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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9구간 제2부
천평들-남명기념관-덕산약초시장
20260505
1.남명의 곧은 뜻이 깃든 고장
-양단수 덕천강과 덕산의 아름다움
어린이날을 맞아 지리산둘레길 9구간 탐방을 떠났다. 탐방 출발지가 9구간 시점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남명기념관이 아니라 9구간 종점인 경남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위태마을이다. 도보여행팀 주최측에서 식당과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구간을 역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길손은 지난 번 8구간 탐방을 마치고 남명 조식 묘지를 참배하지 못했고, 덕산 시가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에 내심 반겼다.
지리산둘레길 사이트에서는 지리산둘레길 9구간을 이렇게 개략했다. "덕산-위태 구간은 낙동강수계인 덕천강도 만나고, 두방산의 경치도 감상하면서 걷는 10.9km의 지리산둘레길이다.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도 둘러보고 지리산 천왕봉의 기운을 느끼면서 임도와 옛길를 걷게 된다. 이 구간에서는 시천면 사리, 원리, 천평, 중태, 옥종면 위태(상촌)마을을 지난다. 거리 9.7km, 예상시간 약 4시간, 난도 중이다. 구간별 경유지 : 원리교 - 천평교(0.4km) - 중태안내소(3.1km) - 유점마을(3.1km) - 중태재((1.3km) - 위태(상촌)(1.8km)"
그런데 9구간을 역방향으로 탐방하면서 이정목을 살피면, 하동 지역에서는 9.7km, 산청 지역에서는 11.0km를 전체 거리 기준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9구간 시점 위치를 다르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동 지역에서는 9구간 시점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원리교 입구로, 산청 지역에서는 그 시점을 남명기념관 앞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은 남명기념관 앞에 있으며, 산청 지역 이정목이 바른 표기이다. 9구간 역방향 위태-덕산 탐방 체험을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천평들을 경계로 2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2부(천평들-남명기념관-덕산약초시장) : 지리산둘레길 9구간 역방향 탐방을 시천면 천평리 천평들에서 이어간다. 덕천강 건너편 시천면 사리 남명기념관 목적지까지는 3km쯤 남았다. 시천면 천평리에서 시천천의 천평교를 건너 시천면 원리로 넘어가서 다시 삼장천의 원리교를 건너 시천면 사리로 넘어가 덕천강 둑방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어려움은 없다. 다만 보아야 할 것들이 많아 자꾸 발걸음이 늦어진다.
덕천강 남쪽 둑방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지리산 천왕봉 동부능선과 써리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원리 뒤쪽에 구곡산이 우뚝 솟아 있다. 둑방길의 가로등 기둥은 감나무 줄기 모형으로 조성되어 윗가지 가로등과 아랫가지 가로등에 감 모형이 하나씩 달려 있다. 가로등이 산청군 시천면을 대표하는 농산물 '곶감'을 주제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삼장천은 원리교를 지나 남서쪽에서 흘러오는 시천천과 합수한다. 이곳을 양단수(兩端水)라 이르는데, 시천면의 세 지역 천평리·원리·사리가 만나는 꼭지점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은 61세 때인 1561년 고향인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德山) 양단수 아래쪽 사륜동(絲綸洞)으로 이사하여, 이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생의 마지막을 보내며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남명 선생의 시조 두 수를 읽어 본다. 중종(中宗, 1488~1544년)이 승하하였을 때 남명이 썼다고도 하는 시조,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는 벼슬하지 않고 평민으로 빈한하게 살아서 임금의 은총을 입은 바는 없지만, 임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군신유의를 표현했으며, 산청 덕산(德山) 사륜동(絲綸洞)으로 이사한 뒤 쓴 시조,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오 나는 예인가 하노라"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오는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는 덕산의 양단수를 무릉도원으로 표현하였다.
지리산을 뜻하는 덕산(德山) 지명은 예전에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원리·사리 지역을 일컬었다고 한다. 시천면 원리 지역에 덕산중고등학교, 사리 지역에 덕산초등학교가 있는데, 현재 덕산이라는 행정 지명은 사라졌고, 시천면 면소재지인 시천면 사리 시가지를 덕산이라 이른다고 한다. 덕산초등학교의 교가 "천왕봉 줄기 이어 구곡산 솟고/ 도화 뜬 양단수에 비친 두류산/ 남명의 곧은 뜻이 깃든 고장에/ 그 정기 물려받은 덕산초등교"와 덕산고등학교 교가 "우러러 천왕봉을 머리에 이고/ 복사꽃 산영 잠긴 양단수 기슭/ 덕천서원 옛 배움터 높고 큰 자랑/ 이곳이 낙선호의 본 고장일세"를 보면 모두 남명 선생의 시조를 바탕으로 천왕봉과 구곡산, 그리고 남명의 유풍인 착한 일을 즐겨하고 의로운 일을 좋아한다는 '낙선호의(樂善好義)'를 내세우고 있다. 생의 10년을 이곳에서 살다 마감한 남명 조식 선생이 이 고장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시천천의 천평교를 건너 원리 지역으로 넘어가 덕산중고등학교 옆 덕천서원을 들르지 않고, 삼장천의 원리교를 건너 사리로 넘어갔다. 덕천강의 양단수를 끊임없이 살폈다. 양단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두 갈래 물줄기 삼장천과 시천천이 합수하는 두물머리다. 그런데 삼장천은 덕천강의 상류이므로, 엄밀하게 보면 시천천이 덕천강에 합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삼장천과 시천천이 합수하는 양단수부터 덕천강이라 이르며, 사리 지역에는 두 물길이 만나 못을 이룬다고 하여 이곳을 양당(兩塘)이라 이르며 양당마을이 있다. 양당마을 아래쪽 사륜동(絲綸洞)에 산천재(山天齋)가 있고, 주변에 남명(南冥)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남명기념관, 남명과 두 부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여재실(如在室), 그 뒷산에 남명과 숙부인(淑夫人) 묘지가 있다.
