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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역 행사 & 축제홍보 스크랩 송설헌 이야기(장수면 화기리)...
권화자 추천 0 조회 120 11.01.01 19:2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송설헌 이야기

 


 

 

 

 

 

 

 

 

 

 

 

 

 

명 칭 :  송설헌(松雪軒)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18
(원소재지 : 예천 화장.  현 : 문경시 산북면 화장리)
건 축 주 :  장말손(張末孫, 1431~1486)
소 유 자 :  장덕필(관리자 : 장덕필)

건축 이야기
영주 인터체인지에서 장수면 방향으로 내려서면 바로 영주도로공사 표지판을 볼 수 있고, 그 진입로에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8호인 ‘장말손유물각’ 표지판이 눈에 뜨인다. 화기리, 즉 꽃게 표지판을 따라 국도 아래를 통과하면 나지막한 야산으로 에워싸여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한 자연경관이 펼쳐지면서 몇 호 안 되는 가구와 달리 고풍스러운 건물 몇 채가 눈길을 끈다. 바로 장말손 유물각이자 연복군 인동장씨종택이다. 송설헌은 그 종택의 200미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건축 배경
장응신의 손자인 장언상(張彦祥)은 영주 장수면 꽃게[花岐]에 터전을 열어 지금까지 종택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원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은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옮겨 중건하였다.

현판
송설헌(松雪軒)
푸르고 푸르면서 우뚝한 것이 소나무[松]이고, 희면서도 차가운 것이 눈[雪]이다. 솔에 눈이 지나가면 곧고 굳은 절조가 드러나고, 눈이 솔과 만나면 그 흰 자태가 더욱 드러난다. 그 고결함은 주인의 풍격과 마음을 상징한다.
송설헌중건운(松雪軒重建韻)
후손 장복안, 이만규, 유응목, 후손 장경문의 7언 율시 4수(1899년)가 있다.
송설헌기(松雪軒記)
권세연이 1911년에 썼다.
송설헌후지(松雪軒後識)
김흥락이 1911년에 썼다.
송설헌이건기(松雪軒移建記)
장사식이 1973년에 썼다.

 

누정 이야기
- 영주 화기리와 송설헌


그러면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하여 자손이 오래도록 번성할 수 있게 하라는 조상의 뜻을 지켜온 그 산세를 한번 살펴보자.


화기리 인동장씨 마을은, 장수면 소재지 반구(盤邱 : 일명 반두둘)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 남짓 되는 거리에 있다. 용암산(龍岩山)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엎드렸다 일어서기를 거듭한 산세는 동남으로 수 십리를 뻗어내려 곱게 일으킨 기산(岐山)으로 이어진다. 기산 앞자락에 자리 잡은 화기리는 동쪽으로 연화산(蓮花山), 서쪽으로 주마산(走馬山)·황구산(黃龜山)을 안대(案對)로 하며, 남쪽으로 멀찍이 학가산(鶴駕山)의 연이은 봉우리들을 늘어세우고 있다. 고택과 들녘의 논밭이 있는 마을을 둘러싼 산들은 한결같이 나지막한 야산 구릉들이다.


마을 앞으로 동서로 길게 펼쳐진 들판은 용암산에서 근원한 옥계천(玉溪川)이 들 복판을 누비며 기름진 농토를 이루고 있다.


화기리는 원래는 화계(花溪), 즉 꽃이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는 조화로운 이름을 가졌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물을 뜻하는 ‘溪(계)’를 ‘岐(기)’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문전옥답이 소담하게 펼쳐져 있고,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고속국도가 지나가는 마을치고는 번다한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도록 야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종택의 터를 보면, 다시 한번 조상의 뜻을 지켜 면면히 이어온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문경 땅인 당시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을, 지금 있는 영주 장수면 화기리에 옮겨 온 내력에 대해서는 김흥락이 ?송설헌후지(松雪軒後識)?에 밝혀 놓았다.


