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정각 기린 마하보디 사원 세계 각국 순례자 ‘형형색색’ 장엄 한글 반야심경 독송하니 법열 젖어 고행처 유영굴서 ‘중도’ 의미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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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왕이 부처님의 정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보드가야 대탑과 보리수. 아쇼까왕의 첫 순례지인 이곳 대탑 앞에는 2천년 시간을 건너 전 세계 각국 불자들의 순례 행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쇼까 석주는 대탑 왼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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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덫을 벗어난 인도인의 행복
버스는 어김없이 아침 6시에 보드가야(Bodhgaya)로 출발한다. 보드가야의 옛 이름은 부다가야(Buddhagaya)이다. 서둘러 가는 까닭은 보드가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이다. 보드가야에도 아쇼까왕의 유적이 있다.
아쇼까왕은 수자타가 살았던 마을에 수자타스투파를 조성했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장소에 사원과 석주를 세웠던 것이다. 보드가야가 다른 곳보다 더 의미가 깊은 것은 아쇼까왕의 첫 순례지이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은 재위 8년에 깔링가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던 바 재위 10년에 첫 순례지로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버스는 사르나트 시가지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버린다. 인도 여행하다 보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답사일정에 큰 차질을 줄 것 같다. 사고가 났는지 자동차들이 4km이상 줄을 서 있다. 이 정도면 네다섯 시간 정도는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교통당국에 항의가 빗발칠 것 같은데 인도는 정반대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길가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노닥거린다. 시간의 덫을 벗어나버린 모습이다. 그렇다. 길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따분할 것이고 담소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즐거울 것이다. 차츰 답사일행도 적응을 한다. 누구라도 마이크를 잡고 무료한 시간을 법담으로 날린다. 대요스님이 먼저 분위기를 돋운다.
3년 묵언수행을 마치고 한겨울에 서울 화계사로 숭산스님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목욕탕에 들렀다가 목욕한 뒤 옷을 입으려고 할 때였다. 옆에 서 있던 25세쯤 되는 청년이 다가왔다. 청년이 물었다.
“스님, 한 말씀 묻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발가벗은 상태였다. 청년은 대요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탈의한 상태에서 질문한다는 것은 그만큼 청년에게는 절실했던 모양이었다.
“어제는 손이 깨끗했는데 오늘은 왜 더럽습니까?” “그럼, 나도 한 마디 묻겠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어제 깨끗한 손은 어디서 왔으며, 오늘 더러운 손은 어디서 왔느냐?”
청년이 즉시 대답했다.
“마음입니다.” “마음을 가져와봐라.”
청년은 대답을 못했다. 충격을 받고는 대요스님이 옷을 다 입고 목욕탕을 나설 때까지도 그대로 서 있었다. 스님이 발가벗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그제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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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란자라강을 건너는 인도인들. 부처님도 이 강에서 목욕한 뒤 수자타의 마을로 걸어가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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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처럼 네란자라강 건너 수자타 마을로
답사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보드가야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고 찾은 곳은 부처님이 6년 고행했던 유영굴이다. 버스가 갈 수 없는 곳이므로 승합차에 분승하여 유영굴(留影窟)이 있는 전정각산(前正覺山)으로 달린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 정진했던 산이라 하여 붙인 이름인데 코끼리 머리 형상이므로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둔게스와리(Dungeshwari)라고 부른다. 유영굴 산자락 밑에서 승합차가 멈추자 가마꾼들이 달려와 ‘둔게스와리, 둔게스와리!’라고 외치며 호객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행한 성소를 답사하면서 어떻게 가마를 타고 올라갈 수 있겠는가. 일행은 가마꾼들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오른다. 전정각산은 동굴이 많은 바위산으로 산자락은 시다림 즉 공동묘지였고 묘지 부근에는 불가촉천민들이 살아왔다고 전한다.
그런데 전정각산과 보드가야 사이로 흐르는 네란자라강 주변은 토지가 비옥하여 잘사는 수자타마을 등이 있었으므로 수행자들이 탁발하기가 좋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고행하는 동안 시봉했던 다섯 비구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던 까닭도 주거공간인 동굴이 있고, 목욕할 수 있는 강이 있고,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가깝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현재 유영굴은 티베트 스님들이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티베트 고승들의 사진이 사원 벽에 붙어 있다. 일행은 바로 유영굴로 들어가 참배한다. 유영굴 바로 옆 작은 동굴에는 부처님 고행상이 봉안돼 있다. 잘 알다시피 부처님이 선택한 고행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흡을 멈춤으로 해서 몸 안에서 불벼락이 치는 등 극단의 고통을 겪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단식으로 인한 고행이었다. 하루에 보리 한 알에서 쌀 한 알로, 다시 삼씨 한 알로 줄이어 배와 등뼈가 찰싹 달라붙었고 피부는 검은 빛깔로 변해버렸다. 굴 안에 봉안된 고행상은 당시의 부처님 모습을 재현한 것이리라.
