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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10. 로마제국(Roman Empire : 羅馬帝國) (3)
임광자 추천 0 조회 57 08.05.04 17: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 로마제국(Roman Empire : 羅馬帝國) (3)              이 길상

 

나. 제정 시대(27 BC - 476 AD)

 

(1) 로마의 평화(Pax Romana: 27 BC-180 AD)

 

최후의 개선장군 (Imprerator)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그의 양부 카이사르가 제왕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암살되었다고 생각하였음으로,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Augustus라는 존칭을 주었고, 사실상의 그의 권한과 권능은 제왕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1인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그는 기원전 22년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민중을 자비로 구휼하였고, 수도 로마시의 대중이나 노병들에게 자기 비용으로 식량을 배급해 주었는데 그 수혜 대상이 30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민중이 즐기는 검노 의 투기를 그의 명의로 3회 그의 아들과 손자의 명의로 5회를 했는데 동원된 검노 들의 숫자가 1만 명을 넘었고, 같은 명의로 아프리카 맹수들을 상대로 하는 투기를 경기장, 광장, 원형투기장 등에서 민중들에게 26회나 구경시켜 주었는데 회생된 맹수는 3천 5백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정복과 내전으로 지친 로마시민에게 안정과 질서를 회복 시켜주고 시가지를 정비하는 등 획기적인 그의 통치에 감사한 로마 시민들은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와 함께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그를 숭앙하였고, 그는 풍속과 개인생활에도 관심을 보여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재산과 출생, 전관 경력 등의 한계를 정하고 주홍색 회장을 댄 웃옷을 입고, 붉은 가죽구두를 신을 수 있고... 기사 신분은 반 지를 낄 수 있고, .....등등을 제도화했으며, 특별히 혼인 법을 제정하고 풍기를 단속하였는데 로마의 풍속은 1부 1처제로서 대체로 이 원칙은 지켜졌으나 이혼과 재혼을 밥먹듯 했고 유부남녀 간의 풍기도 대단히 문란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도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로 합방도 하기 전에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한 처는 세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로서 그의 유일한 혈육 율리아를 낳았지만 질투가 심하고 행동이 방정하지 못해서 이혼하고 세 번째 처, 리비아는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에 결혼하여, 결혼 후 2개월만에 전 남편의 두 번째 아들을 낳아, 데리고 온 아들 티베리우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두 아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이들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리나 이 세 번째 부인과 50년간 같이 살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혈육이 없었고 그의 후계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잇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풍기단속에 대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그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율리아가 14살에 결혼한 첫 남편은 17세의 마르켈루스였는데 불행 히도 1년 만에 죽었고, 둘째 남편은 아그립파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1세 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사이에 5명의 자녀가 태어나 외견상 화목하였으나 아그립파의 바쁜 업무는 젊은 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더구나 결혼 후 5년후에는 변경에 파견되는 일이 많아서 율리아는 다른 남자와 밀애를 수없이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 번째 남편도 죽고 세 번째 남편은 그의 아버지의 세 번째 처 리비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티베리우스였는데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으나 이혼하고 바람둥이 율리아와 결혼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이에 율리아는 밤이 되면 요사스러운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면서 중앙광장이나 민회의 연단에서 공공연하게 정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법까지 제정하여 풍기를 잡으려고 시도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혈육에게 당한 배신감을 어떻겠습니까? 율리아를 작은 섬에 귀양 보내고 포도주 등의 반입과  면회를 금지 시켰습니다(AD 2년) 그러나 율리아의 딸 소율리아도 바람둥이로 소문 났고, 그 또한 귀양을 보냈으며, 소위 이 시대의 라틴문학도 부정한 연애나 적나라한 애욕의 표현을 공공연히 다루었습니다. 오비디우스의 연애비가, 헤로이데스, 아마토리아를 비롯해서 베르질리우스 호라티우스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니 였다고 합니다.

