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반조의 지혜
그러나 세 가지 지혜 즉 종성과 도와 과의 지혜의 존속기간은 길지 않다. 그것은 아주 짧아서, 사띠하는 생각을 한 번 하는 동안처럼 단지 순간만 지속된다. 그 뒤를 이어서 “반조의 지혜”가 일어난다. 그 반조의 지혜를 통해서 수행자는 아주 빠른 사띠의 기능과 함께 “벗어남에 이르는 관찰의 지혜”를 통찰하고, 사띠의 마지막 단계 직후에, 도(道)의 마음이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정지(靜止)로 들어갔다는 것을 통찰한다. 이것이 “도 반조의 지혜”이다.
그는 또한 같은 정지에 머물면서, 도 의식과 반조의 마음의 중간에 있는 마음도 통찰한다. 이것이 “과 반조의 지혜”이다.
나아가서 그는 지금 막 경험한 대상은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이 비어 있다는 것도 통찰한다. 이것이 “열반 반조의 지혜”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내가 지나온 도(道)이구나.’라고 도를 되돌아본다. ‘이것이 얻어진 지복(blessing)이구나.’라고 과를 되돌아본다. ‘내가 이 상태를 대상으로 해서 통찰했구나.’라고*주 영원한 행복인 열반을 되돌아본다.
*주 : 이 의미는 열반이 이제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이 되었으며, 더 이상 개념적 사고에 의한 정신적 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수행자들 중 일부에게는 “번뇌를 반조의 지혜”도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본 뒤에, 수행자는 여전히 몸과 마음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대로 사띠하는 수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사띠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 나타나는 몸과 마음은 아주 거칠게 나타나지, “형성평온의 지혜”의 단계에서처럼 미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금 존재하는 지혜는 “생멸의 지혜”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귀한 제자(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가 사띠에 의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다시 시작할 때는, 대개 처음에는 “생멸의 지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통상적인 순서이다.
그러나 어떤 수행자들은 도와 과의 획득으로부터 나올 때, 그 획득에 의해서 엄청난 믿음과 행복감과 기쁨과 편안함이 생겨서 온몸에 흘러넘친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그 시점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사띠하는 수행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아무리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하려고 두 배로 노력해도, 현상들이 일어나는 순간에 명백하게 분리해서 통찰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커다란 힘으로 생기는 기쁨과 편안함과 행복감만을 경험한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믿음을 통한 엄청나게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혹은 그 이상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넓고 광활한 허공 같은 곳에 있으며,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때 생긴 평온한 특성과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감을 수행자들은 이렇게 칭찬한다. “틀림없이, 나는 전에 이런 행복을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한 믿음과 행복감과 기쁨과 편안함은 두세 시간 지난 다음에 사라질 것이다. 수행자들은 몸과 마음이 일어날 때, 그들을 분리하여 사띠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생멸의 지혜”가 먼저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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