시천면 사리 덕산약초시장 앞 덕천강 둑방을 따라 목적지인 남명기념관으로 내려간다. 덕천강 건너편에 조례산, 함미봉, 수양산이 동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멋지다. 덕산 지역의 풍경은 덕천강과 주변의 산이 어우러져 황홀하게 아름답다. 그 으뜸은 천왕봉일 것이며, 그밖에도 구곡산, 조례산, 함미봉, 수양산, 시무산 등이 풍경을 이루어 빛낸다. 그 풍경을 양분하면 덕천강 남쪽 둑방에서는 지리산 천왕봉과 구곡산 풍경, 북쪽 둑방에서는 덕천강과 덕천강에 줄지어 솟은 조례산·함미봉·수양산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덕천강의 가동보(可動洑) 위쪽과 아래쪽에는 덕천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하나씩 놓여 있어 덕천강을 건널 수 있다. 산책로에는 쉼터전망대와 조형물, 강변에는 자전거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덕천강 둑방에서 산천재 공원으로 올라가 공원 담장 끝에 있는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에서 9구간 탐방을 마쳤다.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은 지난 8구간 탐방 뒤 살피고 정리하였기에 이번에는 지난 번 살피지 못한 여재실과 남명 묘지를 살폈다. 남명의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첫 부인 남평 조씨에게서 난 1남1녀 중 아들은 요절하였고, 둘째 부인 은진 송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명의 후손은 모두 둘째 부인 자손들로 창녕 조씨 문정공파를 이루는 것 같다.
남명 묘지를 살피고, 도보여행팀 안내버스가 대기 중인 덕산약초시장으로 되돌아간다. 덕천강 둑방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난 번처럼 남명로를 따라간다. 시천면 사리 사륜마을과 양당마을, 사리의 중심지 연화마을을 지나 덕산시가지를 통과한다. 지리산 천왕봉은 가까이서 손짓한다. 매년 몇 차례씩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는데, 근년에 천왕봉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움이 천왕봉으로 날아간다.
남명의 한시 두 수가 가슴을 파고 들고, 그가 사랑한 천왕봉이 높은 기상을 일으킨다. 남명이 덕산에 옮겨와 그 심정을 쓴 오언절구 '덕산복거(德山卜巨)'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초무방초)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 같은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그리고 덕천강 강변의 정자에 걸었던 칠언절구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은 우뚝 솟은 천왕봉의 기상으로 온몸과 마음을 솟구쳐 오르게 한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청컨대 천석들이 종을 보시게./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되어/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2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2분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덕천강 둑방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한다. 덕천강 건너편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보인다.
왼쪽 뒤 해발 520.8m 함미봉 앞 덕천강 둑방의 'BNK꾀꼬리길' 조형물 앞에서 송하중태길을 따라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오른쪽은 해 324.1m 조례산이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동쪽의 삼장천과 서쪽의 시천천을 양단수에서 합수한 덕천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 왼쪽 산은 지리산 태극종주 달뜨기능선의 시종점 산봉인 해발 407.2m 시무산, 오른쪽은 해발 520.8m 함미봉, 그 왼쪽 뒤는 해발 502m 수양산이다.
덕천강 북쪽 시천면 사리 지역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자리하고 덕천강에 가동보가 설치되어 있다.
왼쪽에 시천면 천평리 송하마을이 자리하고, 중앙 뒤에 해발 961m 구곡산(九谷山)이 솟아 있다.
앞에 쉼터정자와 덕산그라운드골프장 표석이 서 있고, 왼쪽 뒤에 구곡산이 솟아 있고,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중봉·하봉 능선과 그 앞의 써리봉 능선이 보인다.
덕산그라운드골프장 표석은 2014년 10월 10일 세워졌다. 오른쪽 뒤에 조례산, 중앙 뒤에 함미봉, 그 왼쪽 뒤에 수양산이 솟아 있다.
맨 뒤 중앙에 지리산 천왕봉·중봉·하봉 능선과 중봉 오른쪽 앞에 써리봉 능선이 보인다. 덕천강이 왼쪽 위 원리교 아래 양단수에서 삼장천과 시천천을 합수하여 흘러오고, 덕천강 건너편 시천면 사리 지역에 더에이스 아파트가 우뚝하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絲里) 시가지가 덕천강 북안(北岸)에 길게 자리한다. 더에이스 아파트가 시가지의 상징물처럼 우뚝하다.
덕천강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북안(北岸)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과 그 아래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시천면의 자존심으로 빛난다. 오른쪽에 지리산 태극 종주의 시종점 시무산이 중앙 뒤 수양산으로 이어진다.
덕천강은 시천면에서 동쪽 단성면으로 흘러가고, 왼쪽에 시무산, 오른쪽에 함미봉, 그 왼쪽 뒤에 수양산이 보인다.
덕천강 둑방 송하중태길을 따라왔다. 시천면의 조례산, 단성면의 함미봉과 수양산이 동쪽으로 늘어서 있다.
덕산 2.1km 지점을 알리는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서 있다. 송하중태길은 왼쪽으로 나아가고, 지리산둘레길은 덕천강 둑방길을 따라간다.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 동부능선이 보인다.
두 하천이 합하여 소(沼)를 이룬다는 합소에 징검다리가 조성되어 있고, 건너편은 사리 시가지 덕산약초시장이다.
합소징검다리는 덕천강 南岸의 시천면 천평리와 北岸의 사리를 이어준다. 더에이스 아파트가 사리 시가지의 상징 같다.
지리산 서쪽을 흘러오는 왼쪽의 시천천과 지리산 동쪽을 흘러오는 중앙의 삼장천이 원리교 아래를 지나서 합수하여 덕천강을 이루며, 중앙 뒤에 지리산 써리봉 능선과 하봉이 보인다. 덕천강 건너 오른쪽에 덕산약초시장이 있다.
왼쪽의 시천천과 오른쪽의 삼장천이 합수하는 양단수(兩端水)에서 소(沼)를 이룬다. 그래서 합소(合沼)라고 이르는 듯.
지리산 서쪽을 흘러오는 시천천과 지리산 동쪽을 흘러오는 삼장천이 원리교 아래를 지나 합수하는 양단수에서 덕천강을 이룬다.
시천천이 천평교 아래를 흘러 양단수로 내려온다. 천평교 건너편에 덕산중고등학교가 보이며 중앙 뒤에 구곡산이 우뚝하다. 시천천 둑방길을 따라 천평교로 올라간다.
천평교 남단 옆에 지리산둘레길 안내판, 그 맞은편에 덕산 1.6km 지점을 알리는 지리산둘레길 양단수 이정목이 서 있다.
지리산둘레길 운리-덕산(덕산-운리), 덕산 천평교 : 지리산둘레길 여행은 책임여행, 공정여행의 시작입니다. 나눔과 공존을 생각하는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덕산)를 잇는 13.1km의 지리산둘레길. 야인으로 살면서 후학을 가르쳐 나라의 표상이 된 올곧은 선비 남명 조식, 평생을 사람의 길과 배움의 길을 놓치지 않고 걸어가신 남명 조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덕산 일원이다. ▶덕산 : 지금은 행정구역상 시천면 사리로 되어있으나 옛날 덕산은 지리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큰 장이 서는 곳이었다. 이 장을 통해 지리산 사람들은 서로의 안녕을 확인했을 것이다. 지금은 4일, 9일 열리는 곶감장으로 유명하다. ▶덕천강 : 덕산을 지나는 덕천강은 천왕봉에서 시작된 계곡들의 물길이다. 하동군 옥종을 지나 진주 남강으로 모여 낙동강이 되고 남해에 이른다.
