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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롯이 분가하다( 이현주 목사님)
한국인의 영원한 숙제
유타 주에서 LA로 이사 오니까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맛있는 자장면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유타에선 한국 스타일의 중국 식당이 한 군데 있었지만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것보다 맛이 못할 정도였다. 거기다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한국인이라면 영원히 풀지 못할 것 같았던 숙제(?)를 깨끗이 해결 받아 더 좋았다. 아예 자장면을 반(半), 짬뽕을 반씩 나눠주는 식당이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지각이 생기는 시기 이후로 죽을 때까지 순간순간 선택과 결단을 요구받는다. 주일날 아침에만 해도 교회에 무슨 옷을 입고 갈까 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나 한창 망설이게 된다. 자장면과 짬뽕 중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정도는 LA 식당에서처럼 한 번에 반씩 둘 다 먹든지, 하루는 자장면 다음 날은 짬뽕을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조금 무리해서 집을 장만했더라면 그것도 이왕이면 오렌지 카운티 쪽에 샀더라면 하고 두고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한 번의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거나 평생을 두고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선택도 많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하느님의 권능과 축복이 따라 주길 소원하며 기도한다. 또 하느님의 뜻이 과연 어느 쪽인지 보여 달라고 간구하여 그 길로 가기 원한다. 불신자 시절에는 자기 기분과 판단대로 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니까 어쩌면 신자의 인생이 더 고달파진 것 같다.
창세기 13장 본문은 신자가 중요한 결단을 할 때에 선택의 기준을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자주 소개 되고 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서 각각 소유가 많아지자 목자들끼리 우물과 초장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어 헤어지기로 했다. 롯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물이 많은 죄악의 땅 소돔을 선택하여 결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외적 조건으로는 척박한 가나안 땅에 남기로 결단하였더니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눈에 보이는 모습대로만 판단하지 말고 죄악을 멀리하며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해야 복을 받는다고 전통적으로 배워왔다. 그런 설명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해석으로선 틀린 것이다. 본문의 경우도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믿음의 본질마저 곡해하게 만들 수 있는 모호한 해석이다. 만약 그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롯이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하느님의 뜻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욕심과 계획만 앞세운 죄인의 대표여야 했다. 반면에 아브람도 세상과 환경은 전혀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 뜻을 잘 분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순종하는 의인의 대표여야 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그렇게 판단할 근거를 제공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다.
롯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칼데아 땅에서 삼촌인 아브람을 따라 하느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길 소원한 자였다. 부친이 죽고 없어서 할 수 없어 따라나섰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는 세상적으로 번영했던 칼데아에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험한 길을 택했던 자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에 그 형편을 살피러 온 하느님의 천사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를 “무법한 자의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1베드2:7)이라고 표현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유추해보자. 삼촌인 아브람이 땅을 택하라고 하자마자 조카인 롯이 ‘옳다구나’ 하고 덥석 비옥한 땅을 선택했을 리는 없다. 아마 여러 번 사양하다가 아브람이 재촉하자 마지못해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절 날 조카들에게 용돈이라도 한 푼 줄 양이면 여러 번 사양하게 마련이다. 그럼 어른 주는 것이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라고 권하고 심하면 야단까지 치며 주지 않는가? 또 롯이 죄인이라면 아브람은 과연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치사하고도 비겁하게 마누라를 동생이라고 그것도 두 번이나 속인 자였다. 또 후손을 얻을 욕심으로 처첩을 둔 자였다.
롯은 선택을 잘못했는가?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롯이 과연 선택을 잘못 했는가이다. 그렇지 않다. 그는 판단을 정확하게 했고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이곳 LA에서 수입이 3천 불이었는데 Las Vegas에서 6천 불을 주겠다는 직장이 나선다면 가지 않아야 하는가? 하느님은 신자가 죄악을 멀리하기를 원하시므로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인 Las Vegas 근처엔 얼씬도 말고 LA 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신자가 하느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사회적인 신분이 낮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황금을 돌같이 여기고 무슨 일에든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현실에서 풍부에 처하든 궁핍에 빠지든 그 심령의 중심이 하느님을 향해 바로 서 있으면 된다.
