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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 가까운 것, 작은 것, 하찮은 것
무엇을 쓸 것인가?
파울러라는 한 미국 작가는 글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 (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건,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게 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부분²⁴
서정시로는 매우 긴 편에 속하는 이 시중에 나는 이 부분을 유독 좋아한다. 속눈썹에 걸린 눈과 붉은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하얀 눈은 시인의 경험적 발견이 없이는 이렇게 생생하게 재현될 수 없다.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 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 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
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
다면 어찌 문 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²⁵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는 말도 했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두자.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밎은 암소가
수령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이정록,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전문 ²⁶
이 시는 시적 대상을 오래 들여다본 결과물이다. 논을 갈던 암소가 고개를 꺾을 때 생기는 목주름과 노인의 이마 주름의 대비, 소의 굵은 눈망울과 젖은 해 두 덩이의 비유가 더없이 적절하다. 이러한 관찰이 시적 기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말 없는 짐승과 인간을 한 식구로 동일화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인이 대상을 오래 들여다본 만큼 당신도 이 시를 오래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이 시에서 시간의 유한성과 삶의 무상을 함께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당신은 이미 훌륭한 독자다.)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엇을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 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 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 원이다. 당신도 최영미처럼 나는 내 시에서/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詩」)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 독파에 연연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 ²⁷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님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이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단 한 번도 목욕탕에 가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목욕탕에 갈 때마다 부자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등을 바라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원망도 했다. 아버지는 늙었고, 어느 날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병원 욕실에서 늙은 아버지를 씻겨드리다가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낙인처럼 박혀 있는 지게자국을 보고 말았다. 시인은 그 지게자국을 보고 울컥, 하는 사람이다. 손택수의 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길어온 길 끝
적막하니 적막한 능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부분²⁸
박미라는 『치유하는 글쓰기』(한겨레출판, 2008)에서 이른바 '미친년 글쓰기'를 주창한다. 미친년 글쓰기의 전제는 '상처를 통해 이야기하기, 흉터를 감추지 않고 말하기, 자신이 미쳤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이다. 내 속에 숨은 광기를 끄집어내는 것, 즉 시작이란 광기의 언어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광기를 샅샅이 검색하라. 그리고 드러내어라. 미셸 푸코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광기는 가두고 감추는 게 능사라는 게 통념이다. 그러나 가두고 감춤으로써 오히려 광기를 지닌 대상을 심각하게 왜곡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당신의 상처와 흉터와 광기와 결핍과 불행에 주목하라. 시를 쓰는 동안은 당신이 받은 훈장과 상장을 반납하고, 행운과 행복과 영광을 외면하라. 당신이 자랑하고 싶은 것들과는 이별하고,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것들과 손잡고 결혼하라. 당신이 두고두고 치욕스럽게 여기는 것, 감춰 두고 싶은 것, 그래, 그것을 꺼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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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창비, 1998, 12-17쪽.
25 이정록 홈페이지(http://www.lecjeonglock.com) 참조.
26 이정록 『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 107쪽.
27 김상욱,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 우리교육, 1998, 228쪽.
28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창비, 2003, 30 31쏙.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4. 10. 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