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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7~11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믿음이란? 2023. 8. 13.
전 세계에서 많은 팬을 확보한 스포츠 종목 중에 테니스 종목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프로 테니스 선수들은 매우 큰 돈과 명예를 가지는 인기 스포츠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축구나 배구 양궁 등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프로 테니스 선수로 전세계에 이름을 드러내는 선수는 없어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1960년대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는 ‘흑인은 테니스를 칠 수 없다’는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힌 옷을 입고 테니스를 치는 것은 백인들만이 하는 운동이라 판단하여서 흑인들은 테니스를 못 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미국 내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한 상태였습니다. 흑인들 전용 화장실과 흑인들만이 타는 전철칸이 따로 만들어져서 운영될 정도로 차별정책이 심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아서 애쉬(Arthur Ashe)라는 청년이 UCLA대학에 테니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합니다. 그리고 테니스 미국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면서 흑인금지 규정을 실력으로 뛰어넘어 버립니다. 68년 US오픈, 70년 호주오픈, 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백인 선수들을 완벽하게 꺽어 버리고, 흑인 최초의 테니스 선수로 우뚝 서게 됩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연설하는 도중에 권총으로 암살을 당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흑백 갈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렇게 미국이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세계 랭킹 1위가 됩니다.
그 후 1979년 심장 질환으로 은퇴를 하고 인권운동가, 자선사업가로 활동합니다. 그런데 1990년 본인이 에이즈(AIDS)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인을 찾아보니 이전에 심장 수술할 때 수혈 받은 피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이 된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에이즈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팬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이때에 언론사에서 애쉬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 중 5백만 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 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 중 5만 명이 리그에 참여합니다. 그 중 5천 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고, 그 중 50명이 윔블던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 중 2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저 홀로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하나님 왜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치료가 불가능한 에이즈에 걸렸다고 해서 ‘왜 나입니까’불평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서 애쉬는 회고록 ‘은총의 나날들(Days of Grace)’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왜 나입니까(Why me)?’라는 반항적인 질문을 나는 한 번도 하나님에게 제기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받는 모든 은총과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리고 내가 받는 모든 고난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 나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참 멋진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지요. 사람들은 잘 나갈때는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해집니다. 그러다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화살을 날리면서 원망을 합니다. 애쉬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며, 주어진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상황과 사건이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잘 나갈 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것저것 가로막히면서 힘들어 질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손길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불립니다. 히브리기자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조상들의 믿음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으려면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믿음을 보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본문을 통해 노아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믿음을 증거 합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줄로 압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정체되지 아니하고 성숙한 믿음이 되도록 우리는 늘 노력해야 합니다.
1.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홍수로 땅을 심판하시고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명령을 합니다. 홍수가 아직 일어나기 이전에 노아는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어 준비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7절 상반절에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노아가 방주는 준비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준비하는 모습을 두고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의 ‘경외함으로(올라베데이스)’라는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존경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노아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거룩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 한 치의 오차나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면서 실행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모습은, 노아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노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진실한 크리스천이라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을 품어도 안 됩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와 그렇지 못한 성도를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 기준입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 생각하면서 살교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면서 받아 들이는 성도는 믿음이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이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존중하면서 그대로 받았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방주가 완성되고 나서 온천지를 뒤 덮는 홍수가 임할 때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가져다 주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인 줄로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역사가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1)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합니다. 하지만 벌이 꿀을 가져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2)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가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미세한 불의까지 갈아 내어 결국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맙니다. 3)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4)하나님이 망하게 하실 때는 교만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멸하려 하실 때는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교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 자랑, 자기의 의, 자기 교만에 빠질 때 개인이나 나라나 문명은 반드시 망하였습니다.”
그는 역사학자이지만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순종함으로 방주를 만들 때,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경고를 우습게 여겼고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낭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순간에 다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습게 여기지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강팍해진 그들의 마음은 무쇠와 같아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돈을 자랑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7절 하반절 다시 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 노아가 받은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 노아에게 어떤 호칭이 주어지나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라져 버리는 돈을 물려받은 상속자가 아닙니다. 권력을 물려받은 상속자도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나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의로움의 상속자라는 놀라운 호칭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는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2.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7절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는 놀라운 복을 받았다는 것을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8절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8절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8절 말씀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최고로 멋진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8절 상반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순종하여”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실 때에 가장 먼저 순종하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을 존중하는 경외함으로 다가가서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를 가진 순종의 모습이었을까요? 여기의 ‘순종하여(휘페쿠센)’인데, “아래에서 듣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래에서 듣는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 저의 설교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경청하는 모습은 내가 상대방 보다 낮은 자세와 위치에 설 때 가능합니다. 나보다 못 배우고 나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의 말이라도 제대로 경청하려면, 내가 낮아지는 자세에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가졌고 내가 너 보다 더 똑똑하니 나는 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깨를 추켜 세웁니다. 상대방 위에서 군림하며 상대방을 내리 깔아 보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은 경청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내가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바으라함의 순종의 모습은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자발적인 것이며, 주저함이 없이 취해진 겸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자신을 낮출 때에 하나님이 그런 성도에게 더 큰 복과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래에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앞만 보고 나아갑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이 불확실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습입니다.
한국 선교 초창기에 선교 활동을 하던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6) 선교사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펜윅 선교사가 한국인 신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무우를 하나씩 주면서 무잎은 땅속으로, 무는 하늘로 향하도록 밭에 심으라고 말합니다. 한국인 학생들은 “선교사가 서양에서 무를 한 번도 심어보지 못했나 보다. 무를 열매인 줄 잘못 알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무를 땅속으로 잎사귀는 하늘로 오도록 심었습니다.
올바르게 심은 것인가요? 아니면 잘못 심은 것인가요? 학생들은 올바르게 제대로 심은 겁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은 무를 하늘로, 무 잎사귀를 땅속으로 심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서양 선교사가 몰라서 그렇게 시킨 것인데, 무식하게 그렇게 심으면 어떡하느냐?”며 핀잔을 줍니다.
그런데 펜윅 선교사는 나중에 전체 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자기가 말 한대로 무를 거꾸로 심은 학생을 칭찬합니다. “내가 무 심는 법을 몰라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얼마나 순종을 하는지,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싶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제서야 그의 말에 순종하지 못한 학생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펜윅 선교사가 조선의 신학생들에게 그대로 적용해 본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나의 의지와 나의 판단과 나의 경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가능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을 꼬집어 말한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은 결과를 알지 못하는 불안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고행을 떠나서 먼 이국만리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면서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에굽으로 내려 가서 정착하였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목자들이 와서 분란을 일으킬 때도 있었고, 조카 롯과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문제로 여러 번 부딪치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라간 자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감사하면서 순종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아브라함을 두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의 저자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 1939~ )은 어린 시절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이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결심할 정도로 증오감을 가지고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생시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증오와 복수와 살인을 생각하던 것이 사랑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꾼 분이 바로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희망이라 고백합니다.
폭염과 무더위 태풍으로 힘든 나날이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시간 가지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8월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