고, 좌측의 우물마루를 깐 대청에 붙여 우측으로 온돌방을 연달아 붙여 놓았는데 우측 끝 온돌방에는 벽장을 들여 놓았다.
외관은 같은 모양으로 대청의 각 칸에는 3분합들문, 온돌방의 각 칸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아 대칭을 이루고 있어 여닫이 문양의 새로운 맛을 풍겨주고 있다.
(부조묘(不조廟) <경북 유형문화재 제53호>
이 不조廟는 先生을 추모하기 위하여 正祖10년(1786)에 어명으로 건립된 부조묘 (부조묘는 나라에서 특명한 국불천위(國不遷位)를 말한다)사당이다.
마을 뒷산아래 龍溪書院의 뒤편 우측에는 사주문과 사당이 일곽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사주문은 전면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나머지 3면을 개방하였다.
사당은 앞쪽 중앙에 계단을 두고, 화강석 다듬돌로 축조한 높다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둥근기둥을 세워 정면3칸, 측면2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맞배집이다.
사묘 건축의 경우 전퇴 1칸을 두어 개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서는 전퇴를 두지 않고 평주칸 바로 문을 내어 사묘 건축의 새로운 면을 엿볼 수 있다.-태극풍수학회
<耕隱先生墓改碣銘중에서>
" 산 높고 물 맑은 고장
이겨레 숭고한 사표 잠이 드신곳
비바람 기나긴 세월
이 돌이 다시 삭아져도
그 정신 그 이름 강산과 함께 영원하리라."
<龍溪書院 講堂 上梁文중에서>
동쪽으로 들보 들어 올려보니 아침마다 붉은 해가 푸른 공중에 떠오르네
종신토록 해(日)를 보고 절을 함은 다른 뜻이 아니오라
고신(孤臣)의 일편단심 내려 비침이라. (경은(耕隱) 이맹전)
서쪽으로 들보 들어 얹으니 일대(一帶)의 가을 강이 눈앞에 아득하네
한많은 왕손(단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데
시냇가의 고운 풀만 푸르기만하네. (어계(漁溪) 조려)
남쪽으로 들보 들어 얹으니 흰 매화 맑은 달과 외로운 암자(庵子)뿐이로다.
단청(丹靑)은 하늘을 버티는 절개를 형용하지 못하고
푸른 오산(鰲山)만 우뚝 섰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북쪽을 들보 들어 올리니 노송이 있는 어느 마을은 검은빛이 있는고
그 당시에 고생하며 살던 사람과 흡사하니
차가운 한 세월에 그 심사가 외롭고 곧음을 볼 수 있네. (관란(觀瀾) 원호)
위로 들보 얹어보니 긴 공중에 날아가는 새는 어디로 가나
해상(海上)으로 날아가는 백구(白鷗)를 생각하니
그 높은 자취는 가히 우러러만 볼 뿐이다. (문두(文斗) 성담수)
들보 들어 아래로 굽혀보니 시냇물에 물고기가 뛰어 노네
내가 낚시를 넣어 고인을 배우고자 하나
古賢(고현:육신)은 어찌 진짜 고기를 낚았겠느냐. (추강(秋江) 남효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