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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대와 정신이 분리된 미국의 출발점 (서문)」박훈 2026.2.18
1. 미국 건국 신화와 한국 지식인들의 우상숭배
1775~1783년 미국 독립전쟁과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과정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사이에 놓인 간극은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독립선언과 헌법 전문에 흐르는 정신은 자유와 인권, 평등, 권력 분립이라는 민주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숭고한 문장들을 실제로 쥐고 있던 집단의 삶의 토대는 노예노동과 대지주의 이해관계,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공포에 훨씬 더 가까웠다.
미국의 출발점에는 이처럼 정신과 토대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거친 간극이 처음부터 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 간극에 제대로 주목한 한국 학자의 책이나 논문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한국의 미국사·헌법사 연구는 미국의 공인 역사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기보다, 이미 정착된 서사와 해석 틀을 받아들이는 데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페더럴리스트 문서다. 한국 학계와 교양서에서는 『페더럴리스트 페이퍼』(The Federalist Papers, 1788)를 마치 미국 민주주의의 성전처럼 추켜세우며, 헌법 정신의 순수한 해설서 정도로 다루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경제적 토대와 지역적 이해관계가 전혀 달랐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년)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년), 그리고 동료 연방주의자들의 치열한 이해 조정의 산물이자, 당시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권력 구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쓴 정치 선전물이기도 했다.
즉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는 고상한 원칙의 선언이 아니라, 상업·금융 자본과 농업 대지주, 노예제 옹호 세력과 중앙집권을 원하는 세력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 낸 타협 문서다.
이런 지점을 이해 못한 엉뚱한 우상 숭배의 글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 타협이 애초에 쉽게 봉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노예제와 자유, 연방 권력과 주권, 상공업 자본과 플랜테이션 경제 사이의 이해 대립은 잠시 문장 속에서 조화된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 토대에서는 끝내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것이 이른바 100여 년 뒤의 남북전쟁인 것이다.
미국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모순에 대한 비판적 독해, 특히 반연방주의자들의 문제 제기와 이후 남북전쟁·민권운동까지 이어지는 긴 시계열 속에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다시 읽으려는 시도가 축적되어 왔다.
경제적 계급 분석을 전면에 내세운 헌법사, 흑인 민권운동 이후 인종과 권력관계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법학, 비연방주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연구들이 그 계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미국 연구는 아직도 이 문서들을 헌법 교과서적 해설 수준에서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고, 그 배후에 놓인 계급·인종·지역 토대와의 긴장을 본격적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토대와 정신의 분열”이라는 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학계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공백을 정면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 한국어로 쓰인 미국사·헌법사 글들 가운데 페더럴리스트와 1619년 제임스타운, 플리머스 신화를 한 축 위에 올려놓고 “토대와 정신의 분열”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의 장기 시계를 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이 글과 이후의 글들은 바로 그 빈칸을 채우려는 나의 시도다.
2. 제임스타운과 플리머스 – 출발점의 이중성
이 분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607년 제임스타운(Jamestown,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최초 상설 정착지)과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 청교도 이주선)의 플리머스(Plymouth, 오늘날 매사추세츠 지역의 청교도 정착지) 정착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사실만 놓고 보면 제임스타운이 메이플라워보다 13년 먼저 세워졌고, 잉글랜드(England)가 북미 대륙(North America)에 만든 첫 지속적 정착지로서 버지니아 식민지(Virginia colony)의 토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미국의 공식 서사에서 제임스타운은 그저 초창기의 한 번 해보다 만 실험으로 축소되고, 심지어 지속적으로 유지된 정착지였음에도 “사실상 실패한 시도”였던 것처럼 서술하는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대로 메이플라워와 플리머스는 마치 도덕적으로 흠 없는 건국의 출발점인 양 과장된 조명을 받는다.
미국의 집단 기억은 노예 노동과 폭력적 축적의 기원을 담고 있는 제임스타운의 역사적 무게를 의도적으로 가볍게 만들고, 청교도 신앙 공동체의 이미지를 앞세워 건국의 도덕적 정통성을 세탁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손질되어 왔다.
같은 시기의 두 정착지 가운데 하나는 “기억되기 곤란한 것들”의 집합으로 밀려나고, 다른 하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의 집합으로 끌어올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이 건국부터 어떤 편집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준다.