왼쪽 송하중태길이 오른쪽 뒤 덕산체육공원을 지나온 친환경로와 만나 끝나며, 건너편에 金環落地 표석과 그 옆에 설명비가 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표석 옆에 금환락지 설명비가 있다.
하늘을 이고 선 지리산 천왕봉! 아늑하고 비옥한 이 땅! 서신마을 뒷편 자그마한 산봉우리에 선녀가 앉아 있다. 선녀는 다리미로 구곡산 구폭치마를 다리며 금가락지를 천평 들판에 빼어 놓았다. 원리, 사리, 천평리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상은 가락지를 닮아 있다. 덕산중·고등학교 뒤편 동산은 다리미 형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천평들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금환락지(金環落地)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표석 앞에서 천평교를 바라본다. 천평교 남단 오른쪽에 보도 출입구, 그 옆에 지리산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다. 시천천의 천평교는 시천면 천평리와 원리를 이어주며 건너편에 덕산중·고등학교가 자리한다.
천평교를 건너며 시천천 상류 방향을 바라본다. 시천천의 발원지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지리산 천왕봉이고, 국도 제20호선 지리산대로는 시천천과 동행하여 시천면 중산리 버스정류소까지 이어진다.
시천면(矢川面) : 원래 이곳은 살천(薩川)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진주군에 속하였다가 리가 면으로 될 때 소재지를 신천에 두고 新川面으로 되었다가 矢川面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3월1일에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시천면 사리에 면소재지를 두고 있으며, 1983년 2월15일 하동군 옥종면 중태리가 시천면에 편입되었다. 시천면은 낙동강의 발원지 강 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고 하여 矢川으로 불리며 물이 빠르고 계곡이 깊고 주변경관이 산자수명하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 산청군청
시천천 건너편 덕산중·고등학교 왼쪽에 덕천서원이 보이며, 중앙 뒤에 시천면 원리와 동당리에 걸쳐 구곡산이 솟아 있다.
시천천의 천평교 건너편에 덕산중·고등학교가 자리한다. 덕산중학교는 1948년 4월 10일 개교, 덕산고등학교는 1982년 3월 5일 개교한 공립학교라고 한다. 오른쪽 맨 뒤에 지리산 하봉이 흐릿하다.
덕산고등학교 교가, 조종명 작사/ 이정희 작곡 : 1절, 우러러 천왕봉을 머리에 이고/ 복사꽃 산영 잠긴 양단수 기슭/ 덕천서원 옛 배움터 높고 큰 자랑/ 이곳이 낙선호의 본 고장일세// 2절, 보아라 구곡산에 새벽이 오고/ 덕산들 기름지어 오곡이 익네/ 풍요롭고 복된 터전 진리의 전당/ 여기서 갈고 닦아 밝혀 나가리/ 후렴, 슬기로운 봉황들아 날아올라라/ 우리의 보금자리 덕산고교
시천천이 천평교를 지나 원리교 아래서 삼장천에 합수하는 곳을 양단수라 이르며 건너편에 덕산약초시장이 보인다.
천평교 북단에서 양단수와 덕천강을 바라본다. 맨 오른쪽 뒤에 시무산, 왼쪽 뒤에 시천면의 수양산이 보인다.
남명로는 원리 버스정류소 앞을 지나 원리삼거리에서 오른쪽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IC와 진주 방향 국도 제20호선 방향으로 이어지며, 지방도 제59호선 친환경로는 원리삼거리에서 북쪽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 방향으로 이어진다.
양단수 전망대 앞에 남명의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頭流山 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桃花 뜬 맑은 물에 山影조차 잠겨셰라/ 아회야 武陵이 어대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양단수 전망대에서 남서쪽을 조망한다. 시천천(矢川川)이 천평교(川坪橋) 아래를 흘러온다.
시천천이 천평교(川坪橋) 아래로 흘러오고, 건너편은 시천면 천평리 송하마을, 왼쪽에 조례산이 솟아 있다.
삼장천과 시천천이 덕천강을 이루어 동쪽으로 흘러간다. 오른쪽에 조례산·함미봉·수양산이 줄지어 서 있고, 왼쪽에 시무산이 솟아 있다.
느티나무 아래 도화정(桃花亭)이 조성되어 있고, 삼장천의 원리교는 시천면 원리(院里)와 사리(絲里)를 잇는다.
남명로의 원리 삼거리 건너편 원리마을회관 입구 앞에 마을회관 건립비, 그 왼쪽 뒤에 덕산중·고등학교, 그 오른쪽 뒤에 덕산교회 십자탑이 보이며, 뒤쪽에 구곡산 능선이 이어진다.
"언제 불러봐도/ 따뜻한 그 이름 어버이/ 당신은 아늑한 품속/ 정답고 그리운 내 고향/ 남명 선생 정신이 흐르는/ 이 강기슭/ 저희들 어버이 위해/ 여기 둥지 하나 트노니/ 저문 날 고운 노을빛/ 주름살 펴시고 쉬어 가시라" 거초 허갑도 외 주민들 마음 모아 이 집 세우다. 시 허윤정, 글씨 노중식 1992. 5.
천평교 북단에서 남명로 보도를 따라 양단수 전망대로 걸어온 길을 원리마을회관 건립비 앞에서 돌아보았다.
원리 삼거리 동쪽에 도화정(桃花亭)이 있고, 그 왼쪽에 원리교가 있다.
정자의 이름 도화정(桃花亭)은 남명의 시조 '桃花 뜬 맑은 물에 山影조차 잠겨셰라'에서 따왔을 것이다.
원리 삼거리에서 원리 지역을 돌아보았다. 왼쪽 부처님오신날 대형 조형물 옆에 남명 시조비, 그 위에 원리 버스정류소와 천평교가 있으며, 오른쪽 남명로 건너편에 원리마을회관 건립비, 그 뒤에 덕산중·고등학교가 있다. 원리(院里)는 덕천서원이 있으므로 원동, 원촌이라 하다가 원리(院里)가 되었다고 한다.
시천면 원리 원리삼거리에서 남명로의 원리교를 건너 시천면 사리로 넘어간다.
원리교(院里橋)에서 양단수와 덕천강을 내려본다. 중앙에 시무산, 맨 왼쪽에 수양산, 맨 오른쪽 뒤에 단성의 수양산이 보인다.