안양(安襄) 장말손 선생은 문무의 재주를 겸하여 훌륭한 업적과 공훈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겼지만, 이런 일은 선생에게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선생은 오히려 당시 덕망 있는 학자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이름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 어진 선비들과 도의로 사귀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그 학문으로 추중(推重)되었다. 나중에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 이름을 드러냈으나 선생이 좋아하는 바는 학문에 있었지 훈공으로 이름을 구함에 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영달에 초연하여 아직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며 지냈다.


선생의 옛집은 예천 화장(花庄)에 있었는데, 그 집을 송설헌(松雪軒)이라 이름지었던 것을 이제 영주 화기리에 옮기고 옛날 이름을 그대로 취한 것은, 선생의 후손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나온 탓에 자세한 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선생이 허다한 자연물 가운데 유독 소나무[松]와 눈[雪] 두 가지를 취하여 편액(扁額)했던 뜻을 알 만하다. 그것은 가을이 되어 다른 나무의 잎들이 다 시든 후 맨 나중에야 시드는 소나무의 꿋꿋한 절조를 본받고자 함이었고, 희고 깨끗한 눈의 더럽히지 않는 뜻을 좋아했기 때문이리라.


장말손 본인이 취한 자호 송설헌 편액은 지금도 고택 뒤 정자에 의연히 걸려 있다. 세월의 빛바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송설헌처럼 해마다 봄이 되면 솔이 새 잎을 피어내어 사시사철 푸르고, 눈은 매년 겨울 세상의 혼탁함을 하얗게 덮어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여전하다.

화기리 인동장씨 종택 안의 장말손유물각에는 연복군 장말손이 받은 백?, 연복군유물, 고려시대의 고문서 등 많은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관련인물
- 영주 화기리에 터를 잡은 인동장씨


인동장씨가 영주지역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종 때 장응신(張應臣) 형제에서 비롯되었는데, 장응신은 연복군 장말손의 손자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장말손은 당시 대학자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유명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과 교류한 바 있는데, 김종직과는 사마양시 및 문과에 함께 급제하였으며, 홍귀달과는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한 바 있다. 그래서 장말손이 예천, 즉 당시 문경 땅을 은거지로 택하여 정착하게 된 것은 문경 사람인 홍귀달과의 우의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선생이 은둔생활을 하다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는 예관을 보내 애도하고,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말손의 손자 장응신이 영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순탄치 못했던 어린 시절과 유관하다. 장말손의 장남 장맹우(張孟羽)는 황해도 도사로 나가 있던 중 41세로 병사하여, 그 아들 장응신이 12세 어린 나이에 갈 곳 없이 되었다. 그 재주를 가상히 여긴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영주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응신마저 31세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의 후손들에게는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여 지내며 남 앞에 나서지 말라.”고 유언을 하여,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은 지금의 꽃게에 터를 잡고 4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응신의 손자인 장언상(張彦祥)이 명종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는, 영주 장수면 꽃게[花岐]에 터전을 열어 지금까지 종택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원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은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옮겨 중건하여 보존되어 있다.

송설헌 장말손선생

성명 : 장말손(張末孫) , 1431(세종 13)년 ~ 1486(성종 17)년
본관 : 인동, 옥산(仁同, 玉山)
: 경윤(景胤)
: 송설헌(松雪軒)
시호 : 안양(安襄)
출생지 : 인동(仁同) 발영전리(拔英田里)
출신지 : 인동 예천(醴泉)
분묘지 : 예천 호명산(虎鳴山)
입사경로 : 문과(1459년)
내관직 :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조 참의(禮曹參議), 시강원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외관직 :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事),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 해주 목사(海州牧使)
증직및기타 : 이조 판서(吏曹判書)
인동에서 태어나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다


1431년(세종 13) 경상도 인동에서 태어난 장말손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안색과 풍모로 인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6세 무렵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11세에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에 능통하였으므로, 부친은 그가 장차 가문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세인 1445년(세종 27) 군학(郡學)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웠는데, 이때에도 문장의 암송에 치중하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글의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곳의 선생들로부터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1447년(세종 29) 1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지씨(池氏)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성한 사람처럼 정성을 당해 상을 치러 효자라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졌다.