만약에 롯이 상식적이고도 객관적인 외부적 기준을 전부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척박한 땅을 골랐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우선 아무래도 삼촌 아브람을 배려해서 양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척박한 땅을 고르면 하느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일부러 선택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못하지만 롯이 그럴 정도로 악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롯은 분명 선한 일을 했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선이란 항상 상대적이다. 본인은 삼촌을 위해 희생한 의인이 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삼촌 아브람은 비록 조카가 양보하긴 했지만 좋은 땅을 차지한 욕심쟁이가 되어버린다. 당나귀를 몰고 장터로 가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말을 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우화를 생각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절대적 선이신 하느님을 판단의 근거로 삼지 않는 인간 사회의 선은 어차피 완전한 선이 되지 못한다.
물론 만약 롯이 그 자리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하느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고 그렇게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아니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생각하듯이 하느님은 손해를 감수하는 자에게 나중에는 어떤 형태로든 그 손해를 보상해주신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선택했을 수 있다. 이 경우도 역으로 따지면 아브람은 그런 믿음에 바탕을 주지 않은 선택을 한 셈이 되지 않는가? 결과적으로는 롯이 삼촌더러 하느님의 벌을 받거나 최소한 은혜를 받지 못하게 만든 꼴이다.
롯이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여 외적으로 풍요한 길이든 궁핍한 길이든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따르면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삼촌 아브람과 동일한 문제로 연관되어 선택을 할 때는 우리가 배워온 단순한 믿음의 공식만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따르는 일을 그리 간단히 볼 것이 아니다.
롯이 땅을 선택한 실제적인 근거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양 떼를 잘 키워서 번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물과 풀이 풍부한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의 선택은 아주 합당했었다. 신자라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느님이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으로 다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 찬양과 기도에만 전무하여 언제나 은혜 받은 표정을 지으며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현실의 온갖 자질구레하고 복잡한 일들과 씨름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를 아주 조금씩 맛보는 아주 힘든 싸움이다. 또 그런 힘든 싸움을 언제 어디서든 잘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께서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라는 온전한 믿음과 소망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질구레한 싸움을 잘하기 위해선 신자도 현실적인 기술, 지식, 신용, 예절 등에서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앞서도록 최선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또 실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브람은 선택을 잘했는가?
설령 전통적 해석대로 롯이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 죄악의 땅인 소돔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잘못 선택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선택한 것인가?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믿음이 좋아서 가나안 땅에 남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0절) 무슨 뜻인가? 아브람이 선택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겠다는 것은 좌우 어느 쪽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만약 롯이 끝까지 삼촌에게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 가나안을 고집했더라면 아브람은 소돔 땅에 갈 수밖에 없었고 또 갈 용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 아무 선택을 하지 않은 대신에 선택권 자체를 롯에게 양보했다. 그 땅에 물이 많고 적고에 연연하지 않고 어느 땅이든 기꺼이 가서 살겠다는 것이다. 척박하지만 죄가 적은 가나안 땅에만 하느님이 있고 물이 많지만 죄 많은 소돔에는 하느님이 없는 것도 아니요 물론 그 반대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브람이 원래 성격이 겸손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적은 의인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지금 땅을 나누고 서로 헤어지는 이유 자체가 무엇인가? 소유는 많은데 비해 좋은 초지와 우물이 부족해서다. 양 떼를 잘 키워 증식시키거나 최소한 유지하겠다는 목적이지 않는가? 양 떼가 죽더라도 삼촌과 조카 사이에 다투지 말고 함께 사이좋게 지내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자는 것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아브람은 외형을 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만 바라보며 가나안 땅을 선택하여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신자는 죄악의 땅을 멀리해선 안 된다. 죄악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죄의 힘을 쉽게 이길 자는 드물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변화시키려 들어선 안 된다. 신자는 악한 것은 무엇이든도 멀리해야 한다.(1테살5:22) 대신에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에 의지할 수 있기에 죄악의 땅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신자는 죄악의 땅을 변화시키는 일은 기도로 오직 하느님께 의탁하여야 하고 본인은 최소한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롯이 잘못한 일은 소돔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소돔 땅에 들어가 의인답게 살지 못한 것이다.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자기 삶으로 증거하지 못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사실은 롯이 처음부터 소돔 땅을 덥석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요르단 온 들을 택했다. 그러다 차츰 시일이 흘러 소돔 땅으로 옮겨 갔다.(창13,11절) 그리고 소돔을 멸하시기 전이라고 했으므로 소돔 자체도 죄악이 완전히 관통하기 전이었을 수 있다.(창13,13절) 따라서 땅을 선택할 때만 해도 그는 소돔에 갈 의향이 없다가 점차 들판보다는 평지 성읍의 생활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소돔 땅에 들어가서도 그 땅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땅의 죄악과 타협하거나 눈 감고 살았던 것이다.
