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순 제4 시조집, 『그랬었지』, 책만드는집, 2015.
□ 경북 안동 출생, 1985년 《시조문학》 현상 공모에서 「서동이후」가 장원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시조집 『서동이후』, 『초록시편』, 『생수에 관한 명상』, 『그랬었지』
<시인의 말>
네 번째 시집을 엮어 낸다.
정제된 형식의 아름다움에 혹해
시마詩魔 속에서 30여 년,
더물어 교직 40년을 뒤돌아보며……
그랬었지
어머니는 이발사였다 그것도 무면허였어
사 남매 앉혀놓고 밀어대고 싹둑 자르고
면도야 하기나 했나 툭툭 털면 그만이지
색 바랜 보자기 한 장 패션인 양 두르고
졸다가 털 뽑힘에 얼른 몸을 추스르면
빙그래 웃으시면서 “괜찮아 다 됐어”
수정사水淨寺의 가을
한 번쯤 가볼 일이다 물 귀한 수정사에
제멋에 굽은 기둥 격외格外를 가르치는데
여태껏 버거운 삶도 한켠에 짐 내리고
흘림체 현판마저 독경으로 젖는 시간
한 바랑 여린 햇볕 보시인 양 따사롭다
버리고 또다시 얻는 마음 환한 가을날
작은 해 한 마리
-노랑눈썹솔새
아침 신분 한 귀퉁이 솔새가 날아왔다
삼천 리 길 날아온 믿기지 않은 작은 몸
핑계만 들끓는 세상 지면에 바람 일다
□ 백 원짜리 동전 무게(6g)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전남 신안군 흑산도까지 무려 1550km를 날아옴.
가을 언덕
그냥 둬도 괜찮을 걸 툭 하고 건드린다
투정끼 많은 바람 휘저어 풍경 만들 즈음
잘 익은 상투감 하나 고요를 깨는 오후
비어 있어 더 좋은 하늘은 강이 되고
일상에 물든 애증 헹궈서 띄워보면
저무는 가을 언덕에 벌써 앉은 별 하나
저녁놀
서러운 무명 화가 뜻 모를 화폭 같은
앳된 스무 살 처녀 당돌한 두 볼보다
얼씨구 무릎을 탁 칠 한 구절 절창 같은
만대루晩對樓 혹은 병산屛山
몸 풀린 강물 따라 놓친 시간 찾는 걸음
병산을 마주하고 한 생生을 읽습니다
뜨락의 백일홍 꽃잎 촛불인 양 밝힌 오늘
무언가 꽃피우긴 계절도 힘겨운 시간
못 미더운 한세상 자책하며 살아왔지만
버려라 집착의 큰 병 깨치는 푸른 절벽
<해설>
사물과 기억을 결속하는 존재론적 성찰의 언어
강인순의 시조 미학
유성효(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1.
시조에 요청되는 현대성 역시 형식을 확장해가는 것보다는 해석의 새로움과 세련된 시정신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별히 시조 중장에서 의미를 확장하였다가 종장에서 시상詩想을 수렴해 들이는 기율만큼은 섬세하게 지켜져야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시조를 읽을 때도 현대 자유시가 잃어버렸거나 지워버린 것들, 가령 정격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하게 변형된 율격, 시상의 견고한 안정성, 우리 것에 대한 새삼스런 발견 등을 시조가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 지평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시조는 현대인의 삶을 내용으로 하되 시상의 완결성과 율격을 구심적으로 지키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3.
원래 ‘기억’이란 주체의 창조적이고 조절적인 기능으로서, 통일되고 일관된 주체의 구조를 드러내는 기능을 떠맡는다.
또 우리는 기억을 거치지 않고는 주체를 경험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기억은, 일상을 규율하고 관장하는 합리적 운동 형식이 아니다. 마치 고고학자의 시선처럼, 현재의 지층 속에 있을 법한 과거를 재현하고 그때의 한순간을 정서적으로 구성해내는 힘을 뜻한다. 그래서 기억은 동일성의 감각에 의해 구축되는 시적 언어의 구성 원리가 된다. 기억 또는 회감回感의 원리가 서정시의 핵심이라는 슈타이거 E.Sytaiger의 전언을 우리가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강인순 같은 엄연한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강인순 시편은 기억을 통해 자아를 회복하려는 욕망과, 그 기억 속에 각인된 공동체적 가치를 현재 삶에서 회복하려는 열망을 동시에 숨기고 있다. 이는 여전히 그의 시편들이 삶의 긍정적 가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이번 시집이 더욱 깊이 있는 세계로 전이해가는 단계에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4.