22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는 생원·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역시 이때의 시험에 합격하여 장말손과 더불어 동방(同榜)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후 두 사람은 평생토록 친분을 잃지 않으며 절친한 친구로 오갔다. 그리고 1459년(세조 5) 또다시 김종직과 함께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서울로 이거하여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다


1462년(세조 8) 고향인 인동을 떠나 한성의 창동(倉洞)으로 이거(移居)한 장말손은 1463년(세조 9) 승문원 박사를 거쳐 한성 참군(漢城參軍)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 조정의 문필 관련 사업을 주관하는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1465(세조 11)에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조정의 천거를 받아 특별히 함길도 병마도사에 부임되어,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의 휘하에 들어가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나하추(納哈出) 무리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1467년(세조 13)에는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던 중, 함길도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오른 강순을 보좌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움으로써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함길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자 그 곳의 민심을 위로하여 이시애 난의 후유증을 수습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후 1470년(성종 1) 장악원부정(掌樂院副正)에 오르고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예종의 능역(陵役)을 감독하였다. 1476년(성종 7)에는 공조 참의·이조 참의·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우부빈객에 올랐다.

예천으로 물러나 송설헌(松雪軒)을 짓다


47세가 되던 1477년(성종 8) 예천의 화장(花庄)으로 잠시 낙향하였던 장말손은 1481(성종 12)에는 간신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해 강순과 남이(南怡) 등이 처형되던 가운데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보임되었다.


그러나 곧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 화장에 송설헌을 짓고서 은둔하며 학문에 힘썼다. 조정에서는 장말손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고 비를 세워 그의 공로를 현창하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1486년(성종 17)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장의 문을 닫게 하고 국사(國師)를 보내어 묘자리를 잡게 하였으며,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가족이야기

: 장천서(張天?)
생부 : 장안량(張安良)
: 단양지씨(丹陽池氏)지을성(池乙成)의 딸
형제 : 장선손(張善孫), 장경손(張敬孫), 장말손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의 후손, 인동장씨


장말손이 속한 인동장씨는 고려조 집현전 직제학(集賢殿)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여,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고관대작을 배출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런데 장계 이후 그의 가계(家系)는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후손들이 편찬한 『송설헌실기(松雪軒實記)』에 의하면, 장말손의 5대조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낸 장비(張備)이며, 고조는 행수별장(行守別將)을 지낸 장원우(張元祐), 증조는 삼사우윤(三司右尹) 및 지가주군사(知嘉州郡事)를 지낸 장전(張?)이었는데, 이들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부 장천서는 고려 말 문하부(門下府)의 급사중(給事中)을 지낸 인물로, 장말손의 공적에 힘입어 사후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홍산 현감(鴻山縣監)을 지낸 아버지 장안량 역시 장말손으로 인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옥산군(玉山郡)에 봉해졌다. 어머니 단양지씨는 부사(府使) 지을성의 딸이다.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다

장말손의 부인은 영남의 거성(巨姓)인 안동권씨 출신으로, 태종 때 영의정을 권중화(權仲和)의 증손녀이자 권영신(權永愼)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장맹우(張孟羽)이며, 2남은 선략장군(宣?將軍) 장중우(張仲羽)이며, 두 딸은 호군(護軍) 박인량(朴寅亮) 및 진사 이정수(李廷樹)와 혼인하였다.

학문이야기

향사 : 예천 송계서원(松溪書院)
교유인물
김종직, 홍귀달(洪貴達)
학문으로 영남을 대표하다


장말손은 6세 무렵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11세에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에 능통하였다. 1445년(세종 27) 군학(郡學)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웠다.