신자는 얼마든지 Las Vegas에 가서 살아도 된다. 죄악의 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또 LA라고 해서 죄악이 Las Vegas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다는 법은 없다. 불신자들이 살고 있고 사탄이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 어디에도 죄악은 들끓게 마련이다. 가는 곳마다 다 죄악의 도성이지 따로 구별된 곳이 없다.
아브람의 믿음
본문에서 아브람이 하느님의 뜻을 미리 분별하여 그 뜻대로 순종한 일은 없다. 반면에 온전한 믿음으로 행한 일은 있다. 외면적으로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사실은 하느님께 그 선택을 완전히 위임한 것이다. 하느님이 함께 하면 광야도 옥토로 변하지만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옥토도 광야로 변한다는 것만은 철저하게 확신했다.
따라서 본문에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잘 분별할 수 있었는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답은 오직 하나다. 그가 이전에 겪었던 처절한 실패 때문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지시한 땅에 도착한 초기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다 점차 광야의 장막 생활에 싫증나기 시작했고 또 기근이 닥치자 물과 식량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갔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갔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살이 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창12:7-10).
그런데 이집트에 가까이 가자 아름다운 아내 사라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염려가 들이닥쳤다. 그래서 사라와 공모하기를 이집트 사람들한테 아내 대신 여동생이라고 속이기로 했다.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뺏어가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예상한 대로 사래는 이집트 왕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어가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간섭으로 아브람은 아내를 되찾고 또 많은 은금을 얻어 소유도 더 풍부하게 되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뜻은 전혀 묻지 않은 채 도덕적으로 말도 안 되는 치사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람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하느님은 그 비겁한 아브람을 끝까지 붙들고 계셨다. 그것도 당신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떠난 적이 한 시도 없었다.
아브람은 당시의 최고 강국인 칼데아 우르에서 편안하고 화려한 도시 생활을 즐겼던 자다. 비유컨대 인생의 황금 시절을 온갖 재미를 만끽하며 서울에서 보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하느님은 나타나셔서 세상 모든 재미를 다 버리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서 화전민이 되어 이곳저곳 유랑하라고 했다. 하느님으로선 이 땅은 잠시 지나갈 곳이요 영원한 거처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는 뜻이었다. 가나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며 옮겨 다니되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어떤 기근이 닥쳐도 반석에 생수를 내어서라도 지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모든 나라들에게 자기가 체험한 그런 하느님의 복을 나눠주는 근원으로 살라고 했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브람은 광야 생활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체면 때문에라도 떠나온 칼데아 우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대신에 당시 칼데아와 맞먹는 대도시 이집트에 흥미가 슬슬 동했다. 성경은 기근이 오기도 전인데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9절)고 기록하고 있다. 남방은 지금 네겝 사막인데 그야말로 물이 없는 광야로 가나안 보다 훨씬 척박한 곳이다. 기근이 오기 전인데도 그런 곳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본심이 이집트로 향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침 울고 싶던 차에 누가 뺨을 때려 준다고 기근이 닥쳤다. 하느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하려 기근을 보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집트로 지체 없이 넘어갔다. 성경은 “아브람은 이집트에 몸 붙여 살려고”(공동번역,창12;10)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잠시 기근 동안에만 피신하러 간 것이 아니다. 몸 붙여 살려는 것은 그 땅에 시민권은 없지만 영속적으로 머물며 사는 것을 뜻한다. 여차하면 이집트에서 살겠다는 뜻이었다.
하느님으로 봐선 최초로 믿음의 백성으로 세운 자가 완전히 당신의 뜻을 배반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다시 붙들어 세웠다. 저승에 내려가도 하늘에 올라가도 하느님이 택한 백성은 당신께서 다시 그 품 안으로 불러들이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반드시 당신의 지팡이로 안위하셔서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게 해 주신다.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그 은혜를 정말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물이 적고 척박한 곳에만 하느님이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땅 같이 당신을 모르는 죄악의 땅에서도 자기를 보호해 주신 그분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난 것이다. 좌든 우든, 물과 풀이 적은 가나안 땅이든 풍부한 요단 들판이든 하느님은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리라고 담대하게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삼촌으로 행할 수 있는 우선적 선택권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드렸다. 또 그렇게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했다는 도덕적 우월성이 개입될 소지라고는 한 치도 없었다.
