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방면 탐방(‘24. 3. 19) 자료 안내 김천지방은 예부터 금(金)의 주산지로 이름이 나서 김천(金泉), 김산(金山), 금릉(金陵)이라는 이 지명이 모두 금(金)과 관련이 있다. 옛날에 금을 캐던 고성산 금광(現, 과하천 터)에 물이 고이면서 폐광이 되고, 훗날 우물로 사용하면서 「금을 캐던 우물」이라는 뜻으로 금천(金泉)이라 불렀다. 이 금천의 물이 차고 맑아 술을 담아 먹었는데 이것이 곧 이 고장을 대표하는 과하주(過夏酒)가 되고, 이로부터 사람들은 금천을 일러 과하천(過夏川), 과주샘이라 했다. 고려 시대 초, 금천 아래에 역(驛)이 들어서자 이 고장을 대표하는 공동우물이었던 금천 샘 아래에 있는 역이라 하여 역 이름을 금천역이라 했다.
금천역이 김천역으로 바뀐 것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가 금나라의 후예라 하여 이 고장의 선비들이 금(金)을 김(金)으로 바꾸어 불렀다. 따라서 김천이라는 지명은 금천이라는 샘으로부터 비롯되어 고려 시대에 역(驛)의 이름이 되었다가 조선 후기 역 주변에 시장이 번성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김천이 삼산이수(三山二水 : 황악산, 대덕산, 금오산, 직지천, 감천)의 고장으로 대표하는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번 답사에 참여한 회원 중에는 김천 출신이나 이곳에 근무한 적이 있는 몇 분도 함께하여 의미가 깊을 것이다. 1. 김천 직지문화공원 ᅳ 이동 거리와 소요시간 : 대구 반월에서 86km, 1시간 20분, 탐방시간 : 160분간
김천 직지문화공원은 김천시가 418년(신라 눌지왕 2)에 건립된 전통 사찰인 직지사 주변의 무질서한 개발 행위를 예방하고, 직지사와 연계한 문화 관광 자원화를 위해 2001년 9월 21일 경상북도 고시(告示)로 공원으로 지정되어 동년 12월부터 2004년 4월까지 3여 년에 걸쳐 총사업비 160억 원을 투입하여 조성하였다. 중앙음악 조형 분수를 중심으로 직지사 경내의 맑은 물을 그대로 유입되어 공원 내로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으며, 어린이놀이터에는 놀이기구 10여 종과 지압 보도, 굵은 모래, 점토 블록 등으로 조성된 산책로가 있으며, 모양이 각기 다른 정자 및 파라고(야외 쉼터) 9개, 잠시 쉴 수 있는 의자 140개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유명조각가들이 만든 50점을 작품도 설치되어 있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고목류도 1천300여 주 등 많은 수목과 관목류 초 목류가 심겨 있어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길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중앙음악 분수대는 음악에 맞춰 연출되는 웅장한 음향과 함께 야간 20분씩 펼쳐지는 화려한 분수 쇼는 문화공원의 대표하는 시설로 음악 분수 운행 시기는 6월부터 9월이며, 야간 20시 21시 한 번씩 운행한다.
김천 직지문화공원
2. 김천 세계도자기박물관 김천 직지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김천 세계도자기박물관은 재일교포 2세인 복전영자(福田英字) 씨가 서양자기, 크리스털 등 1,019점을 김천시에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박물관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도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건물면적 지하 1층, 지상 1층의 3개 전시실과 1개의 영상실이 있다. 세계도자기박물관에서는 백자 청화 모란 문호, 청자상감 화초 문관을 비롯한 한국도자기 30점, 로열 크라운 더비, 크라운 화병 등을 포함한 유럽 도자기 503점, 라리크 사자, 무라노 앵무새, 빅토리안 촛대를 포함한 크리스털 작품 512점 등 총 1,063점에 달하는 도자기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천 세계도자기박물관
3. 사명대사공원 김천시 대항면에 있는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처음 조경 당시는 ‘하이로비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하야로비’가 왜가리의 우리말이긴 해도 일본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여론이 일자, 6세 때 사명대사가 직지사로 출가하셨음을 착안해서 2020년 ‘사명대사공원’으로 개칭하였다.