제임스타운에서 형성된 담배 플랜테이션 경제와 버지니아(Virginia) 대지주 집단은 이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같은 버지니아 출신 대통령들을 배출하며 미국 초기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다.
그럼에도 공식 서사에서는 이 토대를 최대한 배경으로 밀어 넣고, 메이플라워와 청교도 순례자를 내세운 플리머스 이야기를 건국 신화의 첫머리로 끌어올린다.
미국이 스스로를 설명할 때 어떤 정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어떤 사회경제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가려 왔는지, 이 기억의 편집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임스타운이 의도적으로 실패한 왜곡된 역사로 밀려난 것은 단지 동기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곳의 초창기 역사는 미국이 스스로 내세우고 싶어 하는 도덕적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1609~1610년의 이른바 “굶주림의 시기” 동안,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이 극심한 식량 부족 속에서 동료의 시신을 먹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까지 발견된 바 있다.
같은 시기 메이플라워 정착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그 이야기는 원주민과 칠면조를 나누어 먹는 “추수감사절”이라는 서사로 포장되었다.
한쪽의 극한 생존과 폭력의 기록은 학자들의 연구실로 내려가고, 다른 한쪽의 미화된 이야기만이 국가적 명절과 교과서 속에 살아남았다.
나아가 무엇보다 제임스타운은 “자유의 나라”라는 자기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노예제의 출발점이었다.
1619년, 제임스타운에 처음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도착했고, 버지니아는 곧 노예 노동에 기반한 담배 플랜테이션 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제임스타운에서 싹튼 이 구조는 이후 면화 농장까지 포함하는 남부 플랜테이션 체제로 발전하며, 버지니아 대지주 계급의 부와 권력을 떠받치는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같은 해, 버지니아에서는 식민지 최초의 대의기구인 버지니아 의회(House of Burgesses)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흔히 “대표제의 시초”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대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카르텔 지배 기구였고, 노예와 하층 백인들은 배제된 상태였다.
1619년 첫 흑인 노예의 도착과 같은 해 버지니아 의회 설치가 겹쳐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대표제와 노예제가 처음부터 동시에, 그리고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와 대표의 제도는 그 자체로 이미 계급적·인종적 상한을 달고 시작한 셈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출발점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자영농과 신앙을 중심으로 한 북부 매사추세츠의 이미지를 자신의 “정신”으로 선택했다.
남북전쟁(The Civil War, 1861~1865년) 이후 미국 역사 서술의 주도권을 쥔 북부 지식인들은, 미국의 기원을 흑인 노예제가 시작된 남부의 제임스타운이 아니라, 신앙과 법, 서약 공동체를 강조하는 플리머스로 설정했다.
이 과정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터무니없이 과장되었고, 제임스타운은 “초기 시도” 정도로 축소되거나, 잔혹한 기록들은 의도적으로 잊혀 갔다.
도덕적 건국 신화는 북부에서, 실질적 건국 권력은 남부에서 나왔다는 묘한 타협이 여기서 성립한다.
3. 두 정착지의 동기와 종교 구조 – 버지니아 회사와 분리파 청교도
두 정착지는 출발 동기부터 달랐다.
제임스타운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공동체라기보다,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년)가 1606년에 왕립 칙허장을 내려 설립한 런던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London, 1606~1624년)가 투자한 영리 식민 사업 프로젝트였다.
이 회사는 여러 투자자가 주식을 사서 자본을 모으는 합자회사(joint-stock company) 형태였고, 북미 동부 해안, 당시 “버지니아(Virginia)”라 불린 지역에 식민지를 세워 금·은 같은 귀금속과 담배를 비롯한 현금작물(cash crops)을 찾아 이윤을 내겠다는 목표로 조직되었다.
1606년 12월 런던을 떠난 첫 선단이 1607년 제임스타운에 도착해 정착지를 세운 것도 바로 이 회사의 사업 계획의 실행이었다.
여기에 건너온 사람들의 주류는 가족 단위의 정착민이 아니라, 금광을 찾아온 독신 남성,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린 모험가와 투기적 인물들이었다.