하느님은 점쟁이가 아니다.
신자들은 자꾸만 좌로 갈까요 우로 갈까요 물으면서 기도한다. “하느님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서 따르겠다는 선한 순종의 의사와 각오를 앞세운다. 그러나 솔직히 하느님이 좌로 보낼지 우로 보낼지에 그 방향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을 점쟁이로 대우하는 셈이다.
좌우 어느 쪽인지 방향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어느 쪽이 성공 가능성이 많은가, 어느 쪽이 형통하겠는가를 물은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님이 물과 풀을 풍부하게 주실지만 알고 싶은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서도 사실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에만 마음이 쏠려 있다. 하느님 당신을 따르는 것은 뒷전이다. 아니 하느님 당신의 뜻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구체적인 방향에 관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때가 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베푸실 은혜에 관심을 두는 것과 하느님이 나에게 정작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르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라. 하느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안 주실 리가 있는가? 좌로 가든 우로 가든 하느님이 떠날 리도 없고 보호해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럼 하느님이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지 또 어떤 은혜를 주실지 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의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이 자기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 순종할 각오와 헌신이 완전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분의 뜻을 묻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서 순종하겠다는 것은 천양지차이가 있다. 전자는 우로 가든 좌로 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단지 우면 우, 좌면 좌로 빨리 알고 싶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인도만 해주시면 그에 맞게 준비하고 반응하겠다는 것이다. 좌우의 선택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성실하게 충성하는 일만 남았다.
반면에 후자는 여전히 좌우가 문제다. 자기가 선택하기 힘드니까 하느님더러 선택해 달라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마음에 안 들면 순종하는 것을 재고해 볼 수도 있다는 주저함이 깔려 있다. 그런 자에게는 하느님은 더욱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으신다. 좌우든 무조건 따르겠다고 하는 자에게만 좌우 중에 하나를 보여줄 뿐이다.
아브람은 좌가 되던 우가 되던 하느님께 온전히 맡겼다. 하느님이 어느 쪽으로 인도하던 그 쪽으로 가겠다는 차원조차 넘었다. 그에게 방향은 이미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좌우 어느 쪽이든 하느님이 나를 놓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자기도 그분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완전히 순종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자에게 방향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느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자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가이다. 신자가 하느님이 기뻐하는 자가 먼저 되어 있으면, 자연히 하느님이 기뻐하는 일도 하게 된다. 하느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만 하느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란 택함을 받을 때부터 하느님의 자기를 향한 영원한 기뻐하심에 이미 들어간 자다.
신자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가, 전 삶이, 전 인생이 하느님이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셔서 완전히 하느님의 것으로 바뀌기만 소원하면된다. 신자가 가는 길이 좌우가 될지 결정하는 이는 오직 하느님 한 분이다. 하느님이 신자가 어떤 일을 할지를 책임져 준다면 신자는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물 좋은 곳만 찾는 신자들
롯은 자기 나름대로 분명히 합당한 선택을 했다. 신자라도 하느님의 분명한 계시가 없다면 객관적인 조건이 좋아 보이는 곳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선택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싫어하는 바도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롯도 아브람과 똑 같은 잘못을 범했다. “롯은 요르단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다.”(창 13,11절) 그도 도시 생활에 미련을 못 버리기는 아브람과 마찬가지였다. 평지 성읍들 즉 작은 도시에서 생활을 하다가 점차 가장 큰 성읍 소돔까지 옮겨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건대 그는 처음부터 죄악의 땅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물과 풀이 풍부한 요르단 온 들판을 택했다. 또 그런 선택을 했을지라도 그 들판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절대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만 의지해야 하는 광야의 장막 생활에 싫증이 나서 사람들이 이뤄놓은 문명을 즐기려 도시 생활을 찾아 갔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 앞에 서 있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사람의 하나로 서있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가 좌우를 선택한 것이 그의 운명을 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그를 멸망으로 이끈 것이다.