사명대사공원 ‘사명대사공원 조성 사업’은 2010년 투자 심사를 통과하면서 시작되어 2020년 4월 6일 준공되었다. 국비 도비 시비를 포함하여 총 792억 원의 예산으로 42,200평의 부지에 김천시립박물관과 평화의 탑, 건강문화원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친환경 생태공원을 표방한 사명대사공원은 백두대간 황악산을 배경으로 직지사와 직지천 인근의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연중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사명대사공원 내 평화의 탑 사명대사공원 내에는 솔향 다원, 여행자 센터, 로비동, 체험동, 식당동, 물놀이장 등의 시설도 있어 숙박과 관람, 건강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중 운영되고 있다. 개장 초기에는 김천시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나, 2021년부터는 김천시시설관리공단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4. 김천 친환경 생태공원 직지사 인근에 자리한 김천 친환경 생태공원은 파릇파릇한 잔디밭은 물론 선인장 온실과 생태 연못, 철쭉 동산 등으로 구성되어 햇살 좋은 날 여유롭게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드넓은 잔디광장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곳곳에 사막 도마뱀 조형물이 자리해 이색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투명한 유리 외관이 인상적인 선인장 온실은 한겨울에도 초록빛 가득한 풍경이 넘쳐난다. 온실 안에는 450종의 총 600개의 선인장과 다육식물들이 심겨 있다. 매년 봄이면 연홍색 꽃이 피는 철쭉 동산을 만날 수 있다. 산철쭉과 백철쭉, 영산홍, 자산홍이 한데 어우러진 철쭉 동산은 5월이면 흐드러진 꽃밭을 이룬다. 그 옆에는 정겨운 장독대와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와 이국적인 풍차가 볼거리를 더한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김천 친환경 생태공원
꿀팁자료 - 1 김천 직지사 대웅전과 천왕문 현판에 숨은 이야기
현재 김천 직지사 대웅전(大雄殿)과 천왕문(天王門)의 현판 글씨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1927년 '구한말(舊韓末)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을 역임한 김명수(金明秀)라는 사람이 그의 전기로 편집해 일당기사출판사(一堂紀事出版社)에서 출판한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직지사의 대웅전과 천왕문(天王門)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글씨는 바로 매국노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당기사(총 815쪽) 중 '연보'(年譜) 항목에 이완용이 66세이던 다이쇼(大正) 「12년 1월 11일(양력 25일) 김천군(金泉郡) 직지사(直指寺)에 2종의 편액(扁額)을 서송(書送 : 글을 써서 보냄)한 것이 대웅전과 천왕문의 판액(板額)이다.」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다. 일당기사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국공립 주요 도서관 통합전산망인 국가전자도서관을 통하면 텍스트 전체에 대한 원문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으며, 관련 내용이 확인할 수 있다.
직지사 대웅전 전문가들의 감정도 「1926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직지사 대웅전 현판 사진과 현존현판 글씨를 비교하면 거의 동일하다."면서 "아울러 이 연보에는 직지사 대웅전 외에도 창덕궁 함원전을 비롯한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고 덧붙였다.
직지사 천왕문 이완용은 친일 행적으로 인해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가였다는 점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는 당시 많은 글씨 청탁을 받았다. 특히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獨立門) 글씨가 그의 필적이라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난 조선의 명필이며 그의 작품 또한 많이 남아 있다.