(2) 세습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처음에는 율리아의 아들을 후계자로 했다가 율리아가 바람둥이로 귀양을 보내면서 후계 유언장도 고치고, 캄파냐의 별장에서 세 번째 처 리비아 품에 안긴 체 세상을 떠난 것은 기원 14년 8월로 그의 나이 76세 였고 카이사르와 함께 신으로 모셔졌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56세의 티베리우스가 계승자가 되어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아 세습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그는 반란의 노이로제 때문에 재위기간 중(14∼37) 원로원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 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제3대 칼리굴라(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로,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 적으로 추진하다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되고, 4대 클라우디우스 1세(41∼54)는 제국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 68)는 세네카 등의 보좌로 무리없이 정치를 했고 문학과 예술을 좋아한 감성적인 군주였으나 권력을 둘러싼 내부음모에 휘말려 모친과 처, 처남을 결과적으로 죽이게 되고, 로마시에 불이 나자 민심의 이반을 두려워한 나머지 측근들의 의견을 따라 그 죄를 크리스트 교인에게 씌워 많은 크리스트 교도를 살해하여 이후 크리스트 교도들로부터 폭군으로 기록되어 지금 까지 이르고 있는데... 크리스트교가,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하여 이 시기에 제국 내의 각 지에 퍼져 있었는데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결국 Nero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이 일어났는데,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로 황제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70)

(3) 크리스트교(Christianity)와 로마제국

로마제국을 로마측에서 보면 수많은 로마인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피 정복민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군에 짓밟힌 패잔과 굴욕, 착취와 살육의 희생이 만들어 낸 악마의 전당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들에게 당한 고통은 정복 지 어디에서나 비슷하지 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재기와 결속의 기회가 되었다는 차이가 되었다 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크리스트교가 비록 초기에는 로마에 박해를 받았지만 로마라는 힘에 의해서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앞서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야기한 바빌론의 포수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돌아간(칼럼 9호)후로 이야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신전을 다시 세우고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계율이 엄한 유대교단을 만들고 이방의 여자와 결혼한 사람을 강제 이혼 시키는 등 신앙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메시아(Messiah : 헤브라이어 "마샤"mashiah)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시리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 시리아 왕 안티오크스 4세는 헬레니즘에 심취하여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빼앗고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의 화신이라는 자신의 형상을 비치하고 신으로 받들게 하였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이른바 막카바이오스전쟁(166~ 142 BC)으로 시리아를 몰아내고 막카베아家의 하스몬朝의 왕이 대사제를 겸하는 독립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때에 활약한 것이 율법학자들로서 그들은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는 하스몬왕가의 신전제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율법에 따라 엄격한 종교생활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손발이 된 것이 바리세인 (Pharisees)들로서 율법뿐만 아니라 전승되어온 내용까지도 계율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모세의 율법만을 정통으로 보고 구비전승된 어떤 내용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 인 사드카이인들이 있어서 유대사회의 상류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해(死海)의 서쪽 연안에서 엄격한 신앙을 지키던 황야종단(荒野宗團)이 있어서 하스몬왕가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바리세인과 충돌하였고, 마침 해적소탕의 임무를 띄고 시리아에 와 있던 로마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조정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이 내분에 개입하여 바리세인과 손을 잡고 있던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직을 맡게 해주었는데 그 대가로 유대는 로마에 공납을 바쳐야 했습니다(63 BC)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유대는 남쪽 이두메아의 토호인 헤롯 (Herod : Herodes ?-4 AD)에게 통치를 위임하였고 헤롯은 예루살렘 신전을 대규모로 개축하는 등 치세의 업적을 보이려고 노력한 듯 하였으나 로마의 정정(政情)에 관심을 둘 뿐 유대의 고통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목타게 기다린 것은 메시아의 강림이 였습니다. 이 때 황야종단의 영향을 받은 세례요한(Baptisma Johannes)이 요르단 강 하류에서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라고 하면서 물로서 세례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 신을 메시아.....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만큼 내용도 매우 다양합니다. 다만 학자들의 연구를 요약하면 요셉과 마리아의 여러 형제 자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업인 목공일을 하다가 30 세 쯤 되었을 때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는 군중에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출생에 대해서도 베드레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목가적인 이야기가 있으나, 어찌 되었던 그가 출생한 해를 원년으로 정한 기독교의 기년(紀年)설정이 지금은 세계적인 공통연호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의 출생이 축복 받은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헤롯의 호구조사령에 따라 고향 나자렛으로 가다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의 출생은 4년이 빨라진다고 합니다. 세계가 올해를 그의 탄생 후 2000년째가 된다고 해서 새 밀레니엄시대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1996년이 예수께서 태어난 후 2000년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하나의 장르로서 그 영향에 대한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할 뿐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사후 부활을 믿은 제자들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그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로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초기의 교단은 사도라 불리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사후 입신(入信)한 그의 동생 야곱 등에 의해서 유대교와 분리되지 않은 체 신전예배나 율법을 엄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테파노라는 열렬한 신자가 있어서 유대교를 맹렬히 비난하다가 타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유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팔레스타인 밖으로 나가 로마영내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였고 이들을 크리스티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트는 것은 메시아의 그리스식 명칭이고 로마에서도 그렇게 불렀으며, 제스위트교단에 의해서 중국에 들어와 크 리스트의 음역으로 기독(基督)이 된 것을 우리들은 한자발음대로 기독교라고 합니다. 일본은 기리스탄(切支團)이라고 한다는 군 요.