반면에 아브람도 동일한 잘못을 범했지만,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 피신에서 겪은 고난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다. 그가 이집트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롯과 땅을 나누고 헤어지는 일이 생겼는데, 하느님은 신자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신자의 신자 됨 즉, 그 중심을 먼저 보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낀 직후라 선택권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선 이젠 어느 땅에 가든 하느님만 함께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한 것이다. 만약에 정말로 하느님이 좌하라고 했다면 물론 아브람은 끝까지 좌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다는 증거다.
나아가 그는 현실적으로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느님이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언제 어디서든 상대더러 먼저 선택하라고 담대하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다.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진실로 확신하는 자는 현실의 삶에서 얼마든지 담대하게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법이다.
반면에 롯은 어떠했는가? 아직 그의 인생관을 바꿀만한 고난의 체험이 없었다. 물론 아버지를 일찍 여원 아픔은 있었지만 그럴수록 삼촌 아브람을 아버지 대신에 따랐다. 지금껏 그는 하느님과 직접적인 일대일의 개인적인 교제가 없었다. 삼촌이 가자고 하면 가고 있자고 하면 있었다. 지금도 먼저 선택하라고 하니 선택한 것뿐이다. 몸은 비록 가나안 광야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광야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삼촌 아브람에게(인간), 들판의 물과 풀에(물질), 나아가 도시의 문명 혜택(주위 여건)에만 자기 안전과 만족을 걸었다.
아브람도 이집트로 문명의 혜택을 찾아 나섰지만 문명이 자기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지켜주심을 체험했다. 화려한 도시에나 황량한 광야에서나 동일한 하느님이 계심을 발견했다. 하느님이 인생에 기근을 비롯하여 온갖 고난을 허락한 이유가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라는 것임을 알았다. 또 그런 소망을 키우기에는 광야에서의 나그네 생활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어디에 물과 풀이 풍부할지를 하느님에게 물어 답을 얻는 능력을 믿음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세상에 물이 많고 적음에 그저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믿음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이 매 순간 바로 곁에서 동행하고 있음을 언제 어디서든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신다. 좌우 중에 어디로 가야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신자들이 좌우 중에 어느 쪽이 하느님께 더 영광이 될까 고민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디로 가야 자기에게 유리할까 저울질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간의 교제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식의 믿음이 작용되긴 마찬가지다. 좌든 우든 자기가 먼저 혹은 유리한 쪽을 선택해야 불안하지 않다. 겉으로는 성경대로 서로 관용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식이나 배우자가 또 직장 동료가 조금이라도 눈에 어긋나면 용서는 뒷전이고 당장에 판단하여 정죄한다. 좌와 우 둘 중에 자기는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고 그들은 롯처럼 죄악의 땅을 선택한 양 몰아부친다.
설령 다른 사람이 고의로 소돔 땅을 택했다 하더라도 신자는 그래선 안 된다. 진짜 아브람처럼 좌든 우든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 자식이 잘못해도, 배우자가 마음에 거슬려도, 회사 직원이 손해를 끼쳐도, 교회 성도가 죄를 지었어도, 좌우의 판단은 오직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서 진짜 그들이 잘못했다면 하느님이 그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만약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길 기도해야 한다.
이 사건 뒤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너희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낳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13:14-18)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남게 되자 하느님은 그의 후손이 수도 없이 많아지고 또 보이는 땅을 다 차지할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주셨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가나안 땅을 선택했더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좌든 우든 어디로 가든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한 것뿐이다. 신자가 종으로 가든 횡으로 행하든 하느님이 동행하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데 그 땅을 차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는가?
신자가 하느님께 계시를 받아 그 계시대로 잘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매사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신령한 신자는 거의 없고 또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지도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담대하게 서 있으면, 그가 겪는 어떤 일에서나 하느님이 보호하시고 승리케 해주신다. 신자는 좌로 가야할지 우로 가야할지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어디서나 신자답게 살면서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를 통해 증거되기를 전 존재와 삶과 일생을 걸고 소원하면 된다.
요컨대 자기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즉 맞바꾸어서라도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의 흑암의 세력들 앞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이 그렇게 안 해주시겠는가 말이다. 또 그런 사람에게 좌든 우든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종과 횡을 행할 때에 어떤 악한 세력이 감히 틈탈 수 있겠는가? 위대한 신앙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런 자가 신자이자 신자가 가진 특권이라는 것이다.
출처:‘왜 오직 예수인가?’블로그,2006년 10월 18일
*게시자, 엠마오:일부 신교용 성경 번역은 가톨릭 새성경 번역으로 고쳤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