직지사의 대웅전 천왕문 현판 경북도 유형문화재 215호였던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7년(1649)에 사승, 상원, 계림 등이 중창하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건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내ㆍ외부에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는 점 등이 높이 평가돼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2008년 9월에 보물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지정 예고는 문화재 지정 절차의 일부이며 통상 한 달 정도인 이 기간에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소유자라든가 관리자, 혹은 관할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치게 된다.」면서 「이번에 지적된 내용 등을 포함한 안건을 문화재위에 회부해서 현판 처리 문제 등을 논의한 것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재위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현판이 건축물을 구성하는 일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고 밝혀진다 해서 해당 문화재의 보물 지정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웅전 외편에 있는 사명각의 현판은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이다. 5. 김천 구성면 방초정 ㅡ 이동 거리와 소요시간 : 16km, 25분, 탐방시간 : 50분
김천시에 있는 행정 구역인 구성(龜城)은 옛 지례현의 별호로, 김천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못에서 거북 모양의 바위가 나왔다고 하여 이 연못을 구연(龜淵)이라 하고 연못 뒷산은 구산(龜山)이라 한다. 신라 시대에 구산에 산성이 있었으므로 구산성(龜山城)이라 하였는데 이걸 줄여서 구성(龜城)이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방초정(芳草亭)’은 1625년(인조 3년) 이정복(李正馥. 1575-1637)은 선조 때 종 4품 5위 부호군(五衛 副護軍)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누정(樓亭)이다.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정자에 올라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한 시판이 붙어 있다. 오래전 경북 관광을 소개하는 책자의 표지모델로 쓸 정도로 그 경관이 수려하여 경북을 대표하는 정자로 알려졌다. 또한, 방초정의 건물과 연못, 수목의 배치 등은 우리나라 정원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김천 구성면 방초정 원터마을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으로 김천을 대표하는 반촌(班村 :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으로 지금도 주민 대부분이 연안이씨일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집성촌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원래 큰 도로 옆의 냇가 옆에 있어던 방초정을 1689년 훼손되어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꿀팁 자료 - 2
방초정 옆의 정려각에 얽힌 슬픈 이야기
방초정의 건립과 관련된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이정복(당시 17세)이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 화순최씨 처녀(당시 16세)에게 장가를 들었다. 전난(戰難) 중이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신행길을 나섰으나 이미 시가 식구들은 피난을 떠난 뒤라 수소문 끝에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에 있음을 알고, 그쪽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방초정(왼편)과 정려각(오른편) 위급함을 느낀 새댁은 ‘살아서 욕을 당하니 이를 바에야 깨끗하게 죽는 이만 못하다.’라고 생각한 최씨는 종 석이(石伊)에게 자신이 입었던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기를 당부하고, 자기는 명의(明衣 : 죽은 사람이 입는 옷)로 갈아입고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그러나 여종 석이도 주인을 뒤따라 함께 빠져 죽었다.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 증 숙부인 화순최씨 지려 졸지에 어린 신부를 잃은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여러 해 동안 웅덩이를 떠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러나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재혼을 하게 된 이정복은 부인이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못을 만들어 ‘최씨 부인의 연못’이란 뜻으로 ‘최씨담(崔氏潭)’이라 하였다. 방초정 바로 옆에 조선 인조의 어필로 이정복 처 화순최씨 정려(旌閭)을 하사하였으며, 그앞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가 있다. 원래 정려각 앞에 세워져 있는 ‘충노석이지비’가 같은 시기에 세워졌으나, 정려각을 축조하면서 앞문에 묻힌 것을 1975년 방초정 못을 보수하면서 발견하여 여각 앞에 다시 세웠다.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
6. 섬계선원(剡溪書院) - 이동 거리와 소요시간 : 14km, 20분, 탐방시간 : 50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은 1802년(순조 2년) 김녕김씨 문중에서 건립했으며,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1914년 백촌 김문기의 억울한 죽음과 높은 절개를 기리는 경의재(景毅齋), 1961년 세충사, 1996년 동별묘를 다시 세웠다. 세충사(世忠祀)에는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주벽으로 하고, 함께 순절한 맏아들인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고 있다.