그 무렵 소아시아의 타르소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 바울로(Paulus:영 Paul)는 그의 부친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그리스적인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바리세파가 되어 크리스트교의 박해에 앞장서 있다가 다마스쿠스성 밖에서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보고 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자 갑자기 회개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그곳에 있던 베드로와 야곱을 만나 개종하고 전도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기독교에 끼친 공로는 참으로 지대해서 기독교가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그의 공적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의 피 눈물 나는 전도행적은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로에 헌신적인 전도에 의해서 크리스트교는 유대인 이 외의 다른 민족에게도 전파되게 되었고, 처음에는 핍박받고 있던 노예와 하층민 사회에 번졌으나 점차로 상층 사회에서도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로마는 이방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도에 별 무리가 없었으나 3대황제 칼리굴라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으며, 5대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로 바울로는 로마로 잡혀오고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났다가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물었더니 "로마로 돌아가라"고하여 로마로 돌아와 두 사람 모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황제의 개인성향이나 혹은 로마의 정치적인 사정에 의해서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개인의 집이나 카다콤베(지하묘실) 등에서 예배를 보면서 신앙을 지켜 신자와 교회가 늘어나고 교구제도가 틀을 잡아갔습니다.

한편 앞에서 잠깐 이야기한 예루살렘의 유대교도들은 자기 들이 핍박당하는 것은 로마의 지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바리세의 좌파들을 중심으로 반 로마활동을 전개하였는데 70년 4월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자 드디어 8월 예루살렘을 함락되고 헤롯에 의해서 건립되기 시작하여(20 BC) 80수 년을 지나 62년에 완성되었던 예루살렘 신전도 이 때 불타고 말았습니다.

티투스는 재단에 올리는 여러 제기(祭器)를 비롯하여 전리품을 챙기고 개선하여, 그의 부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1차 유대전쟁이라고 합니다.

그 60년후 속주 순행으로 그의 재위기간을 채웠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로마의 주신 주피터신전을 세우고자 하자 유대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여 이른바 제2유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유대가 우세하였으나 병력을 보강한 로마의 재 침으로 드디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주피터신전이 세워지고 유대인들은 쫓겨 나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135) 그러나 1년에 단 한번 1차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 점령된 8월 29일, 하루만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타버린 신전의 벽에 대고 통곡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래서 통곡의 벽이 생기고 이 기구한 행사는 지금 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4) 5 현제(賢帝)시대(96-180)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이른바 서양인들이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5현제시대가 펼쳐집니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 순행(屬州巡幸)에 바 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등이 이들로서,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친자식을 제치고 현명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요순시대 선양(禪 讓)의 형식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5) 도시의 번영과 싹트는 위기

5현제시대는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도처에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바실리카·극장·원형극장·공공목욕탕·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의 부유 층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 會)를 구성하고, 관리에 취임하여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고, 제국정부도 도시 부유 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아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 인도, 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여 경제가 크게 번영하였습니다.

