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1.수원 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2. 수원 화성 답사 길잡이
본래 수원은 현재 화성시에 소재한 융건릉과 용주사가 위치하고 있던 곳의 지명이다.
정조가 아버지 장조의 능을 서울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있던 백성이 이
주하고, 왕이 머물 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수원에 화성이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수원성은 잘못된 말이고 원래 명칭인 화성이라 불러주어야 한다.
수원화성을 만든 사람
수원화성을 건축하라고 명령한 분은 정조왕이지만 만든 사람은 정약용이다.
수원화성과 관련된 이야기
수원화성은 거중기와,녹로등을 이용하여 쌓았다. 이 화성의 둘레는 5.744m,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이루었다. 또 화성은 중국,일본 등지에서 찾아볼수 없는 평산
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
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실용적인 구조로 되어있는 동양성곽의 백미라 할수있다.
수원 화성의 구조
* 성벽(城壁)
성벽은 원칙적으로 돌로 쌓지만 일부 방어시설은 전돌로 쌓은 곳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내지 6미터로 평 균 5미터 내외다. 그리고 성벽 위에 높이 1내지 1.2미터 정도의 여 장을 쌓고 여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놓았다. 성벽의 아랫부 분은 큰돌로 쓰고 위에는 작은 돌로 사용하였으며 성벽은 위로 올 라 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쌓았다. 이것을 구형이라 고 하는데 함경도 경성에 이와 같은 성벽이 있어서 그 효과가 우수 하여 취하였다고 전한다.
* 성문(城門)
수원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의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서울을 향한 북 문을 장안문, 반대 방향의 남문이 팔달문, 그리고 동서에 각 창룡문 과 화서문이 있다. 이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거의 같은 규모, 같은 형태이고 수원성의 남북 대문을 하는 구실을 하는 대표적 건 물이다. 장안문은 서울을 향하여 북향하고 서 있는데, 돌로 높이 쌓은 사다 리꼴의 육축 가운데에 홍예문을 내고 육축위에는 2층으로 된 장중 한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전면의 옹성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인 문의 형태가 서울의 남대문과 흡사하다.
* 암문(暗門)
성곽에는 흔히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 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데 이것이 암문이 다. 수원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곧 북암문 ,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이다. 북암문은 동북 각루 남쪽 약간 골짝이진 곳에 있어서 성밖에서는 눈 에 잘 띄지 않는다. 성벽에 따로 전돌로 벽을 쌓고 6척5촌, 너비 4척 의 아치문을 내고 그 위에 성가퀴를 나들었다.
* 수문(水門)
수원성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고 있 다. 따라서 성내에는 개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수문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성내네 북수문과 남수문이 있으며, 북수 문은 용연이라는 연목이 있는 비교적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있어 동북 각루를 세우는 등 장대하게 꾸몄으며 남수문은 소박하게 만 들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아치형 수문이 있 고 그 위에는 화홍문이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아치문의 위로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 성벽과 바짝 붙여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을 세웠다. 누각 사면에는 분합문을 달 고 동, 서, 남 3면에는 난간을 붙였다. 북쪽은 바로 성 바깥이 되므 로 전전돌로 성가퀴를 높이 쌓고 여러 개의 총구멍을 내었다.
* 적대(敵臺)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 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배치해두는 한편 적군 의 동태와접근을 감시 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 물이다. 화성 축성대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활과 화살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 공심돈(空心墩)
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이미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해안 주 변에 설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심돈, 곧 돈의 내부가 비도록 한 것은 아마도 수원성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수원성에는 서북 공 심돈,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세군데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위에 있다. 치의 높이 15척이고 그 위에 전돌로 돈대를 네모지게 높이 쌓았다. 높이 18척이고 아래의 넓이는 23척, 위의 넓이는 21척으로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고 사닥다리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 등을 뚫었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 위에 세워져 있다. 제도는 서북 공심돈과 같고 규모가 약간 작다. 꼭대기에는 건물을 지었는데 판 문을 달지 않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 각루(角樓)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 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있는데 이를 각루라고 한 다. 동북 각루, 서북 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있다. 방화수류정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그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변 경관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로, 전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북쪽 수문인 화홍문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간 위치에 있다. 애래쪽으로 용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벽에 대어서 용두라는 바위 위에 누각을 세웠다.