원리교(院里橋)에서 삼장천 북쪽을 바라본다. 삼장천 서쪽 둑방의 지방도 제59호선 친환경로는 삼장면 유평리로 이어진다.
원리교(院里橋)에서 오른쪽 원리삼거리와 왼쪽 시천천의 천평교(川坪橋)를 돌아보았다.
지리산둘레길은 시천면 사리로 넘어가 원리교 동단에서 오른쪽 덕천강 둑방을 따라 내려간다. 시천면(矢川面)은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고 하여, 사리(絲里)는 골짜기가 실처럼 가늘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덕산약초시장 앞 덕천강 둑방 출입구에 '덕산장 장마'시비와 청류정 쉼터정자가 있다.
"아침부터 젖었다/ 오정 무렵 되어서는/ 막걸리 집 파전 내음도/ 젖었다/ 장옥 너머 넘실거리는/ 덕천강 물소리도 젖은 채 간다/ 만물상회 트럭도/ 구곡산 중허리까지 내려온/ 낮은 하늘도 젖었다/ 널평상에 드러누운 생선들도/ 오다가다 질척거리는/ 하루가/ 다 젖었다"
청류정(淸流亭) 쉼터정자에서 아이들이 호응한다.
남서쪽의 시천천이 천평교 아래를 흘러와 북쪽의 삼장천에 합수하여 덕천강을 이루고 소(沼)를 형성한다.
덕천강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남쪽의 시천면 천평리와 북쪽의 시천면 사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덕천강에 놓여 있다. 건너편 중앙부터 조례산, 함미봉, 수양산이 솟아 있다.
시천면 사리(絲里) 시가지 서쪽 끝 원리교 앞쪽에 덕산약초시장이 있다. 중앙 맨 뒤에 지리산 써리봉 능선이 보인다.
남명로200번길 건너편 덕산시가지에 더에이스 아파트가 시천면 사리 지역의 상징물처럼 솟아 있다.
덕천강 북쪽 둑방에 조성된 덕천강 산책길을 따라간다. 건너편에 조례산, 함미봉, 수양산이 솟아 있다.
덕천강 산책로에서 뒤돌아보았다. 구곡산 능선, 삼장천의 원리교와 시천천의 천평교, 덕천강의 합소징검다리를 확인한다.
'내가 응원하는 거 절대 잊지마' 조형물이 길손을 반긴다. 덕천강은 시천면에서 동쪽 단성면 방향으로 흘러가고 덕천강 산책로 아래에 강변 자전거도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덕천간 남쪽에는 조례산, 함미봉, 수양산이 솟아 있다.
덕천강 산책로 옆 남명로200번길에 덕산문화의집과 그 옆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기반 시설이 낙후돼 제대로 된 혜택을 누리지 못하던 산청군 시천면 지역에 지역민을 위한 생활문화센터가 문을 연다. 산청군은 시천면 소재 덕산문화의집 생활문화센터의 새단장을 마치고 오는 10일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고 7일 밝혔다. 산청군은 지난해 3월 문화체육관광부의 ‘2016년 생활문화센터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이후 총사업비 5억원을 들여 덕산문화의집을 리모델링, 생활문화센터로 조성하고 지난달 말 준공했다. 기존 건물의 공간을 재배치하고 리모델링해 1층은 다목적홀, 음악연습공간, 마주침 공간으로 만들었다. 2층은 북카페, 사무실, 동아리방 및 문화창작실 등 주민 자율공간으로 조성됐다. 앞으로 주민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판소리와 메이크업 교실 외 13개 강좌가 운영될 예정이다. 산청군 관계자는 “생활문화센터는 앞으로 주민들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 된다”며 “다양한 생활문화 강좌와 여가활동 참여 기회가 늘어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 산청군청
덕천강 산책로에 덕천강 전망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덕천강 전망대쉼터에 탐방객을 맞이하는 산청 시천 조형물이 지리산 천왕봉 표석 모형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덕천강에 가동보(可動洑)가 설치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국도 제20호선 지리산대로의 덕산1교가 덕천강 위를 가로지른다. 건너편에 조례산, 함미봉, 맨 왼쪽 뒤에 수양산이 솟아 있다. 가동보(可動洑)는 "수위 및 유량을 조절하기 위하여 유수단면 일부 또는 전부를 차단하고 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구조물"이라고 한다.
구곡산 능선이 멋지다. 전망대쉼터 앞 난간에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문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덕천강 전망대쉼터 맞은편 남명로200번길에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출입문이 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의 인사말을 옮긴다.
"조선중기 실천성리학의 대가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성리학에 매몰되어 있던 당시의 학문적 편협성을 극복하고 민본, 현실, 청렴, 실천중시 등 시대를 앞서 간 독특한 사상과 국가의 안위를 대비한 병법, 천문지리, 의서 등 현실적인 실천위주교육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50여 명의 제자가 임진왜란의병장으로 활동하는 등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은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450여년전 남명선생께서 강학하시던 현장에 국가 및 지자체 예산을 투입 설립한 기관이며
남명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는 산천재와 남명기념관, 남명묘소, 세심정, 덕천서원 등 청렴유적지가 있고 우수한 강사진과 궁도체험, 선비전통놀이 체험 등 연수관련 자체프로그램과 인프라가 뛰어난 곳입니다.
지리산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당일등반 체험연수가 가능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연구원 앞 덕천강 경관과 물놀이를 즐길 수 있고, 연구원 곳곳에 회랑(回廊), 누각 등이 자리하여 힐링과 재충전이 가능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연구원은 남명사상과 정신이 과거속의 유산이 아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의 사회적 실천과 책임을 더욱 선도하는 사상으로 재조명 부각되고 맑고 청렴한 문화를 기반으로 행복한 사회건설을 바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연구에 나서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올바른 인성교육과 청렴리더십 교육연수에 중점을 두어 이곳을 거쳐 가는 이들이 국가사회의 중심이 되도록 힘써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의 남명선비정신연수와 체계적 연구가 국민의 정신을 살찌워 행복한 삶의 좌표를 제시하고 국가사회발전에 더욱 기여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
덕천강(德川江) 아래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에 국도 제20호선 지리산대로의 덕산1교가 덕천강을 가로지른다. 오른쪽에 조례산, 왼쪽에 함미봉이 솟아 있다. 덕천강은 지리산 천왕봉 남쪽과 웅석봉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흘러서 생성된 강이다.
