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있어서 기초, 수행의 길잡이
행복한 삶 … 불자가 되는 ‘첫 관문’
자신의 삶 책임있게 가꾸어 가게 돼
야사 존자의 부모가 처음으로 받아
삼보에 귀의하는 맹세를 ‘삼귀의계(三歸依戒)’라고 하는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삼보를 의지처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므로 계에 해당한
다. 한국불교의 경우 다양한 부류의 불자들이 있다. 불교대학에서 기초교리와 각종 경전을 공부하거나 선원에서 안거를 하는 경우도 있고, 불교에 대해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서 1년에 몇 번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다니는 경우도 있으며 절에 다니지는 않지만 부모의 종교가 불교이거나 불교적인 분위기가 좋아서 스스로를 불교와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흔히 불자라 하는데 절에 다닌다고 해서 불자라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소리 내어 삼보에 귀의하는 것(三歸依)과 다섯 가지 계율(五戒)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부터 불자라 할 수 있다. 가령 매일 절에서 살면서 기도나 참선을 평생토록 하고, 팔만대장경을 모두 외우고, 힘써 바라밀 실천을 하는 신심 있는 사람이라도 삼귀의와 오계를 맹세하지 않았으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삼귀의와 오계는 불자가 되는 첫 번째 관문이며 성불할 때까지 늘 함께 해야 하는 소중한 것이다.
불자가 된 후 법회를 할 때나 예경을 할 때 반드시 삼귀의와 오계를 소리 내어 외워서 신심을 굳게 하고 깨달음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자량이 되게 해야 하는데 이를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불교의 경우 법회를 시작할 때 삼귀의를 하는 것은 정착되어 있으나 오계를 외우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남방불교의 경우 삼귀의와 오계를 간절하게 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도 이러한 간절한 모습의 법회진행을 보완해서 실시했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삼귀의를 간절하게 꼭 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선생경(善生經)>에서는 삼귀의를 맹세해야 하는 까닭을 “모든 고통을 깨트리고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을 얻기 위함”이라 했고, <출요경(出曜經)>에는 “삼보에 귀의하면 원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천인이 공양하는 바가 되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영겁에 걸쳐 복을 받는다”고 했으며, <희유교량공덕경(稀有校量功德經)>에서는 “사천하와 육욕계를 교화하고 일체 중생이 아라한과를 얻는 것보다 삼보에 귀의하는 공덕이 더 크다”라고 했다.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은 단을 차리고 격식을 갖추어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한 분의 스님 앞에서 “저 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세 번 말하면 삼귀의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삼귀의계는 야사존자의 부모가 최초로 계를 받는 경우가 되는데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방법상의 변화는 없다. 다만 얼마나 엄숙하고 장엄하게 삼귀의를 해서 불퇴전의 신심으로 역할을 하게 되고, 수행의 점차를 빨리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게 하느냐의 문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삼귀의계를 지니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는 기초와 같고, 수행이력에 있어서는 길잡이가 되며, 행복한 삶으로의 관문이 된다. 삼귀의계를 통해 불자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고 부처님과 같은 큰 자비심을 일으키게 되며 단정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스스로의 삶을 책임 있게 가꾸어 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모습의 당당한 불자는 사회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받게 되어 성공한 삶이 가능해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불보와 법보에 대해서는 고민 없이 귀의할 수 있으나 승보에 대해서는 주저하게 된다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화합승가로서의 청정한 모습과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못하고 승가가 사회를 걱정하고 밝고 향기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회가 승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다짐할 수 있도록 여법하고 청정한 승가공동체가 복원되고 유지되도록 힘쓰는 일이 이 시대의 승가가 이루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불교신문3190호/2016년4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