김문기는 충청북도 옥천 태생으로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56년(세조 2년) 공조판서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삼중신(三重臣)의 한 사람 이였다. 그후 1731년(영조7) 복위됐다. 그러나 1980년대에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여 동작동 사육신묘역에 그의 가묘가 안장되어 논란이 많았다. 또 동별묘(東別廟)에는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는 현판과 함께 지례 출신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와 제자인 윤은보(尹殷保), 서즐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서즐과 윤은보는 1434년(세종 16년)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행적이 실렸는데 자손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부모의 예로 효행을 다했으며, 스승의 사후에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자로 유명하다. . 또 예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알지(知)에 예절 예(禮)자를 쓴 지명인 지례(知禮)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필자도 김천에 근무한 적이 있어 2006년 섬계서원에서 춘향제례(春享祭禮)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선임되어 배례한 적도 있어 이번 탐방이 유난히 감회가 남다르다.
김천 대덕 섬계서원 김천 대덕면 조룡리 은행나무는 수령 약 500년 이상으로 높이 20m, 둘레 12m의 노거수로 섬계서원의 뒤뜰 담장 부근에 있다. 조룡리 은행나무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간직한 향토 문화적 가치와 노거수로서의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아서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나무의 크기에 자꾸만 놀라게 한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방화로 인해 밑동에 불이 붙게 되었는데 이 불을 한 노파가 호미로 긁어서 껐다고 한다.
김천 대덕면 조용리 섬계서원 은행나무 그 후에 나무의 소유권을 두고 김천현과 섬계서원 간의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은행나무가 향교나 서원의 교육 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김씨 문중의 의견이 받아져 섬계서원의 소유로 판결이 났다고 한다. 꿀팁 자료 ㅡ 3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이야기 조선 시대 초기 문신으로 충청북도 옥천 태생으로 본관 김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초명 효기(孝起). 시호 충의(忠毅).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년) 공조판서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하였다. 그 후 1731(영조 7)에 복위됐다. 그러나 1980년대에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여 동작동 사육신묘에 허묘가 안장되기도 하여 논란이 많았다.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2월에 절의 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쳐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정단과 별단에 배식된 230인을 수록한 인명록을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으로 32인으로 편정(編定)하였다.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는 김문기를 삼중신(三重臣, 단종 복위 때 순절한 3 재상)에 포함하였고,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김경남(김문기의 증손)·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 즉,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을 비롯한 6인의 종친) · 사의척(四懿戚: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한 4인의 외척) · 삼상신(三相臣: 황보인 · 김종서 · 정분(鄭苯) 등 3정승) · 삼중신(三重臣: 민중(閔仲) · 조극관(趙克寬) · 김문기 등 3재상) · 양운검(兩雲劒: 성승 · 박쟁 등 2무장) ·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 이개 · 유성원 · 박팽년 · 하위지 · 유응부) 등의 순으로 구분 선정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 』에 편찬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대왕이가 육조와 홍문관에 명령하여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임당 당한 신하들을 세조실록 등 조정의 참고 문헌을 널리 고증받아 벼슬 위차 서열에 따라 제사음식을 분배하여 정했다는 신중히 결정한 기록으로 국가적인 의전이었다. 이와 같이 사육신 문제는 오랜 기복(起伏)을 거듭한 끝에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국민들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1977년에 김녕김씨 문중에서 어정배식록의 기록이 오류가 있었다며, 유응부의 행적이 김문기의 것과 같다며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삼중신보다 순서가 낮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이상한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시,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합의사항을 참조하여, '유응부의 사육신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김문기을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꿀팁 자료 - 4 김천 지례마을의 지명 유래
김천 지례(知禮)는 김천 서부권의 5개 면인 감천면, 조마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을 모두 아우르는 중심지로 5일 장이 서는 곳이다. 이 마을이 이렇게 유명한 것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때문이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 10)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에 따라 펴낸 책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父子), 부부간에 모범이 될 충신, 효자, 열녀들을 각각 35명씩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세종 14년(1432)에 간행되었으며, 성종 12년(1481)에는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삼강행실도 효자편에는 서즐(徐騭)과 윤은보(尹殷保)의 이야기를 ‘은보감오(殷保感烏 : 은보의 효심에 까마귀도 감동하다)’라는 제목으로 그 행적이 실려 있다. 그들의 스승은 장지도(張志道 :1371~ ?)이다.