덕천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경상남도 하동군·진주시·산청군·사천시 일대를 지나 남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국역 진양지』에 “조흘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이 되어 살천(薩川)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덕천강은 총 길이 46.72㎞, 유역 면적 461.16㎢로, 덕천강의 상류부는 지리산의 남동쪽에 해당하는 산청군 시천면과 삼장면이다. 상류부에서 덕천강 본류는 남북 방향의 골짜기를 따라 남으로 흐르다가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서 지리산 천왕봉 남쪽 계곡에서 흘러내린 시천천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흘러 산청군 시천면과 단성면의 경계에 있는 협곡을 지나 단성면 창촌리 석당산을 만나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덕천강 산책로에서 남명로200번길을 건너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50주년 기념공원을 살핀다. "지리산 국립공원(智異山國立公園)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북도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 읍·면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산악형 국립공원이다."(산청군청)
지리산국립공원 50주년 기념공원 안내판을 옮긴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맞이하여 국가 최고의 대자연과 유구한 문화를 온전하게 보전하고 국민과 지역사회에 더 많은 행복을 주자는 다짐을 합니다. 2017년 12월 29일"
지리산국립공원 50주년 기념공원에서 남명로200번길을 따라오다가 산천재공원 출입구로 올라간다.
산천재공원 출입 계단을 올라와 남명로200번길의 지리산둘레길 안내판과 이정목을 내려보았다.
산천재 입구의 산천재공원 담장 옆 길을 따라 남명기념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시무산, 왼쪽에 수양산이 솟아 있다.
산천재 공원 담 끝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에 지리산둘레길 상징조형물 벅수와 시종점 안내판이 서 있고, 건너편에 남명기념관이 자리하며 뒷산에 남명 묘지가 있다.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뒤 산천재 공원에 남명 관련 비석과 산천재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덕산은 ‘조선 선비의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고 일컫는 남명 조식 선생이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던 곳이다. 사적으로 남명의 유품과 서책, 신도비, 남명 석상 등이 있는 남명기념관을 비롯하여 산천재, 덕천서원, 용암서원, 세심정, 선조대왕이 내린 제문 국역비 등이 있다. 남명이 생전에 직접 터를 잡은 묘소도 남명기념관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건너편에는 남명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가 마주하고 있다. 산천재 담장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눈 앞에 있고, 마당 가운데에는 산천재를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는 홍매가 있다. ‘산청 3매’ 중 하나인 ‘남명매’이다. - 지리산둘레길
남명로200번길에서 계단을 올라와 산천재공원 담장을 따라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앞으로 왔다.
산천재 입구 앞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남명 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 제문비, 남명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남명기념관 바깥뜰 전신주 앞에 지리산둘레길 남명기념관 이정목이 서 있다. 위태 11.0km, 운리 12.6km 지점이다.
남명기념관 안뜰 출입문인 성성문 왼쪽에 '산청 조식 유적' 설명안내판, 성성문 오른쪽 벽에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성성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남명기념관, 그 왼쪽에 남명 입상, 그 오른쪽에 여재실, 뒷산에 남명 묘지가 자리한다.
남명 입상 좌우로 남명선생 신도비와 국역비, 단성현감사직소비와 무진봉사비가 서 있고,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남명기념관 오른쪽에 있는 여재실로 이어간다.
위패를 모신 여재실(如在室)과 그 오른쪽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뒷산에 남명 묘지가 있다.
여재실(如在室)은 조선시대 유학자 남명(南冥) 선생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숙부인(淑夫人)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묘(家廟)이다. 가묘는 서원(書院)의 사당(祠堂)과 구별하여 별묘(別廟)라고도 한다. 여재실의 이름은『예기(禮記)』에서 따온 것으로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라는 의미이다. 매년 가묘에 모신 세 분의 기일(忌日)과 설, 추석, 그리고 동지(冬至)에는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 설명안내판
남명기념관 여재실 뒷산에 남명 선생 묘지와 둘째 부인 은진 송씨 부인 묘지가 있다.
남명 선생 묘소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조식(1501-1572)의 산소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직접 묫자리를 고른 곳이라고 한다.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는 그의 가장 친한 벗이었던 성운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선생의 무덤 아래에는 숙부인인 은진 송씨의 무덤이 있다. 한편 정경부인의 산소는 부인의 고향인 김해 산해정(문화재자료 제125호) 앞산에 있다. 산소 아래에는 과거에 세웠던 비석들을 모아 놓았다. 산소의 왼쪽은 제사 때 제물을 준비하는 장소이고, 오른쪽은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10일에 선생의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숙부인(淑夫人) : 조선 시대 정삼품 당상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면 등급, 정부인의 아래. ○정경부인(貞敬夫人) : 조선 시대 정일품, 종일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지위. ○김해 산해정 : 김해시 대동면, 조식 선생이 18년간 강학했던 곳. - 설명안내판
위쪽에 남명 선생 묘지가 있고, 아래쪽에 두 번째 부인 은진 송씨 묘지가 있다.
숙부인 은진 송씨 부인은 남명 조식 선생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남명 조식 선생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남명 선생은 첫 부인 정경부인 남평 조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차산(次山)은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청 덕산으로 이주할 때 조씨 부인은 김해에 남아서 첫 부인의 묘는 김해에 있다고 한다.
남명 선생 두 번째 부인 은진 송씨는 숙부인에 봉해졌다.
묘지 왼쪽에 부인 은진송씨 묘갈명 번역비가 서 있다. 2012년 3월 29일 세워졌다. 둘째 아들 차마(次磨)가 묘갈명을 썼다.