* 포루(砲樓)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 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하면서 내부 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을 공격하 도록 만든 것이다. 모두 전돌을 쌓아 벽을 이루고, 위에는 작은 누각신 의 건물을 올렸는데 수원성에는 서포루, 북서포루, 동포루, 동북포루 남포루의 다섯 곳에 다섯 포루를 설치하였다.
* 포루(鋪樓)
이 포루는 화포를 장착한 것이 아니고 치성위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을 가리키는데,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볼 수 없도 록 하기 위해 세운것이며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다. 동북포루는 각건대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지세가 갑자기 높아져서 용두를 굽어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그 밖에 서암문 남쪽에 서포루, 북 서포루, 서쪽에 북포루, 창룡문 남쪽에 동1포루, 봉돈 남쪽에 동2포루 가 있다.
* 봉돈(烽墩)
봉돈은 행군을 지키고 성을 파수하며 주변을 정찰하여 인근에 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다섯 개의 커다란 연기 구멍을 두어 신호 를 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벽 일부를 치성처럼 밖으로 돌출시키 고 아래는 돌로 쌓고 위는 전돌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상부에 성가퀴 를 두었다. 내부는 ㄷ층으로 만들어서 제일 높은 곳에 다섯 개의 화두 를 설치하였다. 다섯 개의 화두 가운데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만 사용하는데, 저녁마다 남쪽의 화두에서 횃불을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 석상산의 육봉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홍천대에 있는 방화독 에서 응하게 된다.
성곽 규모
성 길이 5520m, 성내 면적 : 1.3㎢
역사
축성 기간
조선 정조 18 ~ 20년(1794. 3. 29 ~ 1796. 10. 10 양력 기준)
시설물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창룡문 외 37개소(축성 당시 48개소)
시설물 복원
1975년 ~ 1978년 (장안문 등 30개소)
보수
1975년 ~ 1978년 (팔달문 등 11개소)
성곽 복원
1975년 ~ 1978년 (5520m 중 5099m)
특징
-성문으로 갈려면 지그재그로 여러번 가야 성문에 들어갈수있고 수원성은 벽돌같은걸로 쌓여 저 있어서 그 구멍으로 보면서 적을 막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3. 화성의 유래
'화성'이 제 이름을 찾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대왕이 '화규삼축(華封三祝)' 고사를 인용해 "선왕의 능침인 '화산(化山)'의 '化(화)'자와 '華(화)'자는 뜻과 음이 통하여 화성으로 한다"고 하며 "효를 통해 덕을 펼치는 도시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이 유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장자」천지편에 나온 '華封三祝(화규삼축)'고사에서 華封人(화규인)이 堯(요)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하였다. 이때 화봉인이 말하기를 "聖人(요임금)에게 축원하오니 오래 사십시오"하니 요임금은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부자가 되십시오"하니 요임금은 다시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자손을 많이 두십시오"하니 요임금이 "싫다" 하였다.
그러자 화봉인이 "壽(수), 富(부), 多男子(다남자)는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인데 혼자서 마다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요임금은 "다 남자는 걱정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수는 욕됨이 많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所以(소이)가 아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에는 부나 수, 자손 등 평범한 세인이 바라는 차원을 한층 넘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덕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정조대왕이 이 고사를 취하여 성의 이름을 붙인 것은 화성이 덕이 넘치는 도시가 되라는 정조대왕의 뜻이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어진 유서 깊은 성의 이름이 일제에 의하여 수원성으로 바뀜으로써 역사적인 깊은 뜻은 사라지고 의미 없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다.
화성의 제 이름 찾기
이런 잘못된 이름을 바로 잡는 데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재야 원로서지학자인 이종학선생의 공로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특히 화성 제 이름 찾기에 앞장서서 이를 관철시키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선생은 문화재관리국에 청원서를 내어 이를 관철시키고 각종 교과서와 출판물, 그리고 언론 매체에 수원성 표기를 화성으로 바꿔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 1996년 10월 화성건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된 정보통신부의 기념우표에 수원성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항의하여 법원에 이 우표 판매의 중지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서를 내기도 하였다.