장지도는 김천시 지례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굳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공민왕 때 향시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명망을 얻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 종4품 교서소감(校書少監)인 그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하는 중책을 맡았으나 왕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골육상쟁을 목도 하면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김천 지례현으로 낙향해 은거하여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고, 특히 이 지역 출신인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 등 훌륭한 제자를 길러 지례현의 문풍을 진작하였다.
하루는 윤은보와 서즐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으로 태어나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은 섬기기를 하나같이 하라 했는데 우리 스승이 아들이 없으니 우리가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후부터 맛있는 것이 생기면 스승에게 먼저 드리고, 명절이면 술과 반찬을 준비해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장지도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여묘살이 할 것을 청하니 아버지는 가련하게 여겨 허락했다. 이내 상복을 입고 묘 옆에서 살면서 몸소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드니 곧 돌아가 약을 올렸는데 이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한 달여가 지나서 윤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열흘이 되지 않아 별세했다. 윤은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 무덤에 여막을 지었다.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향로가 날라갔다. 몇 개월 뒤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합이었다. 삭망이 돼 장지도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서즐과 함께 3년상을 마쳤다.
서즐 또한 스승의 기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물을 구하지 못해 통곡하자 그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는 정성고개의 주인공이었다. 스승인 장지도와 제자 윤은보, 서즐의 행실이 칭송하여 대덕면 섬계서원의 배향되었고, 김천 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삼효정려비와 비각이 유허비와 나란히 있다. 이로 인해 예(禮)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알 지(知)에 예도 예(禮)자를 쓴 지례(知禮)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천 지례의 삼효정려각
충효 열녀는 국가가 이를 장려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삼강을 몸소 실천한 백성 중에서 모범사례를 선발해 표창하고 각종 혜택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정려각이다. 정려(旌閭)의 정(旌)은 천자나 임금이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신임의 증표로서 내리는 깃발을 말하며, 려(閭)라는 것은 마을 입구나 길에 세운 문을 의미한다. 7. 김천 부항댐 ᅳ 이동 거리와 소요시간 : 11km, 15분, 탐방시간 : 60분
경북 김천시 부항면에 건설된 다목적댐으로 낙동강 수계지역의 기상 이변으로 인한 감천의 홍수 피해를 줄이고, 김천시와 구미시 지역에 안정적인 용수를 공급하고자 2006년에 착공하여 2011년에 완공되었다.
부항댐은 김천 8경의 하나로 댐의 높이 64m, 길이 472m의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밑으로는 돌을 괴어 위로는 콘크리트로 조성한)으로 총저수량은 5,430만㎥이다. 댐 하류에 산내들 공원이 있으며, 주변 시설물로는 부항댐 출렁다리와 김천 부항댐 물문화관이 있다.
김천 부항댐 이번 부항댐 탐방은 이곳 물문회관(김천시 지례면 도곡리 1005-5)이 주가 되겠다. 물문화회관에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 부항댐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또 물문화관에는 댐과 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전시물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화법과 특수 칠을 하여 평면의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입체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관람객이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전시물(트릭아트)과 재미있는 조형물이 있어 사진 찍기에 좋은 곳으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김천 부항댐 물문화관 *김천 부항댐에서 대구 반월당까지 이동 거리와 소요시간 : 97km, 8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