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영감이 빚어낸 영속성
영감과 섬광(光)
계간 《디카시》가 통권 30호를 맞는다는 반가운 소식! 30년은 한 세대의 경과를 말하는 시간이요,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는 모든 준비와 수행의 기간을 마치고 하나의 인격으로 책임 있는 역할을 시작하는 시기를 말한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삼십세에 자립하였다 하여 이를 '이립(而立)'으로 호명했다. 계간 《디카시》 또한 그렇다. 30권의 디카시 전문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하면서 그동안 그 토양이 굳건해지고 줄기가 튼실해지고 잎과 꽃이 풍성해졌다. 이제는 알차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을 차례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디카시에 관한 통상적인 축하와 격려 보다. 지금까지 함께 하면서 느낀 창작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그 소임을 대신하려 한다. 좋은 디카시를 생산하는 첫 번째 관건은 좋은 영상의 포착이다. 어쩌면 이는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대하고 끈기 있게 사물을 관찰하는 동안 은혜로운 선물처럼 주어질 수도 있다. 대략 구색을 갖춘 평범한 영상은 값이 없다. 놀랍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예술지상주의의 권면처럼 그와 같은 영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음 영상을 찾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두 번째 관건은 그 영상과 화학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몇 줄의 시적 문장! 곧 촌철살인의 감각을 자랑하는 문자의 부가다. 어쩌면이 시는 한두 행으로 충분할 수 있다. 우리 고전 문학의 단시조나 일본의 하이쿠가 여기에 참고가 될 수 있겠다. 문자 자체의 울림이 미약하거나 영상과 상호 조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언어의 표현을 강구해야 한다. 문자 시의 전통적 세계에서 위명(偉名)을 얻은 시인들이 언어의 조탁에 기울이는 열정과 고투를 생각해 보자. 한 행 한 어휘를 얻기 위해 온 밤을 밝힐 수도 있다.
어느 시인이 하이쿠를 번역한 시집에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표제를 붙였다. 매우 정제된 문면이 아니면 디카시에 있어서도 서너줄을 넘어가는 것이 중언부언이나 췌언의 연속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카시인 동류 간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살려,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디카시는 시인의 창작 역량과 노력에 영감을 더하고 섬광(光)의 시간이 함께 작동하는 예술 형식이다. 우리는 이를 이 영상문화 시대를 견인하는 새로운 문예 장르라고 보는 것이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4. 10.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