신앙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왕과 영국 국교회에 대한 형식적 충성의 언어였고, 실제 관심은 토지를 얼마나 확보하고 담배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비싼 값에 팔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
제임스타운 초기 기록을 보면, 성직자들이 “사람들이 예배에는 오지 않고 담배 심기에만 몰두한다”고 한탄하는 대목들이 반복된다.
종교는 공동체를 묶는 신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계급 사회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의식에 가까웠다.
반대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은 영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가족 단위로 이주해 신앙 공동체를 세우려 했다는 이미지로 기억된다.
메이플라워호(Mayflower)에 탄 종교 집단의 핵심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내부에서 개혁하려 했던 일반 청교도(Puritan)라기보다, 아예 국교회와 결별해 별도의 교회를 세우려 했던 분리파 청교도(Separatist Puritan), 당시에는 브라우니스트(Brownists)라 불리던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 집단이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시기의 국교회 예배 형식과 기도서, 성직 서열 제도가 성서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국가교회” 자체를 부정했다.
국왕과 국회의 법으로 강제되는 국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를 가질 수 없던 영국에서, 분리파는 불법 집회로 취급되었고 설교 금지·벌금·투옥 위협을 반복적으로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1609년경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으로 피신해, 존 로빈슨(John Robinson, 1576~1625년)이 이끄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중심으로 작은 망명 공동체를 이루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 승객 102명 가운데 37명이 이 레이던 분리파 회중교회 출신 신자와 그 가족들이었고, 나머지는 런던 상인들이 식민지 건설을 위해 고용한 장인·농부·하인·경비병 등 비종교적 이주자들이었다.
전자는 자신들을 “성도(saints)”라고 불렀고, 후자는 후대 기록에서 “낯선 자들(strangers)”라 불렀다.
신학적으로 분리파 청교도들은 칼뱅주의 개혁파 전통에 서 있었고, 예정론·성서 절대권·회중이 스스로 목사를 선출하는 자치 교회 원리를 중시했다.
이 점에서 국교회와의 결별을 요구하지 않고 의례를 유지한 채 내부 개혁을 추구했던 비분리파 청교도와도 갈라진 급진파였다.
제임스타운 쪽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의 공식 종교는 영국 국교회, 곧 성공회(Anglican, Church of England)였고, 정착 초기에 함께 온 성직자는 국교회 사제였다.
요새 안에 세워진 교회 건물은 영국 왕권과 국교회 질서가 대서양을 건너 그대로 옮겨 온 상징이었고, 종교는 삶의 최종 목적이라기보다 제국과 회사 권위를 떠받치는 국가 의례에 가까웠다.
정착민 다수는 국교회에서 탈퇴한 분리파가 아니라, 국교회 체제 안에 머무르면서 식민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플리머스의 분리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와 국가 권력이 결합한 종교 체제 자체를 떠나려고 했던 사람들로,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 1620년)을 통해 자기들이 만든 회중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복종하기로 약속했다.
후대 미국 역사 서술이 이 서약을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격상시키는 것도, 바로 이런 분리파 회중교회 전통과 결부시켜 제임스타운의 성공회·왕권·회사 프로젝트와 의도적으로 대비시키려는 기억의 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분리파 청교도·회중교회 계열은 이후 뉴잉글랜드 지역의 회중교회와 장로교, 일부 침례교 전통으로 흩어지며 오늘날 미국 북동부·중서부의 메인라인 개신교를 떠받치는 축으로 이어졌고, 남부 복음주의(evangelical) 자체의 직접 조상이라기보다는, 미국 복음주의가 형성될 때 기초 어휘와 신학 언어를 공급한 초기 칼뱅주의·회중교회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4. 메이플라워 서약 신화 비판 – 민주주의의 씨앗인가, 생존 규칙인가
물론 이 서약 역시 당대로 보면 작은 배 안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임시 합의문에 불과했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신학적으로 고난도 문서도 아니고, 정치 철학의 혁명적 선언도 아니었다.
원래 이들은 버지니아 근처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폭풍우로 인해 경로를 벗어나 현재의 매사추세츠(플리머스)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러자 '낯선 자들(Strangers)' 중 일부가 '본래 허가받은 땅이 아니니, 런던 상인들과 맺은 계약은 무효이며 우리는 자유다'라며 독자 행동을 하려 했다.
