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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줄요약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중생이 잘못된 질문에 붙들려 더 깊은 분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名身與句身,及形身差別,
凡夫愚計著,如象溺深泥。
이 구절은 명신·구신·형신, 곧 이름과 문장과 형상에 대한 대목을 마무리하는 게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30회차는 그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번 대목에서 부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십니다.
질문에는 바른 질문이 있고, 잘못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질문을 많이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질문의 양보다 질문의 방향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질문이 진리를 향해 열려 있으면 공부가 되지만, 질문이 분별을 굳히는 방향으로 가면 오히려 미혹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인가, 다른가.
몸과 생명은 같은가, 다른가.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열반은 있는가, 없는가.
수행자와 수행은 같은가, 다른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하나인가, 둘인가.
겉으로 보면 깊은 철학적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묻습니다.
그 질문이 정말 해탈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분별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어떤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합니다. 무기는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회차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침묵은 무지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침묵은 자비입니다.
부처님의 침묵은 분별을 멈추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3. 한문원문
復次,大慧!未來世智者,當以離一異、俱不俱見相,我所通義,問無智者。
부차, 대혜! 미래세지자, 당이리일이, 구불구견상, 아소통의, 문무지자.
彼即答言:「此非正問。」
피즉답언, 차비정문.
謂色等常無常,為異不異?
위색등상무상, 위이불이?
如是涅槃、諸行相所相、求那所求那造所造、見所見、塵及微塵、修與修者,如是比展轉相。
여시열반, 제행상소상, 구나소구나조소조, 견소견, 진급미진, 수여수자, 여시비전전상.
如是等問,而言佛說無記止論。
여시등문, 이언불설무기지론.
非彼癡人之所能知,謂聞慧不具故。
비피치인지소능지, 위문혜불구고.
如來、應供、等正覺,令彼離恐怖句故,說言無記,不為記說。
여래, 응공, 등정각, 영피리공포구고, 설언무기, 불위기설.
又止外道見論故,而不為說。
우지외도견론고, 이불위설.
大慧!外道作如是說,謂:「命即是身。」
대혜! 외도작여시설, 위 명즉시신.
如是等無記論。
여시등무기론.
大慧!彼諸外道愚癡,於因作無記論,非我所說。
대혜! 피제외도우치, 어인작무기론, 비아소설.
大慧!我所說者,離攝所攝,妄想不生。
대혜! 아소설자, 이섭소섭, 망상불생.
云何止彼?
운하지피?
大慧!若攝所攝計著者,不知自心現量,故止彼。
대혜! 약섭소섭계착자, 부지자심현량, 고지피.
大慧!如來、應供、等正覺,以四種記論為眾生說法。
대혜! 여래, 응공, 등정각, 이사종기론위중생설법.
大慧!止記論者,我時時說,為根未熟,不為熟者。
대혜! 지기론자, 아시시설, 위근미숙, 불위숙자.
復次,大慧!一切法,離所作因緣不生,無作者故,一切法不生。
부차, 대혜! 일체법, 이소작인연불생, 무작자고, 일체법불생.
大慧!何故一切性離自性?
대혜! 하고일체성리자성?
以自覺觀時,自共性相不可得故,說一切法不生。
이자각관시, 자공성상불가득고, 설일체법불생.
何故一切法不可持來,不可持去?
하고일체법불가지래, 불가지거?
以自共相,欲持來,無所來;欲持去,無所去;是故一切法,離持來去。
이자공상, 욕지래, 무소래, 욕지거, 무소거, 시고일체법, 이지래거.
大慧!何故一切諸法不滅?
대혜! 하고일체제법불멸?
謂性自性相無故,一切法不可得,故一切法不滅。
위성자성상무고, 일체법불가득, 고일체법불멸.
大慧!何故一切法無常?
대혜! 하고일체법무상?
謂相起無常性,是故說一切法無常。
위상기무상성, 시고설일체법무상.
大慧!何故一切法常?
대혜! 하고일체법상?
謂相起無生性,無常常,故說一切法常。
위상기무생성, 무상상, 고설일체법상.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이시, 세존욕중선차의이설게언.
記論有四種,一向及詰問,
기론유사종, 일향급힐문,
分別及止論,以制諸外道。
분별급지론, 이제제외도.
有及非有生,僧佉毘舍師,
유급비유생, 승거비사사,
一切悉無記,彼如是顯示。
일체실무기, 피여시현시.