아! 우리 어머니 송(宋)씨가 이처럼 숙부인에 봉해진 것은 큰아들 차석(次石)이 부모의 공덕으로 대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은전이 있었다. 그 선조는 은진(恩津) 사람이니 증조의 휘는 여림(汝霖)이며 군수다. 의정 김국광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의정은 영의정 익성공 황희(黃喜)의 손서이다. 군수가 세적(世勣)을 낳으니 부사직이요, 이 분이 인(璘)을 낳으니 부사정이다. 부인은 부사정의 따님이다. 외조부는 김맹손(金孟孫)이니 부사과(副司果)이다. 가정 임진(1532) 십이월 이십구일에 부인이 태어났다. 나이 십사오 세에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 미덕을 일컬었다. 부인이 십팔세에 선정승(先政丞) 부군에게 시집오니 행동이 단아하면서도 무거웠고, 성품이 성실하면서도 고상하여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온화엄중하였다. 향년이 일흔아홉이니 만력 경술(1610) 십이월 십팔일로 고종(考終)하여 이듬해 봄에 선부군 묘 아래에 장례하였다. 부인은 삼자일녀(三子一女)를 낳았다. 장남 차석(次石)이 세 번이나 현감이 되었고, 그 다음은 차마(次磨)이니 또한 현감이 되었으니 곧 불초이다. 그 다음은 차정(次可)이니 만호이고 경덕궁 위장(衛長)이요 딸은 군수 조신도(趙信道)에게 시집가서 무후하고 현감이 아들 둘과 딸 하나 이자일녀(二子一女)를 낳으니 딸은 만호 성기수에게 시집가서 무후하고 아들 진명 (晉明)은 부주부(部主簿)다. 3녀 1자를 낳으니 큰딸은 사인(士人) 정온(鄭穩)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다음은 사인 여수(余修)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다음은 사인 정일장(鄭日章)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어리다. 그 다음 도명(道明)은 서다. 나는 5자 1녀를 낳으니 장자는 죽고 다음은 경명(敬明)이니 사과(司果)인데 오자삼녀(五子三女)를 낳았다. 딸은 부참봉(部參奉) 정이례(鄭以禮)에게 시집가서 한 아들을 낳았다. 다음은 익명(益明)이니 일녀일자를 낳았고, 다음은 복명(復明)과 하명(夏明)이다. 차정(次可) 위장(衛長)은 이자일녀(二子一女)를 낳았다. 아들 준명(俊明)은 생원인데 육자일녀 (六子一女)를 낳았고, 딸은 정위(鄭頠)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 다음 극명(克明)은 삼자일녀(三子一女)를 낳았고, 딸은 사인 심자엽(沈自燁)에게 시집가서 일녀를 낳았다. 아! 선자(先子)께서 일찍이 큰아들 차산(次山)을 잃고 늦게야 불초 등 세 아들을 두어 자손이 50여 인이다. 하늘이 선자로 하여금 뒤가 없지 않게 한 것이니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다음과 같이 명하노라.부인의 근본인 본종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네. 우리 선자(先子)를 모시어 아름다운 덕 거듭 무성하셨네. 옛날에 어진 아내로 이름난 맹광(孟光)이 있었다더니 오늘 내가 몸소 뵙게 될 줄이야. 백천년 만에 마땅히 아름다운 법도를 구했다네. 나의 명(銘)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에 있는 것이라네. 묘석에 새기어 다함없기를 보이고자 하노라.
숭정 이년(1629년) 삼월 일에 아들 차마(次磨) 삼가 지음. 국역비건립추진위원장 덕천서원 원장 이현재(李賢宰) 추진. (사)남명학연구원부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병련(朴丙鍊) 번역. (사)남명학연구원 부이사장 十二대손 조옥환(曺玉煥) 건립. 2012년 3월 29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문이 마모되어 새 묘비를 세우고 옛 묘비(墓碑)들을 은진 송씨 묘지 옆에 모아 놓았다. 옛 모비에 6·25전쟁 때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오른쪽에 망주서, 묘 앞에 혼유석, 묘 오른쪽에 묘비와 남명 선생 묘갈명 국역비가 있다. 묘비에 적힌 '징사(徵士)'는 학행이 뛰어난 학자로서 나라에서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선비를 이른다고 한다.
徵士增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가 적힌 묘비는 선생 사후 385년인 1956년 10월 다시 세웠으며, 오른쪽에 2009년 10월 9일 세운 문정공 남명 선생 묘갈명 국역비가 있다. 어릴 때부터 남명의 벗이었던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쓴 묘갈명(墓碣銘) 번역문을 남명학연구원 사이트에서 옮겨온다.
조(曺)씨는 옛날 대성(大姓)으로 대대(代代)로 인물이 났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벼슬이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이었던 서(瑞)는 덕궁공주(德宮公主)의 아들이시다. 그 뒤를 이어 더욱 번창하고 현달(顯達)하여 오다가 조선조초(朝鮮朝初)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은(殷)은 공(公)의 고조(高祖)이시며, 증조(曾祖) 안습(安習)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조(祖) 영(永)은 벼슬하지 않았고, 부(父) 언형(彦亨)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이조정랑(吏曹正郎),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니 성품이 개결(介潔)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충순위(忠順衛) 국(菊)의 따님으로 규중(閨中) 법도가 엄하여 군자를 섬기는 데 실덕함이 없었다. 공(公)은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식(植)이요, 자(字)는 건중(楗仲)이라 하였다. 나면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아이 때부터 정중(靜重)하기가 어른 같아서 같은 또래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장난감을 손에 대지 않았다. 판교공(判校公)이 특히 사랑하여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히고 시서(詩書)를 가르치니 문득 입으로 따라 외워 잊지 않았다. 8, 9 세 때에 병을 앓아 자리에 누웠는데, 어머니가 얼굴에 걱정스런 빛을 띠우자, 공(公)은 몸을 가누고 기운을 차려 조금 나은 것같이 하며 아뢰기를 "하늘이 사람을 냄에 어찌 부질없이 하였겠습니까? 더욱이 제가 사나이로 태어났음은 하늘이 저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주고 그를 해내게 하려 함이었을 것이니 제가 오늘 갑자기 요절(夭折)할 것이라는 근심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남에 널리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 좌류문(左柳文)을 좋아하여 문장이 깔끔하고 힘이 있었다. 풍물(風物)을 읊고 사실(事實)을 기록함에 처음엔 생각을 거친 것 같지 않다가 점차 문사(文辭)가 장엄(壯嚴)하고 의리(義理)가 정미(精微)하여 삼연(森然)히 율도(律度)가 있었다. 나라에서「책(策)」으로 선비를 뽑는 과거를 치름에 유사(有司)에게 글을 올리니 답안(答案)을 본 유사(有司)가 크게 놀라 세 번씩이나 1, 2등으로 뽑은 일이 있고, 이에 고문(古文)을 배우려는 자가 다투어 서로 전송(傳誦)하면서 본보기로 삼기까지 하였다.
가정(嘉靖) 5년(26세) 판교공(判校公)이 세상을 뜸에, 서울로부터 체백(體魄)을 모셔와 고향에 장사지내고 어머님을 맞이하여 돌아와 봉양하였다. 공(公)은 어느 날 글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가 말한「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씨(顔氏: 顔淵)의 학문을 학문으로 한다.」고 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뜻을 가다듬고 분발하여 육경사서(六經四書) 및 주정장주 (周程張朱)의 유적(遺籍)을 강송(講誦)하기 시작, 밤낮으로 체력과 정신이 다하도록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스스로 터득하기를 학문을 함에 있어 지경(持敬)보다 더 요긴(要緊)함이 없다 하여 주일공부(主一工夫)에 공(功)을 들여, 혹여 자신이 혼미할까 늘 정신을 깨우치고 또 깨우쳤으며 이로써 몸과 마음을 수련하였다. 또 학문을 함에 있어 과욕(寡欲)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하여 극기공부(克已工夫)에 치력(致力)하여 마음속의 잡된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천리(天理)를 함양(涵義)하면서 특히 보고 듣지 못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을 계구(戒懼)하고 드러나지 않는 그윽한 곳에서도 자신을 돌보고 살피어 지(知)함이 이미 정(精)했으나 더욱 정하기를 구하고 행(行)함에 이미 힘이 있었으나 더욱 힘을 기울였다. 자신의 체험을 반성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본무(本務)를 삼아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궁극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했다.
