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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4:25~27(120) 나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2022. 8. 28
현재 미국 대륙을 발견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에 한 명이었던 크리스토퍼 콜롬버스(1450-1506)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1492년 10월 12일 미국의 바하마제도에 상륙하면서 신대륙 미국을 발견하게 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에서 스페인어 크리스토퍼의 뜻은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란 뜻입니다. 비신앙적인 이름들이 참으로 많은데, 이름에 그리스도를 지고 간다는 의미를 넣을 지을 정도면, 매우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탐험가였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일생은 결코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스페인 왕궁과 당시 교황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대탐험을 이루어나갔지만, 콜럼버스는 결코 신앙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사학가들은 콜럼버스를 두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지고 간 것이 아니라 황금을 지고 다녔다’고 평가합니다.
콜럼버스는 일생동안 황금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황금 때문이었습니다. 1493년에 시작한 2차 원정에서는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 엄청난 수의 노예와 황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후원을 받아 냅니다.
결국 황금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학살합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들입니다. 컬럼버스가 제시한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들은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고, 9살부터 35살까지의 여성들은 은화 두 개에 매춘부로 팔려 나갔습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히스파니올라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황금에 눈이 먼 콜럼버스가 온 이후 2년 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가 모두 전멸해 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지는 사람이 아니라 황금을 지고 따라갔던 콜럼버스가 행한 악행입니다.
결국 컬럼버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콜럼버스는‘매독’이라는 성병에 걸려 죽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황금을 쫓다가 늙어서 추악한 성병으로 일생을 마무리한 콜럼버스입니다. 사학자들은“콜럼버스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것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나마 이것이 하나님이 내리신 천벌이다”라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보이는 사진이 콜럼버스의 관을 들고 있는 동상입니다. 죽어서도 땅에 묻혀 안식하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 있는 불안전한 모습을 형상화한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아무리 거창하게 떠들고 다녀도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가 아니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라는 참으로 신앙적인 이름을 가졌던 콜럼버스였지만, 황금을 지고 가는 모습이었기에 인생의 마지막이 비참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두고 두 종류의 단어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리와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25절 보세요,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비록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이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구경꾼이 있었고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무리입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백날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구경한다고 할지라도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교회당을 출입하면서 설교를 듣는 시청자라 된다고 해도, 제자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무리와 제자들을 분간하고 판가름하는 것일까요? 무리와 제자는 지향하는 목적과 행동하는 방향이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물러서 기적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이 베푸는 오병이어의 능력을 맛보았던 사람들도 무리가 있었고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무리와 제자들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무리들’이라 표현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아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예수님을 이용하기 때문에 따릅니다. 즉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황금을 지고가려고 예수님 주변에 머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무리들을 향하여 요 6:26절에서“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믿음을 챙기고 죄사함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신의 일 때문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무리들의 이런 모습과 달리 제자들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철저히 예수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무리들은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생명을 내어 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만 불리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무리들인가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허다한 무리에 속하여 사십니까? 아니면 제자로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입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과연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고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려고 하지 않고, 황금을 지고가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교회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도록 합시다.
과연 나는 예수님 주변에 머물면서 떡이나 먹고 굿이나 보면서 즐기는 무리들인지? 아니면 하는 주님이 인정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제자인지, 스스로의 삶을 판단해 보도록 합시다. 구경꾼의 무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1. 오직 예수만을 사랑하는 자가 제자입니다.
축구황제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유명한 축구 선수인 펠레입니다. 펠레가 전성기 시절 기자가 펠레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씩 연습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공을 차는 시간이고요, 공을 안 차면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요, 축구에 대해 이야기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한 꿈만 꿉니다.”
무슨 말인가요? 펠레의 생각과 행동 속에는 오로지 축구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축구에 대해서만 24시간을 생각하며 지내니 유명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하였던 20대 시절에 당구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구를 처음 시작하니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어도 당구생각이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앉아 있는 성도들의 머리가 당구공으로 보일 정도로 당구에 홀딱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구만 생각하고 당구책만 보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좋아하니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축구황제 펠레는 하루 종일 축구만 생각하였다고 인터뷰하였습니다. 축구를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그리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구경꾼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예수를 생각하며 살아가시는가요? 하루에 몇 번이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시는지요?