그러나 5현제 마지막을 장식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위 중 북방 게르만을 정복하고, 스토아 파 철학자로서 명상록(Meditations)을 저술하는 여유까지 보였으나 게르만과 전투 때 그가 전사했다는 오보(誤報)를 접한 군대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나선자가 있었고, 비록 간단히 수습되었으나 심약한 그는 반란 공포에 사로잡혀 양자 상속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와 공동으로 황제가 되어 양자 상속의 전통이 무너졌습니다. 도시의 발달은 제국을 도시의 보조자로 전락 시켰고, 속주민에게 개방된 원로원은 권위를 상실하고, 황제의 부속기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리고 동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북쪽에서는 게르만인의 침입이 다시 빈번해 지는 등 대제국 로마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6)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북 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가 황제가 되어 세베루스왕 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를 실시했고, 그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212)하여 세수(稅收)의 증가를 노렸으나 화폐가치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격화시켜  경제는 더욱 흔들렸고 로마시민의 강건한 옛 기백도 추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가는 노 제국에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 적 통합이 모색되어 한 때 태양신을 국교화(國敎化)하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이야기 거리만 만들었고,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 222∼235) 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 가 되어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 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3세기의 로마제국은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되고, 이에 곁들여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습니다. 도시는 쇠퇴하고 화폐경제가 몰락하는 대신 농촌을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농장이 등장하고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행하는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중흥의 군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크리스트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습니다. 250년 데키우스황제는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유일신 여호아 이외의 어떤 신도 믿을 수 없는 크리스트교들로서는 배교와 순교의 두 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게 되었으며, 257년과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7) 디오클레티아 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는 군의 통수권을 황제에 귀속시키고, 변경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통치 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고, 사분통치제(四 分統治制)를 채택하여 3명의 副帝를 두고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고,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모든 부과는 토지 단위(iugum)와 사람 단위(caput)로 할당하였으며,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를 자처하여 황제에게 절을 하게 하고 복장도 오리엔트식으로 고치는 등 로마적인 요소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치 체제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내란을 수습하고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로서 이미 제국 깊숙이 자리잡은 기독교를 새로운 이념으로 승화시켜 황제 권을 높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를 보았다고 선언하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후, 로마에 입성한 다음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하고, 크리스트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고(313),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아타나시우스파 를 정통으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하여 교리논쟁의 해결을 꾀하였으며(326),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33)

한편으로는 게르만 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고, 직업의 세습(世襲)과  세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상업적인 라티푼디움은 이미 전에 사라지고 대신 콜로누스라고 불리던 소작인들에게 병작시킨 개인 영농으로 바뀐 농촌에, 많은 소작인의 이동을 금지시켜 콜로누스(농노)들은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파격적인 개혁도 일시적인 각성제의 불과할 뿐 옛 로마의 영화를 되 찾기에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콘 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들의 내분은 제국을 더욱 황폐화시켰습니다.

그 후 율리아누스(재위 361∼363)황제가 등장하여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적 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활시켜 크리스트교를 공격하고, 로마의 옛 제도를 회복코자 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나고 노 제국의 곳곳에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8) 게르만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뒤, 동방에서는 라인·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고,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 발렌스(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알라만인(人)이 침입하여 서쪽을 위협하였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 난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파노니아·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습니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훈(Huns Huni)족에 쫓긴 서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일대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의 군대를 괴멸시켰습니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는 극도에 달하였고,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던 고트족이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 받았으며(382)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하고(392), 올림피아 경기를 비롯한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여 부흥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였습니다.

로마는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 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476), 한편 동 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이 후 서유럽에서도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소멸되지 않아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카롤로스 : 칼)의 대관(戴冠:800)으로 로마제국의 부활을 상징적 의미로 존속케 하였고, 동프랑크의 오토 1세는"신성 로마제국"을 세우는(962)등 로마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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