24년(45세) 어머님의 상을 당하여 아버님 산소 좌강(左岡)에 장사지냈다. 공(公)은 밝은 지혜와 높은 식견을 갖추어 선비로서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계기에 대해 밝았으니, 일찍이 세상이 쇠하고 도(道)가 허물어져 인심이 변하고 풍속이 각박하여 정치가 해이해져 있음을 간파했고, 또 여러 번의 사화(士禍)를 통하여 어진이의 앞길이 험난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禍)의 기미가 잠재해 있음을 알고, 이런 시대를 당해서 비록 난세를 만회(挽回)하고 인심을 도화(陶化)하려 한다 해도 도(道)가 때를 만나지 못한지라 끝내 자신이 배운 바를 펼 수 없음을 짐작하여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벼슬을 구하지 않아, 뜻을 거두어 들여 물러가 산야(山野)에 묻히니 스스로 남명(南冥)이라 호(號)하고, 지은 정자를 산해(山海), 지은 집을 뇌룡(雷龍)이라 이름하고, 최후로 두류산(頭流山) 물굽이 구름골짜기에 들어가 8, 9칸의 집을 세우니 편 액을 산천재(山天齋)라 하고 깊이 잠기어 스스로를 닦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융경(隆慶) 원년(元年: 67세) 지금의 임금(宣祖)이 즉위하면서 불렀으나 사양하고, 이어 또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글을 올려 구급(救急)」 두 글자로 헌신(獻身)에 대신한다 하였으며 아울러 시폐(時弊) 열 가지를 아뢰었다. 다음 해 왕이 또 부르자 역시 글을 올려 이르기를 「치리(治理)하는 길은 임금 자신이 선(善)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는 반드시 경(敬)으로써 주(主)를 삼아야 한다」하고, 특히 서리(胥吏)들의 폐단(弊端)을 극진(極陳)하였다. 융경(隆慶) 3년 (69세)에 나라에서는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을 내렸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신미년(71세)에 큰 흉년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내리니 글로써 감사함을 표하고 여러 번 헌책(獻策)한 바가 시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 적, 거듭 서둘러 시행할 것을 촉구하니 그 말이 참으로 직절(直切)하였다. 임신년(72세)에 병으로 눕자 임금은 의약(醫藥)을 보내어 고치려 하였으나 그것이 남명(南冥)에게 이르기 전 2월 8일에 운명(殞命)하니 향년(享年) 72세요, 산천재(山天齋) 뒷산을 택하여 4월 6일에 장사지냈다.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풍신(風身)이 우뚝하였다. 몸가짐이 단엄(端嚴)하고 직방(直方)하며 기개(氣槪)가 강의정민(剛毅精敏)하여 조행(操行)에 과단성이 있고 움직임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눈으로는 음란함을 보지 않고 귀로는 엿듣지 않았다. 장경(莊敬)한 마음을 늘 속으로 간직하여 태만한 얼굴빛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항상 유실(幽室)에 잠거(潜居)하여 발을 담장 밖에 내딛지 않아, 비록 지붕을 맞대고 사는 자일지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새벽 닭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관대(冠帶)를 정제하고 자리를 바로하고 죽은 듯이 앉아 있으면 어깨와 등이 꼭 곧아 바라보기에 마치 인형을 빚어 놓은 것 같았다. 책상을 정리하고 책을 펴면 마음과 눈이 함께 이르러 묵관잠사(默觀潛思)할 뿐 입으로 응얼대는 소리를 내지 않아 방안이 고요하기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단정한 용모와 위엄 있는 행동거지는 느릿하고 단아하여 스스로 규범이 있었다. 비록 졸지에 창황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상도(常道)를 잃지 아니하여 참으로 사람들을 감동케 할 만했다. 집에 있어서는 장중(莊重)한 모습으로 뭇 사람들을 대함에 집 안팎 분위기가 늘 숙목(肅穆)했고 가까이에서 모시는 아랫것들이라 할지라도 머리를 매만지고 옷깃을 단정히 하지 않고서는 감히 그 앞에 나아가지 못했으며, 비록 부인(夫人)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했다. 벗을 취함에 반드시 단정함이 있었으니 그가 벗할만 하다 여기면 비록 포의(布衣)라도 왕공(王公)처럼 높이어 예경(禮敬)을 다하고, 벗할만 하지 못하다 여기면 벼슬이 아무리 높다 해도 무지렁이같이 여겨 함께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때문에 사귄 벗은 모두 학행(學行)과 문예(文藝)가 있는 당대의 명유(名儒)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사람 보는 눈이 명석하여 아무도 그를 속일 수가 없었으니, 어느 날 청반(清班)에 올라 매우 이름 높은 신진소년(新進少年)이 있었는데 공은 그를 한번 보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의 재주를 믿고 오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을 보니 뒷날 어진 이를 죽이고 유능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반드시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다」 하더니 그 후 과연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르자 몰래 흥괴들과 결탁, 법을 농락하고 위세를 행하여 사류(士類)들을 잡아 죽였다. 또 선비 중에 문재(文才)는 있는 데도 과거에 오르지 못하여 음흉하고 남을 시기하며 어진 이를 원수처럼 대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우연히 어떤 모임에서 그를 보자 물러나와 내 그 사람의 눈썹 사이를 살펴보니 그 사람됨이 겉으로는 화평(和平)한 것 같으나 속에는 화심(禍心)을 품고 있어, 만일 그로 하여금 위(位)를 얻고 뜻을 펴게 한다면 선인(善人)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했다. 벗들은 모두 공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에 감복하였다.
