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세례(침례)를 주기 보다는 복음전파에 치중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서 바울이 칭찬하지 않는 의식만의 성만찬은 오히려 해롭습니다.
결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결혼기념일이라 우기면 웃고 말겠지만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 그의 영과 하나가 되어
한 몸이 된 비밀이 없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고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몸을 주신 뜻을 오용하거나 그 몸으로 장난치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몸을 주신 사랑을 심각하게 욕보이는 일입니다.
사실 목사가 말년에 병으로 스러져서 추하게 죽어간다면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들이 중병에 신음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먼저 간 사람도 있고
지금도 그 몸을 가누면서 강단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말로 가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진리의 지식이 짧아 열심히 외치지만 그만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진로를 막는 아말렉과 같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실행할 줄 모르므로 마땅히 멸할 것 중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사울과 같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징계가 없으면 그는 사생아입니다.
고전11: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고 대문자로 시작하는데 그 의미는 지금까지의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내용이 없으면 형식에 참여하지 마라입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성만찬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현하시기 위해 성령이 오시면 자신의
몸을 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죽으심을 계속 기념하는 것은
바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오실 때’가 언제인지 각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원어는 형벌이 있느니라)
만약 주의 영으로 그 분과 하나 되는 내용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성찬의식이 외식이 되고 말기에 차라리 안하면 죄가 아닙니다. 과거에 다른 이의
의료보험카드를 빌려 쓸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그 사람자체 안에 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짜 비표를 달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같은 예입니다.
그래서 28절 ‘자신을 살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롬8:1-11절의 사람인가 확인 곧 시험(도키마조)해 봐야지요(고후13:5, 요일4:1)
고전12:13절 말씀과 같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시인하느냐 입니다.
그래야만 롬12:2절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말씀육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체화가 된 겁니다.
29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충분한 시험을 거친 후에 떡과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된 사실을 말씀을 통해 확신한 다음에
비로소 그 떡과 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 곧 심판을 먹고 마시게 됩니다. 스스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판정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죄이며 판단입니다.
롬2:2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되어 지는 게 원칙입니다.
벧전4:17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이 됩니다.
계17:1 음녀의 심판(크리마)- 양쪽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계20:4 심판의 권세 곧 판단의 권세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입니다.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약한 자, 병든 자, 잠든 자들이 있는데 이는 형벌의 결과를 말합니다.
29절의 스스로 판단 곧 심판이 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실제로 현재 기독교 안에서 약한 자, 병든 자, 이미 잠든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32절에선 이를 두고 징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28절 ‘살피고’(도키마조)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의로 말미암아 영이 산 자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영으로 살리심을
받고 있는지 시험하고, 그 다음에 31절 ‘살폈으면’(디아 크리노) 분별을 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세상 사람인가? 영을 좇는 사람인가? 육신을 좇고 있는가?
요8:15-16절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올바른 성만찬을 위해서는 고전2:15절의 신령한 자의 판단이 필요한 겁니다.
스스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징계입니다(32절)
그래서 만약 자신을 살필 수 없으면 32절의 결과가 옵니다.
주님의 판단아래 들어갑니다. 세상과 함께 정죄(카타크리노)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터득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새 언약을 자신 안에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합당치 않으면 세상과 같아집니다. 히12장은
징계인데 성도들이 히11장처럼 믿음의 삶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징계가 옵니다.
징계는 아들의 대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도망가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징계를 받으면서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사랑하는 아들을
1) 영의 아버지께 복종하게 하여 살리려고(히12:9)
2)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려고(히12:10)
3)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히12:11)입니다.
일차적인 징계는 스스로 판단이 됩니다. 다만 양심의 가책이냐 말씀에
의한 분변이냐? 하는 겁니다. 히12:8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 받는 겁니다.
징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징계를 받고 있으면서 말로 도망을 가는 것이 나쁩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고통과 수욕을 참으셨습니다. 버림의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피할 수도 이길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시고
참으셨습니다(히12:2) ‘십자가를 참으사’ 이건 단순한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전부입니다. 불가지한 고통이며 수욕입니다. 지긋지긋합니다.
욥33:14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고... 잔소리 하듯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잔소리를 징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꿈에서 까지 말씀하십니다.
16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십니다.
17 행실의 꾀를 버리고 교만을 막으시려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19절 이하부터는 병상의 고통과 뼈가 쑤시는 징계를 받습니다.
이와 같은 징계를 거친 후에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합니다. 나요 하고 까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들을 살리시기 위한 징계는 필수과정입니다(히11:9)
그러므로 징계를 참아야 합니다. 말로 까불고 떠들고 피하고 장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상19장의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는 그야말로 동작 그만입니다.
여러 가지 현상이 다 지나간 후에 비로소 천사가 ‘먹어라’ 하는 걸 봅니다.
그러므로 히12:12절에서 징계를 받는 순간은 활동정지가 됨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태풍은 지나갑니다. 다만 그 흔적이 남을 뿐입니다.
만약 이런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징계는 먼저 꼭 말씀을 통한 꾸지람으로 옵니다(히4:12)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근본적이고
근원적 치료를 해야 합니다. 내부수리가 끝나면 바깥의 병도 끝이 납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으나 나중에는 그만 음식을 먹으려고 모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폐단입니다. 그래서 34절 만약 배고프면 집에서 먹어라 말합니다.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판단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교회나 성도가 판단 받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성만찬이 판단 받지 않도록...
그러나 옳은 기준이 없는 사람들의 편견에는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편견은 기준에 의해 다시 판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판단을 받지 마라입니다.
영적인 차원을 어떤 의식이나 제도 안에 가두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어떤 세력의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통해 오직 참 자아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사실 약한 자나 가난한 자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그들의 편을 든다고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약자의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급의 질고에서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그 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창1장에 설계된 인간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성경 전체의 뜻입니다.
첫댓글 아멘!
목사님.
제 여친이 구세군에 소속되어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컴앤씨월드에 올라온 복음을 가지고 소개하면 금방 색안경끼고 보는게 현실 입니다.
그 친구에게 어디서 부터
글을 읽케 할까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제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필리핀 목사들에게 증거하는데 까지
이르기를 25년이 걸렸습니다. 말씀을 증거하면서 제 몸으로 뿜어나오는 생명의 기운
곧 카리스마를 보인거죠. 이는 nonverbal communication입니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물을 때까지
묵묵히 말씀을 증거하는 실력을 보이면서 그 말씀을 몸에 익히는 긴 세월을 인내하면서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먼저는 그리스도를 모신 새언약과 업무수행만을 위한 신앙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보이면서
어느 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때에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권하고 나중에는 히브리서를
권하시지요. 논쟁을 하지 말고 영향력으로 리더를 해 가며 말씀을 증거할 권리를 확보하셔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