이들이 이탈할 경우 공동체의 생존이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한 회중교회파 지도부가 이들을 붙잡기 위해 함께 맺은 타협안이 바로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서약의 요지는 명확했다.
우선 자신들이 영국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민임을 재확인하여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하느님과 국왕의 영광' 및 '식민지의 발전'을 위해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제정될 '합리적이고 공정한 법·규칙·명령'에 모두가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겉으로는 국왕의 억압을 피해 떠난 사람들인데도 문서 첫머리에 국왕 충성을 반복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당시 분리파 청교도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국교회(성공회)의 제도와 의례에 반대한 것이지 군주제 자체를 전복하려 한 급진 공화주의자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여전히 법적으로는 영국 신민이며, 북미 식민지도 국왕의 영토라는 틀 안에서 합법적 보호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국왕과의 결별을 문서로 선언하는 순간 이 작은 집단의 합의문은 곧바로 반역 선언이 되어 버리므로, 신학적으로는 국교회와 결별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충성스러운 신민”이라는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다시 말해 이 서약은 “왕권을 부정한 인민주권 선언”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형식적 충성을 전제로, 좁은 공간에 갇힌 이들이 서로 목을 물지 않고 버티기 위해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자고 한 문서다.
그런데 후대 미국사 서술은 이 짧은 실용 문서를 “민주주의의 씨앗”이라고 추켜세우며, 거기에 종교적 숭고함과 정치적 정통성을 마구 덧칠했다.
서약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복종하겠다”는 자기 통치 선언이 아니라, 영국 국왕 아래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질서 유지 장치였다.
참여 주체 역시 배 안의 '성도와 낯선 자'들 중 가구주나 독립적인 성인 남성 41명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여성과 하인, 계약 노동자, 그리고 땅의 원주민은 처음부터 정치적 주체로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배타적인 임시 방편을 두고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 칭송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준을 터무니없이 낮게 설정해 두고 그 위에 사후적으로 조작된 신화를 덧씌우는 것에 가깝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서약이 “민주주의의 씨앗”이라는 해석이, 제임스타운에서 이미 존재하던 다른 형태의 자치·대표 구조를 의도적으로 지우는 데 동원된다는 점이다.
버지니아 의회(House of Burgesses) 역시 제한적이고 계급적인 기구였지만, 최소한 “대표를 뽑는다”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건국 신화는 국교회 식민 프로젝트의 연장선 위에 있던 버지니아의 정치 실험은 최대한 축소하고, 메이플라워 서약이라는 좁은 회중 내부의 약정을 과대평가하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과 자유, 자기통치를 약속한 민중의 나라였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요약하면, 메이플라워 서약은 당시로서도 소규모 이주 집단이 서로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 만든 관리 규칙이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의 인민주권·보통선거·권리 보장을 담은 민주주의 선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서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숭배하는 서술은, 건국의 도덕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욕망이 역사적 맥락 위에 올라탄 결과다.
실제로는 국왕 충성, 배 안 남성 일부의 자기 약정, 외부 집단의 배제라는 매우 좁은 범위의 합의에 불과한 문서를 “자유와 신앙의 나라의 출발점”으로 띄워 올리는 바로 그 장면 자체가, 미국이 정신과 토대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어떻게 미화와 신화로 덮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5. 두 정착지의 경제구조와 미국의 경제 원형
버지니아를 상한선으로 하는 남부 플랜테이션 농업과 그 이북 지방의 밀, 옥수수, 감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농과 영국과의 무역업은 사실 오늘날 남부와 북부의 경제구조와 정서를 가르는 원형을 남겼다.
즉 남부 (버지니아 이남)는 담배, 면화 같은 상업 작물은 넓은 토지와 대규모 강제 노동(노예)이 필요했다.
이는 소수의 지주 계층이 부를 독점하는 위계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
굳이 기계를 개발할 이유가 없는 '노동 집약적' 구조였다.
반면 북부 (펜실베이니아 이북)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농경 중심으로 노동력이 귀했기 때문에 점차 효율성과 기계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한기에는 가내수공업을 하고, 생산된 잉여 곡물을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를 통해 수출하면서 상업과 금융, 제조업이 자연스럽게 발달시켰다.