正覺所分別,自性不可得,
정각소분별, 자성불가득,
以離於言說,故說離自性。
이리어언설, 고설리자성.
4. 한글번역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하나와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의 견해를 떠나, 내가 통달한 뜻으로 지혜 없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곧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색 등의 법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서로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다.
또 열반, 모든 행, 형상과 형상을 가진 것, 구나와 구나를 가진 것, 만들어진 것과 만드는 것, 보는 것과 보이는 것, 티끌과 미세한 티끌, 수행과 수행자 등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서로 전개하여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부처님께서 무기와 지론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들음으로 생기는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래·응공·등정각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운 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무기라고 말하며, 굳이 답을 정해 말씀하지 않으신다.
또 외도의 견해와 논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혜여, 외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곧 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무기론이다.
대혜여, 저 모든 외도들은 어리석어서 원인에 대해 무기론을 세우지만, 그것은 내가 말하는 바가 아니다.
대혜여, 내가 말하는 것은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을 떠나,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을 멈추게 하는가.
대혜여,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에 집착하는 자는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대혜여, 여래·응공·등정각은 네 가지 기론으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대혜여, 지기론은 내가 때때로 말하지만, 근기가 아직 익지 않은 이를 위한 것이지, 근기가 익은 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다시 대혜여, 일체법은 만들어진 인연을 떠나서는 생기지 않으며, 지은 자가 없기 때문에 일체법은 생기지 않는다.
대혜여, 왜 일체의 성품은 자성을 떠났는가.
스스로 깨달아 관찰할 때, 자상과 공상이 얻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일체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일체법은 붙잡아 오거나 붙잡아 갈 수 없는가.
자상과 공상을 붙잡아 오려 해도 오는 바가 없고, 붙잡아 가려 해도 가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오고 감을 떠났다고 말한다.
대혜여, 왜 일체법은 멸하지 않는가.
성품과 자성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일체법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혜여, 왜 일체법은 무상한가.
모습이 일어나는 것이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일체법은 무상하다고 말한다.
대혜여, 왜 일체법은 항상한가.
모습이 일어나지만 그 성품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며, 무상함이 곧 항상함이기 때문에 일체법은 항상하다고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기론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곧 한결같이 답함과 되물어 답함과
분별하여 답함과 논의를 멈추는 답이다.
이것으로 모든 외도를 제어한다.
있음과 있지 않음에서 생긴다는
승거와 비세사의 견해들은
모두 무기에 해당하니,
그들은 이와 같이 드러낸다.
바른 깨달음으로 분별해 보면
자성은 얻을 수 없고,
언어를 떠났기 때문에
자성을 떠났다고 말한다.”
5. 경전의 종지
1) 질문이 모두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대목은 질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질문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르면 물어야 하고, 궁금하면 따져야 합니다. 불교에서도 질문은 중요합니다. 대혜보살이 질문하지 않았다면 능가경의 깊은 법문도 펼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질문에도 방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질문이 마음을 밝히는 쪽으로 향하면 공부가 됩니다.
질문이 분별을 굳히는 쪽으로 향하면 장애가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왜 괴로운가”라는 질문은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괴로움은 영원히 있는가, 없는가, 하나인가, 다른가”라는 식으로 끝없이 따지기만 하면 실제 괴로움의 뿌리는 보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질문 자체를 막으신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전제 위에 선 질문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2) 하나인가 다른가 하는 질문의 함정
원문은 “離一異、俱不俱見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라는 견해, 다르다는 견해, 함께한다는 견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떠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구분별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대개 둘 중 하나를 고르려 합니다.
같은가, 다른가.
있는가, 없는가.
항상한가, 무상한가.
함께인가, 따로인가.
이런 방식은 일상에서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묻는 자리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법은 우리가 만든 논리의 칸 안에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하나라고 하면 몸이 사라질 때 마음도 그대로 사라진다는 단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다르다고 하면 마음이 몸과 완전히 따로 존재한다는 상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양쪽 견해를 모두 떠나게 하십니다. 하나라고 붙잡지 말고, 다르다고 붙잡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능가경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질문이 자심현량을 보지 못한 데서 일어납니다. 자기 마음에 나타난 분별을 실체로 붙잡기 때문에, 하나니 둘이니 하는 논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3) 무기는 무지가 아니라 방편입니다
무기無記는 부처님께서 어떤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주지 않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부처님도 몰라서 대답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무기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기는 답하지 않음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침묵이 아닙니다.