그러나 부처님은 고행만으로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사해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고행을 미련없이 버린다. 굴을 나와 네란자라강으로 간다. 목욕한 뒤 수자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힘을 낸다. 그리하여 농부에게 길상초를 얻은 뒤 찾아간 곳이 보리수다. 왜 하필이면 보리수를 찾아가 그 그늘에 길상초를 펴고 앉았을까? 부처님 고행상 앞에서 문득 솟구치는 나의 의문이다. 인도에는 반얀나무나 잠부나무, 전단나무나 림나무 같은 나무가 많은데 왜 보리수를 선택하여 가셨을까 하는 의문인 것이다.
굴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티베트 스님들이 경전을 외고 있다. 티베트 스님들의 수행특징은 오체투지이거나 경전독송이다. 일행은 홍차에 우유가 섞인 달달한 짜이를 한 잔씩 마시며 유영굴을 내려선다. 부처님이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네란자라강을 건너 수자타마을을 들렀다가 보리수로 가셨듯 일행도 그 길을 걸어서 가보기로 한다. 마침 갈수기여서 강을 건너기에 안성맞춤이란다.
강을 건너기 전에 움막 같은 집들을 지나 작은 학교가 나온다. 20세 안팎의 청년이 선생인 모양이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마당에 세운 칠판 앞에서 공부하고 있다. 오목한 능선을 넘는 길이 네란자라강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뒤돌아보니 산봉우리 형상이 거대한 코끼리 머리 모습이다. 인도를 다녀온 옛 구법승들이 왜 상두산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넌다. 네란자라강 역시 파트나 부근에서 강가강과 합류한다고 한다. 발바닥에 닿는 강물 속의 모래가 부드럽다. 강은 대지가 두른 인도여인의 사리 같다. 부처님은 이 강에서 목욕한 뒤 대지에 입 맞추듯 한 걸음 한 걸음 수자타가 사는 마을로 걸어가셨을 터이다. 수자타는 대목장 주인이자 장군의 딸로서 신분은 크샤트리아였다. 그러고 보니 아쇼까왕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쇼까왕은 부처님께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타를 기리기 위해 스투파를 조성했던 것이다.
답사일행은 네란자라강을 건넌 뒤 곧장 수자타 스투파 쪽으로 간다. 도중에 수자타사원을 지나쳤는데 사원은 볼품이 없었다. 수자타상이 있었지만 조악하여 고개를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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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타를 기리기 위해 아쇼까왕이 세운 수자타 스투파. |
부처님 정각지서 담마순례 시작한 아쇼까왕
스투파를 참배하고 나오니 버스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 버스는 이제 일행을 태우고 마하보디 사원으로 이동한다. 마하보디 사원은 아쇼까왕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장소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이다.
현재의 모습은 굽타왕조 때 중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스는 마하보디사원이 자리한 언덕 밑에서 멈춘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아난존자에게 네 곳을 기억하라고 했다. 룸비니와 보드가야, 사르나트와 쿠시나가라 등 이른바 4대성지다. 이윽고 일행은 동향(東向)의 마하보디 사원 입구에 와 있다.
마하보디 대탑이 예전에는 노란 빛깔이었는데 시멘트로 보수했는지 회색빛깔이다. 탑돌이 하는 각국의 순례자들로 대탑 둘레는 형형색색의 물결이다. 일행은 사원으로 들어가 한글반야심경을 독송한다. 일행 중에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인다.
보리수는 대탑 뒤편에 있고, 아쇼까 석주는 왼편에 있다. 일행은 아쇼까왕 석주를 먼저 참배한다. 그런데 석주에 각문이 없다. 알고 보니 일행 앞에 있는 석주는 원래의 것이 아니란다. 보드가야 외각의 박로르(Bakror)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두 토막 중에서 큰 것이라고 한다. 원래의 석주라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곳이라는 각문과, 여기서부터 담마순례를 시작한다는 각문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쉽다.
일행은 기대를 접고 보리수 아래로 가 좌선에 든다. 보리수는 언제 보아도 잎들이 무성하다. 새들이 가지마다 앉아서 우짖고 있다. 일행 모두가 보리수의 기운을 받아 좌선삼매에 들었는지 미동도 않는다. 우짖는 새들의 소리가 좌선을 흩트리지 못한다.
인도수행자들이 보리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24시간 맑은 기운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나무와 달리 보리수는 24시간 산소만 내뿜다는 것이다. 신심이 보리수 나뭇잎처럼 무성해짐을 느낀다. 부처님이 왜 4대 성지를 기억하라고 했는지 깨달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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