5-1. 제임스타운과 담배 플랜테이션 – 건국기의 현금 작물 경제
제임스타운은 처음에는 실패 직전의 실험 식민지였다. 금은 나오지 않았고, 토착 작물에 대한 지식도 없었으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정착민 대부분이 사라져 갔다.
이 식민지를 폐쇄 직전에서 되살린 것이 바로 담배였다.
1612년 존 롤프(John Rolfe, 1585~1622년)가 서인도 제도에서 들여온 담배 종자를 버지니아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면서, 제임스타운은 생존의 거점을 넘어 “돈이 되는 식민지”로 전환된다.
이것이 담배 플랜테이션이라는 신기원을 이룬 세계 최초의 성공적인 플랜테이션이었다.
버지니아 야생 담배는 유럽인의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서인도 제도 계통의 담배는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런던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1614년 첫 수출 이후 버지니아의 토지는 곧 “담배를 심느냐 마느냐”로 가치가 갈리는 땅이 된다.
문제는 노동이었다.
담배는 씨 뿌리기, 모종 옮기기, 잡초 제거, 수확과 건조에 이르기까지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온 가난한 백인 계약 노동자가 이 일을 맡았지만,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1619년 제임스타운 인근 포인트 컴포트에 네덜란드 배가 아프리카인 20여 명을 내려놓으면서, 북미 영국 식민지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가 들어온다.
17세기 중반 이후 담배 수요가 늘어나자, 광대한 토지·담배 재배·노예 노동을 결합한 플랜테이션 체제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서 고착된다.
담배는 화폐처럼 통용되었고, 넓은 토지를 확보한 플랜터 계급은 식민지 의회와 지방 행정, 민병대를 장악하는 지배층으로 올라선다.
이들이 훗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년),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년) 같은 “건국의 아버지”로 연결되는 버지니아 대지주 정치인의 세계다.
즉 제임스타운은 미국 본토에서 토지·노예·현금 작물이 결합한 플랜테이션 경제가 처음으로 확립된 지점이었다.
이 모델이 이후 남부 전체로 확산되면서, 남부의 경제 구조와 지배층 문화의 기본 틀이 된다.
5-2. 담배에서 면화로 – 작물은 바뀌어도 구조는 유지되다.
17~18세기 담배는 북미 영국 식민지를 떠받치는 핵심 작물이었지만, 18세기 말 이후 남부 플랜터 자본은 점차 면화로 이동한다.
전환점은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년)의 조면기 발명이다.
조면기는 면화에서 씨를 분리하는 작업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담배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었지만, 조면기 이후에는 광대한 토지와 노예노동만 확보하면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작물이 된다.
동시에 산업혁명기 영국에서 면직물 공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면화는 세계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가 된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미국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면화가 차지할 정도였고, 조지아·앨라배마·미시시피·텍사스 같은 이른바 딥 사우스(Deep South)는 말 그대로 “면화 왕국(King Cotton)”이 된다.
이 과정에서 담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버지니아·노스캐롤라이나·켄터키 등지의 특화 작물로 남았다. 그러나 남부 전체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면화 플랜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중요한 점은, 작물이 담배에서 면화로 바뀌었을 뿐, 제임스타운에서 만들어진 플랜테이션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넓은 토지 독점, 인종화된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농업 생산, 수출용 단작 작물에 국가·지역 경제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 이 구조가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연방 정치의 충돌, 서부로의 면화 플랜테이션 확장과 토지 쟁탈, 그리고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경제적 토대를 형성한다.
버지니아에서 담배로 시작된 모델이 면화라는 새로운 작물을 입고, 미국 남부 전체의 경제·정치 질서를 규정한 셈이다.
5-3. 플리머스와 뉴잉글랜드 가족농 – 옥수수, 대구, 숲의 경제
플리머스를 포함한 뉴잉글랜드 지역은 남부와 전혀 다른 자연 조건과 경제 경로를 가졌다.
토양은 돌이 많고 척박하며, 겨울이 길고 춥다.