잘못된 질문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한 침묵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은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몸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부처님은 사후에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은 겉으로는 깊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탈과 직접 관계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질문자가 이미 자기 견해를 세워 놓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해도 그 답은 다시 집착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때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침묵은 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침묵 자체가 답입니다.
“그렇게 묻는 마음을 보라.”
“그 질문을 붙잡는 자가 누구인가.”
“그 질문이 괴로움의 소멸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무기의 뜻입니다.
4) 지론止論은 논쟁을 멈추는 가르침입니다
원문에는 “止論”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론은 논의를 멈추는 것입니다. 여기서 멈춘다는 것은 무조건 토론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도의 잘못된 견해와 끝없는 분별 논쟁을 멈추게 한다는 뜻입니다.
논쟁은 때로 지혜를 밝히지만, 때로는 아집을 강화합니다.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말할 때, 논쟁은 수행이 아닙니다. 진리를 밝히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견해를 세우기 위해 묻는다면, 그 질문은 법문이 아니라 번뇌가 됩니다.
부처님의 지론은 이런 논쟁을 끊습니다.
답을 주지 않음으로써 질문의 방향을 돌립니다.
논리의 싸움을 멈추게 하여 마음의 뿌리를 보게 합니다.
말이 더 이상 번뇌를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지론의 자비입니다.
6. 심층 탐구
1) 왜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을 말하는가
원문은 “未來世智者”라고 시작합니다.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 훗날의 누군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 말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잘못된 논쟁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경전의 말은 더 많은 해석과 논쟁을 낳습니다. 이름과 문장과 형상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 사람들은 법을 깨닫기보다 법을 논쟁거리로 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이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른 질문은 분별을 강화하지 않습니다.
바른 질문은 분별을 비춥니다.
바른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착을 놓기 위한 것입니다.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은 말싸움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냐 둘이냐, 있다 없다, 같다 다르다 하는 논쟁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논쟁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입니다.
2) “此非正問”,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 없는 사람이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른 질문과 바르지 않은 질문의 구분입니다.
바르지 않은 질문은 대체로 전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아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갑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이미 고정된 자아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바로 그 고정된 자아가 없음을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그 질문에 그대로 답하면, 질문자의 잘못된 전제를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몸과 생명은 같은가, 다른가”라는 질문도 그렇습니다.
같다고 답하면 단견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르다고 답하면 상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답하면 또 다른 분별이 생깁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답해도 그것을 다시 하나의 견해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질문을 바꾸게 하십니다.
몸과 생명이 같은지 다른지를 따지기 전에,
그렇게 묻는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3) 색色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원문에는 “色等常無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색 등의 법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유위법은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무상하다”고 답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능가경은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색은 무상합니다. 몸도 변하고, 물질도 변하고, 감각의 대상도 변합니다. 그러나 무상하다는 말조차 잘못 붙잡으면 하나의 견해가 됩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말이 지혜로 쓰이면 집착을 놓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허무주의로 붙잡으면 “어차피 다 사라질 것”이라는 냉소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개념 답변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무상이라는 말도 방편입니다. 그 방편이 사람을 깨우면 법이고, 그 방편을 붙잡아 또 하나의 견해를 만들면 병입니다.
4) 열반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열반도 질문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열반은 있는가, 없는가.
열반은 행과 같은가, 다른가.
열반은 어떤 상태인가.
이런 질문은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열반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묻는 순간, 이미 열반을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열반은 탐진치의 불이 꺼진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눈앞의 물건처럼 “있는가 없는가”로 따지면 열반의 뜻에서 멀어집니다.
열반이 있다고 붙잡으면 상견이 됩니다.
열반이 없다고 붙잡으면 단견이 됩니다.
열반을 어떤 고정된 상태로 상상하면 또 다른 형상 집착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말하시지만, 열반이라는 말에 갇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능가경의 깊은 점입니다.
5)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원문에는 “見所見”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가 따로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계속해서 자심현량을 말합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모두 마음에 나타난 분별이라면, 그것을 둘로 나누어 고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하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라고 하면 현상 세계의 차별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둘이라고 하면 주체와 객체의 실체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능가경은 하나와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을 따지기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식 전체가 마음의 나타남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6) 수행과 수행자도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修與修者”가 나옵니다.