화성 제 이름 찾기와 더불어 이 선생은 화성건설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한적본으로 영인하여 이를 외국의 유수한 기관과 국내의 주요 기관에 무료 배포하였다. 이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아끼지 않은 몇몇 사람의 노력이 우리의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화성의 축조 배경
그렇다면 이런 화성의 축조 배경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정조가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한 18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의 곡선을 그리고 있던 사회였다. 철저히 농업에만 의존하던 경제구조에서 점차 상업의 비중이 커져갔으며 양반과 상민으로 엄격히 구분되던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식 계층에서도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던 철학적 논쟁 대신 백성의 현실 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 과제를 찾으려는 실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왕위에 오른 정조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다. 신하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약해져 버린 왕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비교적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조선의 왕권은 건국 후 100여 년이 지난 16세기에 이르자 점차 미약한 존재로 전락해 간다.
권력 유지를 위한 파벌 싸움도 17세기 이후 더욱 치열해져서 누가 왕이 되느냐에 따라 파벌간 세력의 판도가 달라졌다. 어느 파벌의 지지를 얻느냐에 따라 왕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했다.
이런 싸움이 정점에 달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정조의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세력의 움직임이 작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버지 사도세자 대신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로서는 신하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강력한 권위의 왕이 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정조 13년에 이르러 경제는 크게 회복되고 문예부흥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왕권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즈음 갑자기 사도세자 무덤의 이장이 결행됐다. 서울 외곽에 있던 세자의 무덤을 당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던 수원고을(지금의 화성시) 뒷산으로 옮기고 수원고을은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 엄청난 사업은 결정 두 달만에 전격 실행되었다.
세자의 무덤이 옮겨지고 가재도구를 짊어진 수원고을의 2,000여 주민들은 서쪽에 나지막한 팔달산이 서있고 3면이 넓게 개방된 새로운 지역(지금의 수원)에 자리를 잡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한편,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새 도시로 이주해 오도록 여러 가지 혜택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1년여 후에는 인구도 제법 늘고 집들도 들어선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것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 백년 대를 이어 살아온 한 고을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조가 이렇게 엄청난 사업을 전격적으로 실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 신도시 화성의 흥망
17세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일찍이 수원이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제적 견지에서 보면 물자 유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수원 고을은 산으로 가로막힌 폐쇄된 지역에 있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형원은 수원고을을 넓은 들판으로 옮겨 물자 소통의 거점으로 삼으면 경제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로부터 150년 뒤 실제로 수원은 넓고 개방된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새로이 수원을 건설하면서 전국의 유능한 상인을 적극 유치하는 방안이 실시되었다. 경제가 활성화된 신도시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또한 서울에 있던 왕의 친위부대를 분산하여 수원을 지키게 하면서 부근의 우수한 군인들을 배속시켜 그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이제 수원은 서울 남쪽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변모할 모든 여건을 갖춘 셈이었다.
신도시 건설은 왕의 권력을 지원하는 하나의 배후도시를 마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모든 작업은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경제적 뒷받침과 군사적 배후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한 왕 중심의 강력한 신하집단도 형성하게 되었다.
4. 융건릉- 장조(莊祖)와 정조(正祖)의 릉(사적 제206호)
융릉(隆陵): 장조(사도세자)와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홍씨(영의정 홍봉환의 딸, 한중록 지음)의 릉
건릉(健陵): 조선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의 릉
영조는 조선조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선대의 저술을 모아 집대성하고 균역법과 탕평책 등 사회개혁을 실시해 태평성대를 이룬다.
그러나 성격이 엄정하고 나라를 바로세우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투철하여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하고 난폭한 성격을 못마땅히 여겨 오던중 후궁인 문숙원의 고발과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적은 10개항의 상주를 올리자 대노하여 세자를 폐하여 서민으로하고 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뜰 뙤약볕에 내놓아 공개체형의 벌을 내린다.