담배나 면화처럼 지력을 빨아먹는 작물을 대량 재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초기 정착민들이 영국에서 가져온 밀과 보리는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이들을 살린 것은 원주민이 가르쳐 준 옥수수 재배와 삼자매 농법이었다.
삼자매라 불린 곡물 옥수수와 콩, 호박·스쿼시를 함께 심어 서로 성장을 돕는 방식, 구멍을 파고 물고기를 넣어 비료로 활용하는 방식이 플리머스 생존의 기초였다.
뉴잉글랜드의 가족농들은 이런 작물들을 중심으로 가족의 생존을 우선하는 농업을 운영했다.
소·돼지·양을 함께 기르며, 겨울을 버티기 위한 식량과 의복을 자급하려 했다.
남부처럼 거대한 현금 작물을 심는 대신, 작은 땅을 가족 노동으로 꾸려가는 구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이 영원히 “자급농의 변방”에 머문 것은 아니다.
농사만으로는 넉넉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바다와 숲에서 새로운 경제 기반을 찾아 나선다.
뉴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현금 작물은 땅이 아니라 바다였다.
말린 대구는 유럽과 서인도 제도에서 높은 수요가 있었고, 이 수출이 뉴잉글랜드 항구 도시의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
또한 울창한 숲에서 나온 목재로 영국 본토보다 싸게 배를 만들 수 있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영국 상선 상당수가 뉴잉글랜드에서 건조될 정도였다.
가족 단위의 가죽·신발·금속 도구·양모 방직 등이 농업과 결합해 지역경제를 구성했다.
이런 가내 수공업으로 발달한 것 중 하나가 총기 제조 산업이었다.
이처럼 뉴잉글랜드는 가족농의 생존 기반 위에 수산·조선·해운·수공업을 얹어, 남부와는 다른 상공업 중심 경제의 씨앗을 심었다.
플리머스와 매사추세츠 그 주변 청교도 공동체에서 강조된 노동 윤리, 검약, 교육, 문자 해독은 이런 경제 구조를 떠받치는 문화적 요소였다.
5-4.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 담배·곡물·설탕을 엮는 북부 상업 네트워크
뉴잉글랜드와 중부 식민지의 가족농·곡물 농업은 곧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상업 네트워크와 결합한다.
여기서 핵심 거점이 되는 도시가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다. 보스턴은 조선업과 해운업을 바탕으로 남부와 서인도 제도, 영국을 잇는 해상 운송의 중심지였다.
뉴잉글랜드에서 건조된 배는 버지니아의 담배,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쌀과 인디고, 서인도 제도의 설탕과 당밀을 싣고 대서양을 오갔다.
남부 플랜테이션에서 나온 산물을 유럽으로 보내고, 유럽의 공산품을 다시 식민지와 서인도 제도로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보스턴 선주와 상인은 운임과 수수료를 챙기며 부를 축적했다.
필라델피아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핵심 도시가 된다.
펜실베이니아 내륙의 비옥한 토양에서 생산된 밀·보리·옥수수는 식민지의 빵 바구니를 형성했고, 이 곡물은 남부 플랜테이션과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노동자 식량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필라델피아 상인들은 곡물을 남부·서인도 제도로 보내고, 그 대가로 담배·설탕·당밀을 받아 유럽에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두 도시는 역할이 분화한다.
보스턴은 배를 만들고, 그 배로 남부·서인도·영국을 연결하며 해운업·조선업으로 성장한 항구 도시로 필라델피아는 곡물을 생산·집산하고, 남부 담배와의 교환·재수출, 금융·보험·가공업을 결합해 식민지의 경제 수도로 성장한다.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 전통은 노동 체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대규모 노예 플랜테이션보다는 가족 노동과 숙련 장인 중심의 경제를 선호했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노예제 비판의 거점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이 노예제와 완전히 무관한 공간은 아니었다.
펜실베이니아 내륙에는 담배를 소규모로 재배하는 가족농도 있었고, 이 담배는 나중에 시가용 잎으로 이름을 얻는다.
무엇보다 필라델피아와 보스턴 상업·금융 자본은 남부와 서인도 제도의 노예노동에서 나온 산물을 실어 나르고, 담보로 잡고, 가공하고, 판매하면서 이윤을 올렸다.