수행과 수행자입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자칫 “내가 수행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붙잡습니다. 그러면 수행도 아상이 됩니다.
나는 수행자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나는 남보다 깊이 안다.
나는 깨달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굳어지면 수행은 해탈의 길이 아니라 자아를 강화하는 길이 됩니다.
물론 수행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라는 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수행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수행자라는 자아를 키우면 능가경이 말하는 섭소섭, 곧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의 구조가 다시 생깁니다.
참된 수행은 수행한다는 상마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7) “攝所攝”을 떠난다는 것
이번 대목의 핵심 중 하나는 “離攝所攝”입니다.
섭攝은 붙잡는 작용이고, 소섭所攝은 붙잡히는 대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체와 객체입니다.
내가 붙잡는다.
무언가가 붙잡힌다.
내가 안다.
무언가가 알려진다.
내가 수행한다.
무언가가 성취된다.
이 구조가 생기면 곧 분별이 생깁니다. 능가경은 이것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조 자체가 자심현량을 알지 못한 데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을 바깥의 실체로 여기고, 그것을 붙잡으려는 자아를 세우면, 곧 고통이 생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을 동시에 비추어 보게 합니다. 그때 망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8) 근기가 익지 않은 이를 위한 지론
원문은 “止記論者,我時時說,為根未熟,不為熟者”라고 말합니다.
지기론은 내가 때때로 말하지만, 근기가 아직 익지 않은 이를 위한 것이지, 근기가 익은 이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근기가 익은 사람은 말이 나오기 전에 그 뜻을 압니다. 부처님의 침묵을 보고도 법을 압니다. 질문이 멈추는 자리에서 자기 마음을 돌이켜 봅니다.
그러나 근기가 익지 않은 사람은 계속 답을 요구합니다. 하나를 말하면 둘을 묻고, 둘을 말하면 셋을 따집니다. 끝없이 개념을 붙잡고 분별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때로 논의를 멈추는 가르침을 쓰십니다. 이것은 배척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더 깊은 논쟁에 빠지지 않도록 잠시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칼을 장난감처럼 붙잡고 있을 때, 먼저 칼을 내려놓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칼의 금속 성분을 설명하기 전에,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7. 선종·마음공부
1) 선문답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부순다
선종의 공안을 보면 스승이 제자의 질문에 엉뚱하게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런 답은 일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제자의 질문이 이미 개념과 분별 위에 서 있을 때, 스승은 그 분별의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질문의 뿌리를 끊습니다.
이것은 능가경의 지론과 통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선사는 제자의 분별에 맞장구치지 않습니다. 답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별로 답을 찾는 마음을 멈추게 합니다.
2) “왜 답을 안 해 주십니까”라는 마음
수행 중에 우리는 종종 답을 원합니다.
이것은 맞습니까, 틀립니까.
저 사람은 옳습니까, 그릅니까.
나는 잘하고 있습니까, 못하고 있습니까.
깨달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언제쯤 도달합니까.
그러나 스승은 때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때 제자는 답답합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이 바로 공부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답을 얻고 싶은 마음,
확정하고 싶은 마음,
불안을 없애기 위해 결론을 붙잡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을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恐怖句”, 곧 두려운 말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에 결론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급한 결론은 불안을 잠시 덮을 뿐, 근본적으로 없애지 못합니다.
참된 지혜는 결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붙잡으려는 마음을 비추는 것입니다.
3) 논쟁을 멈출 때 마음이 보입니다
말을 계속하면 마음이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화가 났을 때 우리는 논리를 만듭니다.
억울할 때 우리는 이유를 만듭니다.
집착할 때 우리는 정당성을 만듭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 숨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론입니다. 논쟁을 멈추는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보면, 그 말 밑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지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버림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멈추게 하시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닙니다. 말 뒤에 숨어 있는 무명입니다.
4) 바른 질문은 마음을 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이것은 있는가 없는가”보다
“나는 왜 이것을 붙잡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옳은가 그른가”보다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나는 깨달았는가 못 깨달았는가”보다
“지금 이 생각을 붙잡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분별을 키우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춥니다.
능가경의 질문은 언제나 자심현량으로 돌아갑니다. 바깥 대상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깥 대상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바임을 보는 것입니다.
