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의미 전달을 위해 일단의 의미 집단으로 구성된 것들을 논리적으로 정렬합니다. 이야기 속에 사용된 의미군들은 서로 통일성을 지니며, 이것들은 전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룹니다. 이것을 담화(discourse)라고 하는데, 담화는 몇 개의 문단(paragraph)으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문단은 다양한 논리 접속사(왜냐하면, 그러므로, 그러나, 더욱이 등등)로 연결됩니다. 다시 각각의 문단은 의미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문장(sentence)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 문장과 구문 관계
담화의 기본 단위는 문장입니다. 문장은 완전한 문법적 체계를 갖춘 의미의 최소 단위입니다. 그래서 독립된 개별 단어와는 달리 문장은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합니다. 단어보다는 분명한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장 역시 독립적인 의미 전달보다는 문단이라는 한층 광범위한 문맥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문장은 단어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은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장이 확대되어 하나의 담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특성상 논리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은 길고 복잡할 수도 있으므로 문장의 구성을 면밀히 관찰하고 핵심 문장이 어느 것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문장에서 단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단어와 문장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을 구문론, 또는 통사론이라고 합니다. 이런 문장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 해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 길 건너 사시는 노인은 야구 경기 관람을 즐긴다”라는 문장은 아래의 도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며, 여기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핵심 문장은 “노인은 관람을 즐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 같아 보이지만 하나의 문장에서 핵심 문장이 어떤 것이고 수식하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전서 2:2입니다. 본문은 이렇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문장이 너희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라”는 명령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두 개의 명령일까요? 아니면 “너희는 젖을 사모하라”는 하나의 명령일까요? 그럴 경우 나머지 단어들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음의 도표가 이것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위의 도식에 의하면 이 구절은 “사모하라”는 명령을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무엇을 사모할 것인가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젖(우유)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 젖은 어떤 종류의 젖인지-“순전하고 신령한 젖”-와 사모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갓난아이 같이”-가 다음으로 생각할 내용입니다.
구문론의 관점에서 문장을 이해하면 몇 가지 점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유리합니다. 첫째 의미군의 연결-개별 단위의 연결 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과, 둘째 특정 의미군의 부각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셋째 의미군간의 조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식으로 구문론의 관점에서 읽으시면 적어도 저자가 말하는 것을 곡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성경의 장, 절에 얽매어 모든 문장을 끊어 읽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원래 성경은 문단이나 장(章),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현재의 장, 절 구분은 성경의 위치를 쉽게 찾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무시하고 읽고 의미의 다락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긴 문장이라도 기본적인 문장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 문장을 분석하여, 그 문장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봄으로써 문장 내에서의 의미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성경 해석에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의미 단위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룹니다. 즉, 단어 → 문장 → 문단 → 장(章) → 책 → 같은 저자의 다른 책 → 구약/신약 → 성경 전체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선 작은 단위에서 시작하여 점차 단위를 확대해 나가시면 좋을 것입니다.
(2) 문장간의 통일성과 특정 부분의 부각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논리적으로 한 의미군에 속하는 담화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의미 단위간의 통일성. 이것은 문장이나 문단이 표현하는 의미나 주제들 상호간에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표준에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문법적 형태가 아니더라도 핵심적인 내용의 단어들의 재현과 반복을 관찰하는 일, 핵심적인 구나 절의 반복, 문법의 패턴 혹은 인물의 반복, 사상의 반복, 시공에 대한 언급의 반복 등입니다.
둘째, 각 의미 단위에서 부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각되는 의미 단위에 종속되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은 주로 부각되는 의미 단위에 놓이게 됩니다. 문장에서는 단어 가운데 어떤 것이 부각이 되면서 의미의 핵을 이루며, 문단에서는 문장 가운데 어떤 것이 부각이 되면서 의미의 핵을 이룹니다. 대개, 문장에서 부각되는 단어는 직설법 동사(주동사) 또는 명령형 동사이며, 문단에서는 이런 주동사가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 부각되고, 이런 문장은 문단에서 전달되는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하는 법입니다.
셋째, 각 문장 또는 문단은 접속사로 연결되어 앞뒤 문장 또는 문단의 관계를 보이며, 문장에서는 단어가 다른 단어와 구문론적으로 연결되어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절과 구문 연구에서는 각 문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과 거기서 가장 부각되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에 언급한 내용을 아래의 예를 들어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의 문장에서 통일성과 두드러지는 부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14을 예로 들겠습니다.
위의 구절은 아래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식의 상관관계로서 하나의 통일된 문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 즉 기본적인 문장은 맨 위에 있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말씀을 들은 자니 (그는)\결실치 못하는 자요”입니다. 나머지는 결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긴 문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의 내용인데,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독립된 네 개의 명령으로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하나의 명령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네 개의 명령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이 본문에 사용된 동사 하나하나에 무게를 두어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1) 가라 (2) 제자 삼으라 (3) 세례를 주라 (4)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네 명령이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글 개역 성경을 사용하여 본문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자연스런 결론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의 명령, 즉 “제자 삼으라”는 명령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헬라어 문장에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만이 실제의 명령형이 사용되었고, 나머지 동사들은 분사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NIV 역본은 이런 헬라어의 동사의 형태를 십분 살린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 구문을 염두에 두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내용을 도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로마서 16:25∼26은 더욱 복잡한 구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문장의 호응관계를 놓치고 말 것이며, 그렇게 되면 본문의 의미가 무척 모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p.118)의 글은 한글 개역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여 도식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변증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문장이고, 바울이 주장하려는 내용입니다. 그 비밀은 감취었다가, 나타내신바 되었고, 알게 하신 비밀이며, 각각의 동사(감취었다가,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알게 하신 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한 것의 수식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련이 있는 의미 단위들을 점점 확대시켜 나가면서 의미의 관계를 잘 탐구할 수 있다면,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구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저자의 글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또한 글의 부수적인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