그러나 노예노동을 점차 폐지하고 1780년 완전히 폐지한다.
북부 상업 자본과 선주, 금융업자는 남부 플랜테이션·노예제와 하나의 대서양 경제 체제 속에서 움직였다.
플리머스와 보스턴이 구축한 상공업·해운 질서는, 제임스타운과 버지니아에서 형성된 플랜테이션 경제와 얽혀 돌아가는 하나의 구조였다.
5-5. 경제 구조가 남긴 남부·북부의 정서와 갈등의 원형
이제 제임스타운과 플리머스의 경제 구조가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정서·정치 문화를 어떻게 가르는 원형을 남겼는지 정리해 볼 수 있다.
남부에서는 토지와 노예, 플랜테이션이 사회를 규정한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플랜터가 정치적·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고, 백인 자유민과 흑인 노예가 그 아래에 놓인다. 자유와 신분, 명예는 토지 소유와 인종 위계에서 나온다.
북부에서는 작은 땅을 일구는 가족농과 도시 상공업, 해운·조선·금융·제조업이 부와 권력의 근거가 된다.
자유인은 자신의 노동과 계약, 신용과 교육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상이 자리 잡는다.
토지보다 배·창고·공방·상점·은행·학교가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공간이 된다.
이 두 구조는 이후 미국 정치의 핵심 갈등 축이 된다.
남부의 지배층은 토지 지배와 인종 질서를 지키는 것을 자유의 핵심으로 보고, 연방 정부의 세금·관세·노예제 개입을 외부 권력의 침해로 받아들인다.
북부의 상공업 엘리트는 해운·무역·제조·금융 네트워크를 지키는 것을 국가 이익의 중심으로 보고, 관세·은행·통화·연방 권한 강화를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
미국 건국 신화에서
플리머스 청교도와 추수감사절, 매사추세츠의 학교와 교회, 법과 서약이 “정신”의 상층부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런 북부 상공업 구조를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하는 효과를 낳았다.
반대로 제임스타운과 버지니아 플랜테이션, 담배·면화·노예·플랜터 계급의 역사는 남부의 “특수한 문제”로 분리되어 읽히기 쉽다.
그러나 경제 구조에서 보면, 미국은 처음부터
제임스타운식 담배·면화·노예 플랜테이션, 플리머스·보스턴·필라델피아식 가족농·해운·곡물·상공업이 두 방식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움직이는 하나의 체제로 출발했다.
플리머스가 법과 신앙, 공동체 서약의 신화적 간판을 제공했다면, 제임스타운은 노예 노동과 플랜테이션 수출로 국가 재정과 지배층의 자산을 떠받치는 공장을 제공했다.
남부의 '기사도와 전통'을 주장하는 납부 플랜테이션 지주들은 스스로를 영국의 귀족처럼 여겼다.
땅과 명예, 혈연을 중시하는 정서가 강해졌고, 이는 오늘날까지 남부의 보수주의와 전통 중시 성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부의 '청교도 윤리와 실용주의'는 스스로 땀 흘려 일하는 가족농과 위험을 감수하는 상인들은 개인의 능력과 근면, 교육을 중시했으며 이는 오늘날 북동부의 실용주의, 자유주의, 교육열의 뿌리가 되었다.
이런 남부와 북부가 공통적으로 영국으로도 압박받는 장면은 다른 층위였지만 그 저항성은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국 압제다.
남부는 영국이 담배의 최대 고객이었기에 경제적으로 긴밀했지만, 영국의 과도한 세금과 통제에 "내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저항하고, 북부 무역업자들은 영국의 해운 규제에 맞서 싸우며 '자유 무역'의 가치를 먼저 깨달았던 것이다.
남부는 땅과 중독성 작물(담배/면화)에 뿌리를 둔 '과거 지향적 농업 사회'의 원형을 만들었고, 북부는 곡물과 바다(무역)에 뿌리를 둔 '미래 지향적 상공업 사회'의 원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6. 독립전쟁과 헌법 – 자유의 언어와 노예제의 토대
버지니아와 제임스타운의 유산은 독립전쟁과 헌법 제정을 이끈 핵심 인물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등 초기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다수가 버지니아 출신 대지주였고, 이른바 “버지니아 왕조”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노예 노동에 기반한 담배 농장을 통해 축적한 부로 교육을 받고, 유럽 계몽주의 사상을 익혔으며, 그 지적 자원을 가지고 영국에 맞서는 독립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해, 미국 독립은 북부 청교도 정신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남부 플랜테이션 자본과 대지주 계급의 군사·재정적 역량이 결합된 결과였다.