8. 용어 풀이
1) 未來世智者
미래세의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미래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경전을 공부하는 수행자 전체를 가리킵니다.
2) 離一異
하나라는 견해와 다르다는 견해를 떠난다는 뜻입니다. 법을 하나로 고정해도 안 되고, 둘로 갈라 고정해도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3) 俱不俱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입니다. 어떤 두 법이 동시에 함께 있는가, 함께 있지 않은가 하는 분별을 말합니다.
4) 此非正問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질문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해탈로 향하지 않고 분별을 굳히는 질문을 가리킵니다.
5) 無記
부처님께서 어떤 질문에 대해 결정적으로 답하지 않으신 것을 말합니다.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있거나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6) 止論
논의를 멈추는 가르침입니다. 잘못된 견해와 끝없는 논쟁을 끊고, 분별의 뿌리를 보게 하는 방편입니다.
7) 聞慧
들음으로 생기는 지혜입니다. 경전과 법문을 듣고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계의 지혜입니다. 듣는 지혜가 부족하면 부처님의 무기와 지론을 오해하게 됩니다.
8) 恐怖句
두려움을 일으키는 말, 또는 중생을 불안하게 만드는 분별의 언어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이런 말에 붙들리지 않도록 무기를 설하십니다.
9) 外道見論
외도의 견해와 논쟁입니다. 상견, 단견, 유무, 일이 등의 분별에 집착하는 논의를 말합니다.
10) 命即是身
생명이 곧 몸이라는 견해입니다. 몸과 생명을 동일시하는 견해로, 부처님께서 무기로 다루신 잘못된 전제의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11) 攝所攝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입니다.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실체처럼 나누어 붙잡는 구조를 말합니다.
12) 自心現量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바입니다. 능가경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로, 바깥 경계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마음의 분별과 습기에 의해 나타난 것임을 뜻합니다.
13) 四種記論
네 가지 답변 방식입니다. 일향기, 힐문기, 분별기, 지론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와 질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답하십니다.
14) 一向記
한결같이 바로 답하는 방식입니다. 질문의 방향이 바르고 오해의 여지가 적을 때 분명하게 답하는 방식입니다.
15) 詰問記
되물어 답하는 방식입니다. 질문자의 전제와 의도를 되묻고 밝혀서 스스로 바른 방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식입니다.
16) 分別記
분별하여 답하는 방식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나누어 설명하는 답변입니다. 단순히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쓰입니다.
17) 止記論
논의를 멈추는 답변입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있거나 논쟁을 키울 때, 더 이상 답하지 않음으로써 분별을 멈추게 하는 방식입니다.
9. 결론
이번 30회차는 부처님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몰라서가 아닙니다. 질문자의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더 밀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은 답을 얻어도 더 어두워집니다.
바른 질문은 답을 얻기 전에도 마음을 밝힙니다.
하나인가, 다른가.
있는가, 없는가.
항상한가, 무상한가.
같은가, 다른가.
이런 질문들이 모두 쓸모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탈로 향하지 않고 분별의 놀이가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멈추게 하십니다.
무기는 무지가 아닙니다.
무기는 자비입니다.
지론은 회피가 아닙니다.
지론은 논쟁의 불을 끄는 법문입니다.
능가경은 여기서 다시 자심현량으로 돌아갑니다.
붙잡는 자와 붙잡히는 대상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논쟁을 멈추게 하십니다. 논쟁이 멈출 때, 비로소 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해야 할 공부도 같습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정답을 많이 아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남의 견해를 꺾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내가 왜 그 질문을 붙잡고 있는지 보는 것,
내가 왜 반드시 답을 얻으려 하는지 보는 것,
내가 왜 하나와 둘, 있음과 없음에 마음을 걸고 있는지 보는 것,
그것이 능가경이 말하는 마음공부입니다.
부처님의 침묵은 빈 침묵이 아닙니다.
그 침묵 안에는 분별을 멈추게 하는 깊은 자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말 너머의 법문을 듣기 시작합니다.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10. 참고문헌
『楞伽阿跋多羅寶經』, 求那跋陀羅 譯, 大正藏 T670.
『入楞伽經』, 菩提流支 譯, 大正藏 T671.
『大乘入楞伽經』, 實叉難陀 譯, 大正藏 T672.
中村元, 『佛教語大辭典』.
印順, 『如來藏之研究』.
鈴木大拙, 『The Lankavatara Su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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