세자는 1762년 허기와 더위로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참극을 빚게 된다. 궁중의 기강과 사회개혁을 위한 용단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 수 없어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위로한다.
정조는 1776년 연노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같은해 22대 정조(1752-1800)는 왕위에 올랐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비명에 간 부친의 혼을 위로코자 더욱더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그는 부친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기슭에서 지금의 능자리인 화산으로 옮기고 재위시 능 관리를 각별하게 하더니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사도세자의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의 능은 건릉(健陵)이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한다. 솔밭에 송충이 극성허면 손수 나가 송충을 잡고 심지어 잡은 송충을 입으로 씹어 송충구제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빽빽한 상록수와 송림 사이로 삐죽삐죽 내민 노송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잔디는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색상이 독특하다.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뛰어나다. 26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능역은 짙은 관목숲과 황금잔디 맑은 샘 등 신선하기 이를데 없는 별천지를 이룬다.
1.7km 거리에는 능사(陵寺)였던 용주사가 들러볼 만하다. 무엇보다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수원 갈비집이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나들이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교통편: 수원IC =>융건릉은 20km, 신갈IC부터 북수원IC =>융건릉은 30km로 접근하기가 매우 쉽다. 서울과 중부, 영동일부는 1시간 ~ 1시간 30분, 안산고속도로 북수원IC에서 노송지대 =>수원4거리=>융건릉으로 들어가 수원네거리에서 신갈IC로 나오면 알맞다.
5. 용주사에 서린 정조의 효와 불심
모든 절간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경기도 화성시의 용주사에는 왕실의 냄새가 가득 차 있다. 그것도 조선 후기 왕권 확립에 총력을 기울였던 정조 임금과 그 당시 왕실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다. 용주사는 전체적으로 양반집이나 궁궐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대웅보전 좌우의 집들인 만수리실과 나유타료는 기거하고 생활하기에 적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용주사 입구는 삼문으로 되어 있다. 석주가 제법 높다. 삼문을 지나 천보루 역시 높은 석주를 가지고 있다. 모두 어간과 좌우문으로 이뤄져 있다. 어간의 중앙문은 임금이 드나드는 문일 게다. 궁에 있는 문들의 구조와 상통한다. 그래서 그런지 중앙 어간문은 항상 닫혀 있다. 임금이 와야 열리나 보다.
천보루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누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대웅보전 용마루가 모두 보인다. 용마루 솟음이 보이게 누대 아래 쪽 부분을 살짝 올려놓았다. 정성이 살짝 엿보인다. 대웅보전 마당이 건물 크기와 적당히 어울린다. 너무 넓으면 휑해 보이고 너무 좁으면 답답해진다. 대웅보전에서 보니 스님 두 분이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웅보전의 계단과 소맷돌도 특이하다. 사도세자 무덤인 융릉의 정자각 소매돌과 너무나 닮았다고 한다. 동일인이 만든 것으로 보인단다. 계단은 정면 중앙에 크게 조성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법당 계단이 좌우에 크지 않게 조성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법당에 오를 국왕을 배려한 것이라 보인다. 이후 19세기의 왕실의 지원 아래 지은 절간들이 이런 구조를 계승했다.
왕실 지원아래 지어져, 화려하지만 소홀함 없는 건축기법
대웅보전 내부는 화려하기도 하고 엄격하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절간들의 화려한 경향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결코 허술할 수 없는 왕실의 엄격한 법도가 반영되었다.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삼존불은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 조각 솜씨 같은 시기의 여타 불상에 비해 완전성이 돋보인다. 닫집도 화려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평범한 얼굴의 두 비천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 역시 화려하지만 조금의 소홀함도 없다.
부처님 뒤에 건 탱화는 보통 절에서 만날 수 있는 불화와 느낌이 너무 다르다. 생동감이 넘친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란다. 원근법을 포함한 서양화풍을 강하게 띠고 있다. 김홍도가 청나라를 사신으로 따라간 적이 있는데, 이때 청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서양그림을 본 적이 있단다. 그 때 본 서양그림의 흉내를 내 본 그림일까? 부처님과 그 권속들이 활기와 생기가 넘친다.