매양 국기일(國忌日)을 당함에 풍류(風流)를 듣지 아니하고 고기를 먹지 아니했다. 하루는 두서넛 이름난 벼슬아치가 공을 초청하여 절간에서 모였는데 술자리를 베푸는지라 공이 넌지시 "모대왕("某大王)의 기일(忌日)이 오늘인데 그대들은 어찌 이를 잊었는가?" 하니 좌중이 놀라 사죄하고 급히 이를 물리치게 하였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함에 돈독하여 어버이 곁에 있을 때는 반드시 부드러운 얼굴을 짓고 극진히 봉양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으며,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반찬 또한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상복(喪服) 중에 있어서는 슬픔이 극진하여 피눈물을 흘렸고,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새벽 저녁으로 잠시도 궤연(几筵)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비록 병에 걸려도 빈소를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제사(祭祀)지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서 굽고 지짐이 알맞은가? 씻고 닦음이 깨끗한가를 부엌어미에게만 맡 기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직접 살피곤 하였다. 조문(弔問間)하는 손이 오면, 반드시 엎드려 곡(哭)하며 절할 뿐 같이 앉아 말하지 않았고, 아랫것들에게 분부하기를 상기중(喪期中)에는 여간한 집안일은 와서 아뢰지 말라 하였다.
남명(南冥)은 아우 환(桓)과의 우애(友愛)가 심히 돈독하였다. 형제는 지체(支體)라 헤어질 수 없다 하여 한 담장 안에서 동거하며 같은 문을 출입했으며 밥상을 맞대고 이불을 같이 덮어 늘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가산(家産)을 줄여서 형제 중 가난한 사람에게 갈라 주고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들지 않았다. 남이 궂은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마음 아파하며 달려가 물불을 구하듯 돌보았다. 공은 세상을 차마 잊지 못하여, 늘 나라를 걱정하고 생민(生民)들을 불쌍히 여겼다. 매양 맑은 하늘, 밝은 달밤을 맞이하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마치자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공(公)이 왜 그러는지를 알지 못했다. 공(公)은 만년(晩年)에 가면서 학력(學力)이 더욱 나아가고 터득한 경지가 더욱 심오해져서 사람을 가르침에 각각 그 재질에 따라 독실하게 하였고, 질문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의문 나는 뜻을 자세히 분석하고 상세하게 설명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철저히 깨닫게 한 뒤에야 그쳤다. 또 학자들을 경계하기를「오늘의 학자는 절실한 당면문제는 놓아두고 높고 먼 데로 나가려고만 하니 그 병폐(病弊)가 적지 않다. 학문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을 받들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만일 이를 힘쓰지 않고 문득 성명(性命)의 오묘함만 궁채(窮採)하려 든다면, 이는 인사(人事)를 바탕으로 해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그 실(實)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옛 성현(聖賢)의 유상(遺像)을 그려서 걸어놓고 아침마다 봉심(奉心)하는 예(禮)를 올리고 마치 살아계신 스승한테서 직접 귀와 눈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같이 했다. 일찍이 이르기를「학자는 잠을 많이 자면 안 되나니, 그 사색공부(思索工夫)는 밤중에 더욱 전일(專一) 할 수 있다」하였고 매양 책을 읽음에 긴요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붓을 들어 적어두니 이름하여 학기(學記)」라 했다. 손수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리고 거기에 명(銘)을 붙였으며 또 천도(天道)와 심(心), 성(性), 정(情) 그리고 도(道)를 찾아가고 덕(德)에 들어가는 과정을 도표로 그렸는데, 그러한 유(類)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또 창(窓)과 벽 사이로 「경의(敬義)」 두 자를 크게 써 붙여 학자에게 보이고 스스로를 경각시킴이 간절했으니 병이 위독한 때도「경의(敬義)」를 들어 설명하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훈계(訓戒)할 정도였다.
그가 죽어감에 부인(婦人)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물리치고 죽음에 태연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조용히 잠자듯 운명하였다. 나라에서는 부속(賻粟)을 보내 사제(賜祭)하고 사간원 대사간(司院 大司諫, 뒤에 領議政에 높여짐)을 증(贈)하였다. 슬프다!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道)를 닦고 덕(德)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그와 견줄 만한 이가 드물어 또한 옛 어진이가 추배(追配)하여 후학들의 종사(宗師)로 삼을 만했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아 주기를 바랐으리요? 백세 먼 뒷날 아는 이가 나와 알아 줄 것을 기다릴 수밖 에···. 운(運: 成大谷의 이름)은 외람되게도 교우(交友)의 반열에 끼어 따라 노닌 지가 가장 오래여서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의 덕행(德行)을 보아왔고 또한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있으니 이는 모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요, 남의 이야기를 귀로 들은 것이 아니니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끝으로 명(銘)을 쓰노니, 하늘이 주신 덕(德)이 어질고 또 곧아서 그를 한 몸에 함양함에 스스로 쓰기에는 족했지만,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하여 그 은택(恩澤)이 세상에 널리 미치지 못했으니 이것이 시운(時運)이든가 운명(運命)이든가? 백성들이 복 없음을 슬퍼하노라. - 남명학연구원
남명 묘지 출입구로 나와 남명로를 따라 덕산시가지 방향으로 올라간다.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중산·하봉 능선이 보인다.
‘덕(德)이 있는 산(山)’ 덕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예전 덕산은 현재의 시천면과 삼장면을 두루 아우르는 지명이었으나, 현재의 덕산은 시천면 소재지 일대를 통칭하는데, 행정구역상 명칭은 덕산이 아닌 시천면 사리(絲里)이다. 덕산은 시천의 물길과 삼장천의 물길이 합해지는 양단(兩端)의 두물머리이며, 여기서부터는 덕천강(德川)이 된다. 남명선생은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노래하였다.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 지리산둘레길
남명로를 따라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뒤쪽을 지나 앞에 보이는 양당마을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지리산 천왕봉이 당당하다.
양단수를 바라보는 양당(兩塘)마을 앞을 지나간다. 지리산 천왕봉·중산·하봉 능선이 더 가깝게 보인다.
남명로가 정면으로 구곡산을 바라보며 이어진다.
남명로를 따라 구곡산을 바라보며 시외버스 터미널 덕산 버스정류장을 지나간다.
시천면 사리 연화마을 앞을 지난다. 더에이스 아파트가 앞에 있고, 덕산빌라 입구에 창녕 조씨 문정공 남명선생 종중화합의 날 알림막이 펼쳐져 있으며, 지리산 천왕봉이 중앙 뒤에 보인다.
산청군 시천면 면소재시 사리(絲里) 지역의 중심지 덕산시가지의 산청 시천우체국 앞을 지나간다.
덕산약초시장 앞에 산청군농협 덕산지점과 하나로마트가 있고, 남명로는 원리교를 건너 시천면 원리로 넘어간다. 원리교 앞에서 덕천강 둑방을 따라 남명기념관으로 내려가 남명 묘지를 들러 이곳으로 되돌아왔다. 약초시장 앞에서 도보여행팀 안내버스가 대기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