22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는 생원·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그리고 1459년(세조 5) 또다시 김종직과 함께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장수면 화기리 인동장씨(연복군)종택

 

 

 

 

 

 

 

 

 

 

 

 

 

 

 

 

 

 

 

 

 

 

 

 

 

명 칭 :  화기리 인동장씨종택(花岐里 仁同張氏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18-2
건 축 주 :  장언상(張彦祥, 1529~1609)
건축시기 :  1500년대 중후반
소 유 자 :  장덕필(관리자 : 장덕필)
문 화 재 :  시도민속자료  제98호 (영주시), 1992-11-26 지정, 일곽

건축 이야기
유물의 보고 화기리 인동장씨종택

화기리 인동장씨종택이 위치한 꽃계마을은 동쪽으로 연화산, 서쪽으로 주마산·황구산, 남쪽으로 멀리 학가산의 연봉이 나지막이 늘어서 있고, 마을 앞에는 동서로 길게 펼쳐진 들판과 반두들, 그 가운데로 옥계천이 관통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는 동네다.

이 집은 口자형 정침과 왼쪽 뒤편 언덕 위에 사당이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정침 우측 뒤에는 1988년에 건립한 영정각이 있고, 솟을대문 우측에는 2005년에 새롭게 건립한 유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건축 배경
조선 초기의 선비 장응신(張膺臣)은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의 손자로, 아버지 장맹우(張孟羽, 1470~1511)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 도사로 좌천된 후 갑자기 병사하자 동생 장응필과 함께 영주시 초곡마을(지금의 사일마을)로 들어갔다가 문경동(文敬仝, 1457~1521)의 사위가 되었다. 화기리 인동장씨종택은 인동장씨 영주 입향시조인 장응신의 손자 장언상(張彦祥, 1529~1609)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건축 구성
정침은 안채와 사랑채가 평면 및 구조가 별도로 계획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5칸 중 대청 3칸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안상방 2칸, 안상방 정지 1칸을 두었다. 안상방은 뒤쪽 칸에 4짝 미서기문을 달아 놓았고, 안상방 정지 위에는 다락과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우측은 안방 2통 칸, 정지 1칸, 정지고방 1칸이 연이어 놓여 있고, 정지고방 좌측은 두지(원래 대문칸) 1칸이 대문과 연접되어 있다. 정지고방 우측에는 고방 1칸이 정침 우측으로 돌출되어 있다.

기단은 안대청 부분에만 강돌을 3단, 나머지는 1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안대청 중앙 2개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칸 반의 누각형 건물이고, 정침과 독립된 가구구조이다. 평면은 좌측 마루 2통 칸, 사랑방 2칸이 연달아 놓였는데, 마루와 사랑방 전면에는 별주의 두리기둥에 계자각 난간을 세운 누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사랑채만 별도의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정침은 안채·양익사·대문간채 순으로 맞배지붕을 설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에 전면은 두리기둥을 세운 툇간이고, 내부는 통 칸으로 처리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에 납도리집이다.

사랑채는 진달래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뜰에는 돌로 된 떡판이 놓여 있어 이채롭기까지 하다.

현판
화계정사(花溪精舍)
화계정사 현판에는 ‘병진납월 9세서’가 써 있는 것과 삼여재 김태균의 편액이 있다.
  

송설헌(松雪軒)

추원사(追遠祠)

추원재(追遠齋)

송계강당(松溪講堂)

유물각(遺物閣)

영정각(影幀閣)

 

 

* 죄송합니다

제가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못하였습니다.

종손께서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시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1. 1. 1     小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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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4.30 17:39

    첫댓글 충북단양군문화 해설사로서 동양대학원에서 성곽공부를 하고있습니다 인접시군이구요 소수서원박석홍선생님도 공무원할때부터알았습니다 글잘보앗구요 저에게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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