물론 ‘시인’이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강렬한 빛으로 남은 생을 쏘며 살아가는 존재인다. 하지만 좋은 시인은 개체적 기억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 가운데 존재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열려 있게 마련이다. 경험적 직접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기억의 현재적 구성력과 삶의 보편적 형식에 두루 민감한 것이다. 강인순 시학의 미덕이 또한 여기에 있다.
햇감자 볕에 익어 서럽게 푸른 봄날
조탑길 삼십 리 길 낮달 따라 뚜벅뚜벅
끈 놓친 종소리 여태 처마 끝 내리는데
이승의 종소리가 궁금키나 할는지?
때 묻지 않은 한 생生 긴 그림자 서성이는
빌뱅이 작은 언덕이 또 그렇게 저무는 날
-「조탑리에서 –권정생」 전문
‘권정생’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삶의 가치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동화 작가이다. 이러한 타자지향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그의 마음은 시인 강인순이 지향하는 것과 닮아 있다. 그가 살던 조탑리에서 강인순은 권정생을 닮은 “햇감자 볕에 익어 서럽게 푸른 봄날”을 맞고 있다. 권정생이 평생 잡았을 종의 맑은 소리는 어느덧 끈을 놓친 채 처마 끝에 내렸는데, “때 묻지 않은 한 생生 긴 그림자”가 그때 순간적으로 살아오는 것이다. 빌뱅이 언덕이 저물어가는 날에, 강인순 시인이 가 닿은 심미적인 지경地境은 더없이 처연한 소멸의 미학인 셈이다. 그렇게 권정생이라는 따뜻한 상징에 기대어 강인순 시인은 “다 비워 무거운 빈집”(「비우다」)에 가득한 햇살을 받아안으면서, “누군들 희지 않고 오롯이 살아가실 // 시샘도 부끄러운 온전한 삶이기를”(「마라도의 바람」)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강인순 시인에게 시 쓰기의 길이란, 실존적 결핍과 부재를 채워가는 상징적 과정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가 기억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미학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강인순 시편은 오랜 물리적 경험을 구체적 감각으로 되살려 ‘충만한 현재형’으로 만드는 일에 골목하고 또 그것을 성취한 사례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 점에서 그의 시편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슬러 현재현을 되살리는 전형적인 세계로, 이성적 논리를 포섭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기억을 보여주는 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길’은 삶의 과정을 함축하는 오래된 상징이다.
주지하듯 시조의 미학은 고전적인 것이자 민족적인 것이다. 최근 쓰이고 있는 시조들 역시 이러한 고전적이고 민족적인 동일성 원리에 원천적으로 기대고 있다. 물론 이는 시조가 고전적 정형 양식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빈번하게 발견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균열에 눈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일정하게 인식과 표현의 단면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시조의 단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이는 우리 시대의 현대시조가 치르고 있는 존재론적 명암일 것이다.
강인순 시인은 이러한 동일성 원리를 추인하면서도 다양한 서정의 계기들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그는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도 거기에 자신의 삶의 태도를 덧입히고 있고, 오랜 시간을 탐구하면서도 원초적인 근원을 상상하고 있으며, 사물의 안팎에 새겨져 있는 기억의 흔적을 거스르는 방법을 통해 다양한 서정을 생성해낸다. “무릎을 탁 칠 한 구절 절창 같은”(「저녁놀」), 사물과 기억을 결속하는 존재론적 성찰의 언어를 풍요롭게 보여준 이번 시집은 그래서 더욱 가멸차고 융융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세계에 동참한 우리는 강인순의 다음 시집에서 더욱 심원한 통찰과 사유가 착색된 우리 정형 미학의 한 정화精華를 만나기를, 마음 모아 희원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