탱화의 부처님과 그 권속들은 이상 세계에 사는 비범한 존재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냥 항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진경산수화가 유행하다가 최고의 경지를 구가하던 시기의 그림이어서 그렇단다. 전통적 기법으로 그린 바로 옆의 삼장 탱화와 비교해 보면 그 활기가 바로 보인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크지 않은 건물이면서도 많은 공포를 걸어 웅장하고 화려함을 더했다. 내출목과 들보들은 당시 사찰들과는 달리 어지러울 정도의 장식을 꾹 참고 필요한 적당한 장식으로 꾸몄다.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격자 안에 둥근 원무늬와 꽃무늬를 역시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어디 하나 왕실의 권위를 허물어뜨릴 허튼 구석이 없다.
조선 전기의 사찰들은 작은 규모이지만 격조 높은 고려 귀족들의 순수청자 같은 맛을 유지했다. 16세기, 17세기 조선의 사찰들은 향촌의 주인인 사림들의 지원을 받아 매우 거대하고 장엄해졌다. 17세기 18세기에 장사를 통해 경제적 부를 획득한 상공인이 경영한 조선 사찰들은 매우 화려해지고 효율적인 건물 구조를 띠었다. 그래서인지 용주사는 18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화려한 경향과 왕실의 엄격성이 첨가되어 독특한 절간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1790년 용주사가 축조되었다. 정조 임금은 마음이 온통 국왕권을 확보하여 개혁을 추진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영조를 추대하여 집권 정당의 명맥을 끈끈이 유지하고 있던 노론 그 중에서도 벽파가 항상 걸림돌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도 소론과 남인들과 힘을 합해 이들과 대항하려다 비운에 죽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정변이 아닌 정상적인 정치력으로 노론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남인 출신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소론과 서얼 세력, 북학파를 끌어들여 정책기관에 포진시켰다. 이어서 서울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화성 화산 명당에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랠 절을 옛날 갈양사 터에 세우고 용주사라 했다.
‘효도’를 외피로 사도세자 죽인 노론세력 약화시켜
노론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으로 받드는 것 자체가 노론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를 뵙는다는 명분으로 빈번히 수원 행차를 시행했다. 1974년에는 아예 수원에 화성을 쌓고 장용영이라는 군대까지 양성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 행궁에서 거대한 잔치를 벌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정책 기관으로는 창덕궁 안에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다. 노론들의 기가 꺾이고 있었다.
현륭원 이장과 용주사 건설 등은 정조 임금의 용의주도한 왕권 확립 과정의 산물이었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랜다고 용주사를 세웠다. 유교국인 조선의 임금이 효도를 하겠다는데 그 누가 딴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왕권 강화에 ‘효도’를 효과적인 외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백년 넘게 조선 정계를 장악한 노론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1800년 정조는 사소한 부스럼 끝에 마흔 아홉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독살설도 나돌고 있다. 노론 벽파는 실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판치면서 조선 후기 정치는 부패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조의 왕권 회복 정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고, 사찰로서는 용주사만 남게 되었다.
용주사를 짓고 주변 사찰들의 좋은 불교 유물들을 옮겨 왔다. 지장전에는 17,8세기의 뛰어난 시왕들상이 나열해 있다. 국보로 지정한 용주사 동종은 고려 때 작품인데, 역시 주변 다른 절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주사에는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동자상들은 소박한 조선 조각의 멋을 잔뜩 담고 있다. 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는 사천왕상은 순박하기 짝이 없다.
용주사와 수원 화성에서는 조선 후기 계몽군주적 성격의 군주 정조 임금을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능원을 수원에 옮기고 효도를 빌미 삼아 국왕 친위대를 강화하고 실사구시 경세치용의 현실적 정책을 펴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정신이 보인다. 수구세력 노론 벽파의 정치세력권에서 벗어나 맘껏 이상세계를 펼치고자 했던 혼신의 정신이 보인다. 정약용과 단원 김홍도,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와 함께 이룩하고자 한 세상의 한 모습이 보인다. 여의주를 얻은 용이 되고자 한 조선 후기 임금의 정성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름도 용주사라고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