예수님의 제자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만 하였다고 제자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 중에서 일부분을 교회에 바쳤다고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행동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외적인 판단으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파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제자를 판단하는 첫 번째 근거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가 제자라는 말입니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큰일 납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가정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고 처자식을 사랑하지 말고 내팽개치라는 사악한 명령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정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아무리 내 아내와 내 남편이 사랑스러워도, 생명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보다 자신을 꾸미고 투자하는 것에 더 많은 노력과 물질을 소비합니다. 기백만원짜리 명품을 몸에 휘감아도 교회를 위한 헌신에는 인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경꾼 무리들입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외아들을 키우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면 항상 앞장서서 희생하며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신앙에 의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내 심령이 이렇게 답답하며 기쁨이 없습니까?”이 때 마음에 응답 하나가 들립니다. “너는 네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치지 않고 있다”
그 순간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방에 들어왔고, 어머니에게 “아프리카 선교사로 지원해서 곧 선교 훈련을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망치로 가슴을 맞은 충격에 바집니다.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역만리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말게 어머니는 “그 일만은 허락할 수 없다”말하면서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다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내 아들만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헌신하고 바쳤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였던 아들이 그의 믿음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가장하는 사랑하는 모습이 행동에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아내와 남편과 자식도 사랑하지만,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예수사랑’을 하나 더 끼워 넣는 사랑이 되어서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 사랑을 우선으로 행동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가 제자입니다.
27절,“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김동길 교수의 글에 나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한 여학생이 금 십자가를 목에 걸고 가는 것을 보고 그 학생을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이 교수님에게 무슨 대답을 했을까요?
여학생은 김교수님에게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로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당돌하면서도 엉뚱한 말이지만 생각하게 만드는 답변입니다. 김동길 교수님은 십자가는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순종과 헌신의 모습으로 지고 가야 된다는 의미로 던진 말입니다. 이에 여학생은 자신이 뛰어가다 보면 가끔씩 십자가가 돌아가서 목뒤에 간다는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는 자랑하기 위하여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하여 착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십자가는 묵묵히 지고 가야 되는 십자가입니다. 그냥 기분 좋을 때 하루 정도 지고 나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 9:23에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라는 말씀은 하루 종일 1년 365일 평생 동안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7절 다시 보세요,“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행동’과 ‘주님을 따르는 행동’을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는 주님을 항상 따라는 자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각자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맡은 직분의 십자가가 있으며, 내가 맡은 순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울러 내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이 조금 힘들다고 해서 도망가 버리고 뒤로 숨어 버리는 그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런 모든 십자가를 우리 모두가 양 어깨에 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십자가를 지고서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이며,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고난과 고통의 수고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냥 쉽게 예수 믿고, 쉽게 신앙생활하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교회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세상 놀 것 다 놀고 즐길 것 다 즐기고, 그러면서 천국의 복은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과 주님을 양손에 잡고 저울질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세상 것 먼저 챙기려다가 주님을 내팽개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 곁에서 구경하는 구경꾼 무리에 불과 합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이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기도합니다. 물질이 넉넉하지 않아도 신앙이 든든히 서 있으면 물질의 부족함은 채워집니다. 건강이 조금 부족하여도 올바른 신앙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된 성도들에게 이런 은혜를 항상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세기 최고의 부흥사였던 무디(D. L. Moody 1837-1899)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전에는 내 소원이 축복이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다. 전에는 내가 감정의 중심이더니 지금은 말씀이 나의 중심이다. 전에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더니 지금은 쉬지 않고 헌신하게 되었으며, 전에는 내가 주님을 사용하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보게 되었다.”
무디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더웠던 8월이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여름 더위가 한풀이 꺾이고 신선한 가을이 온다는 처서가 지났습니다. 다가오는 9월의 모든 시간에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구경꾼 무리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하늘의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