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아침을 먹어라”
성서백주간을 마치며
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 이주은 베로니카
어머니를 여의고 생이 허망하였습니다. 와병 중에 있었던 친정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두 달 전 끝내 병원 신세를 지셨습니다. 애틋한 모녀 사이는 아니었지만 여린 소녀 같았던 친정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신 것이 딸로서 못내 죄송했습니다. 퇴근길에 병원을 들르는 것이 한 달여 되었을 어느 날 어머니는 벌써 수족이 차가워지고 의식이 없어 보였습니다. 설마 어머니에게 허락된 숨이 그렇게 짧으리라곤 생각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했는데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임종을 못한 자책이 후회와 죄책감으로 변해 오래 괴로웠습니다. 주변의 임종의 순간에 내려 주신 은총을 얘기하는 말들에서 부러움을 느끼면서 나는 그 은총에서 비껴갔다는 자괴감이 생겼습니다. 주님을 원망하게 되고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약해지는 단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삼우제 후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와의 단상들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스럽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던 어머니의 인생의 모습들이 인사도 없이 스러졌다는 생각은 서러운 슬픔으로 변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습니다. 서서히 망자에 대한 슬픔은 옅어졌지만 생에 대한 허망함은 꽤 오래 지속 되었습니다.
7년 동안 해왔던 성당의 봉사활동도 그만두고 주일 미사만 지키고 있을 때 봉사를 같이했던 자매님이 성서백주간을 권유해주셨습니다. 선뜻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백주간이란 긴 시간도 힘들어 보이고 새로운 교우들과 묵상을 나누며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권유한 자매님이 세 번째 백주간을 시도한다는 것과 몇몇 친숙한 자매들이 같이하자고 하셔서 결국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창세기는 전에 성서 모임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부터 난관이 시작됐고 레위기로 접어들었을 땐 반복되는 문장들로 글자를 읽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레위기 1, 2~4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가운데 누가 짐승을 잡아 주님에게 예물을 바칠 때에는, 소 떼나 양 떼 가운데에서 골라 예물을 바쳐야 한다. 소 떼에서 고른 예물을 번제물로 바치려면, 흠 없는 수컷을 바쳐야 한다. 주님 앞에서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그것을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져온 다음,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러면 그 제물이 그를 위해 호의로 받아들여져, 그의 속죄가 이루어진다.’레위기의 번제물에 관한 규정, 곡식 제물에 관한 규정, 친교 제물에 관한 규정, 속죄 제물에 관한 규정 등이 반복해서 되풀이 되는 것을 읽으며 제물이 태워지는 연기로 가득한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속죄 제물을 매일 태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러자 나는 예수님께서 대속한 사랑하는, 선택된 하느님의 자녀라는 깨달음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부재, 갱년기의 우울, 자녀 교육에 대한 자책 등으로 훼손당한 자존감으로 나락에 떨어진 심정이었던 제게 그 구절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원을 회복한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따뜻한 위로를 받고도 구약을 읽어내기엔 고난의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꿰뚫어지지 않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읽은 게 기억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사도 통사는 헷갈려서 인물과 그가 살았던 나라를 결합시키지 못하는데 이름이 낯선 유대민족의 인물들은 정말 순서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성경의 말씀은 백주간 구성원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왔고 역사 지식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5, 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then let justice surge like water, and goodness like an unfailing stream.’ 아모스를 읽으면서 이 구절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라는 단어가 주는 거대한 느낌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는 못해 계속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까지 찾아보았습니다. 비로소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르지 않고 흘러 고이지 않고 넘치는 것이 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선한 마음은 그런 성질을 가져야 하고 나는 샘물처럼 선한 행동을 멈추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단죄하고 심판해야 하는지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나쁜 행동은 전염이 되고 몹시 신경 쓰였지만 그것이 나를 흔들게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상이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모임을 할 수가 없었고 백주간 모임도 기약 없이 중지가 되었습니다. 1년여가 지났을 때 봉사자님의 줌으로 백주간을 시작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과 성경을 완독하고 싶은 욕심에 줌으로 모임을 하겠다고 했는데 희망자가 2명뿐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봉사자님께서 소수라도 끝까지 끌고 가시겠다는 의사를 주셔서 백주간의 모임이 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명이 있을 때는 복습을 못해 가도 슬쩍 넘어갔는데 둘이 하다 보니 숙제를 안 할수가 없었습니다. 소수이다 보니 묵상 나눔은 줌에서도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을 읽었었나 싶게 하얘진 기억을 가지고 다시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분산되어 읽을 때마다 새로웠지만 성경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 늘 저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갱년기는 참으로 당황스런 시기인 것 같습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한과 나를 판단하는 허망함이 엄습해오면 나의 신앙은 모래 위의 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현재를 보던 시각이 없어지면서 오지 않은 노년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많아졌습니다. 불안을 없애는 방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고 싶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비대면 시기로 인하여 유튜브로 얕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과학, 역사, 문화 등 알고 싶은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방출하는 채널은 넘쳐났습니다.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생긴 것이지요. 2천년 전의 말씀으로 세상을 파악하기에는 21세기의 세상은 급변 중이고 다변화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사이 성경은 구약을 끝내고 신약으로 들어갔고 성경은 훨씬 읽기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머릿속에만 남고 입으로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가슴으로 묵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묵시 2,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유튜브를 통해 강의하시는 신부님들의 영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인터넷 시대의 이로움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의 강의가 묵시록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묵시록은 모호하고 무서운 예언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혼란과 격변의 상황 속에서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라는 걸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제야 통사로 다가왔고 핍박받았던 이스라엘의 아픔이 공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는 확신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루카 12,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 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처음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열여섯의 나이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내 머리카락을 세고 계시다는 말씀으로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사춘기에 가졌던 열등감을 극복했던 그 귀한 사랑이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에 대한 허망함, 은퇴 후 생활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은 오지 않은 현실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그 불안함 앞에 신앙은 수시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기도 대신, 교회로 가는 것 대신 불안할수록 더욱 세상의 이론에 의존하게 됐으나 인터넷에 넘쳐나는 데이터로 인해 나는 너무나 작아지고 무력해 보였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섭렵한 미약한 과학 지식과 경제 지식은 내 뼈로 만든 금송아지였습니다. 요한 3,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나의 미약한 지식으로는 세상을 완전히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또한 온전히 알아듣기에도 부족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고 결국 주님께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요한 14,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저는 늘 중첩된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지하지 않고 있으면 주님의 현존을 모르고 불안 속에서 놓여 있다가 성경을 읽고 묵상 나눔을 하며 주님을 찾게 되면 다시 주님의 현존을 각인하게 됩니다. 평안과 불안의 경계선에서 백주간을 통한 성경공부는 생명의 동아줄 같았습니다. 묵상 나눔을 통해 듣는 자매님들의 얘기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믿지 못하는 제게 보여주시는 일들이었습니다.
요한 21,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사자님, 같이 성경을 묵상했던 자매님은 저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같았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으로 처져 있다가도 백주간을 하는 날이 다가오면 성경을 읽고 복습을 하고 묵상을 준비했습니다. 변함없이 화요일 저녁 8시가 되면 줌으로 초대해주신 안젤라 자매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