여기서 토대와 정신의 분열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제퍼슨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지만, 자신은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한 버지니아 지주였다.
독립군 총사령관 워싱턴 역시 노예주였다.
그들이 내세운 언어는 인류 보편의 자유와 평등이었지만,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인 노예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은 이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1775년 영국의 버지니아 총독 던모어 백작은 “영국군에 합류해 싸우는 노예에게는 자유를 주겠다”고 공식 약속했다.
실제로 약 1만 명에서 2만 명 사이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영국군 편(Loyalists)에 서서 싸웠으며, 이는 독립 전쟁이 단순한 “자유의 전쟁”이 아니라 계급과 인종에 따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군 편에서 싸운 흑인들 중 일부는 약속대로 캐나다나 시에라리온 등으로 이주해 자유를 얻었지만, 상당수는 다시 노예로 팔려가거나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미국 독립전쟁은 “자유와 인권을 외치는 노예주들”이 벌인 전쟁이라는 역설을 안고 있었다.
이 모순은 1787년 헌법 제정 과정에서 제도적 형태를 얻는다.
독립 이후 느슨한 연합 규약 체제의 한계를 느낀 식민지 엘리트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갖춘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이때 북부와 남부의 이해 대립은 인구 계산과 대표권 배분 같은 구체적 조항 속에 그대로 들어갔다.
남부는 노예를 투표권 없는 재산으로 취급하면서도, 하원 의석을 늘리기 위해 인구수 계산에는 포함시키길 원했다.
북부는 이것이 부정직하다고 반대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채택된 것이 이른바 “3/5 타협”이다.
노예 한 명을 자유인의 3/5로 계산해 인구에 포함시키되, 정치적 권리는 주지 않는다는 기묘한 규정이 헌법 본문에 들어갔다.
이것은 단지 정치 협상 과정의 메모가 아니라, 합중국 헌법 원문에 새겨진 조항이었다.
미국의 최고 규범이 탄생할 때, 흑인은 처음부터 “5분의 3의 인간”으로 법전 위에 올라갔던 셈이다.
인간 존엄과 자유를 노래하는 정신이 노예제라는 토대 앞에서 굽힌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갈등은 중앙 권력과 주권 사이에서 나타났다.
상공업 기반을 가진 북부의 연방주의자들은 공통 시장과 공통 통화를 운영하려면 강력한 중앙 정부와 국립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농장과 노예제에 의존하는 남부는 중앙 정부가 강해질수록 자신들의 제도와 관행, 특히 노예제에 대한 간섭이 들어올까 두려워 각 주의 주권을 강조했다.
이 긴장은 연방제 구조와 상·하원 양원제, 대통령 선거 방식과 권력 분립 장치 속에 복잡하게 반영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견제와 균형의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노예제를 지키려는 주의 자치와 통합 시장을 만들려는 중앙 권력 사이의 줄다리기가 있었다.
이 갈등의 대표적 인물이 뉴욕 상업·금융 자본을 대변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버지니아 플랜테이션 지주 계급을 대변한 제임스 매디슨이다.
이 둘이 존 제이(John Jay, 1745~1829년)와 함께 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는 흔히 “미국 민주주의의 성전”처럼 떠받들어지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토대와 지역 이해가 전혀 다른 두 세력이 헌법 비준을 위해 서로의 요구를 일정 부분 인정하며 만들어 낸 정치적 타협 문서였다.
중앙집권적 재정·금융 질서를 원하는 해밀턴과, 노예제와 농장 경제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버지니아 지주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 매디슨이 공동 서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서가 고상한 원칙의 순수한 해설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토대 위에 선 지배 블록 내부의 타협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이 권력분립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인간의 선의를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탐욕과 상대 진영의 이해관계가 내 삶의 터전을 파괴할 것에 대한 실존적 공포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권력분립은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서로 다른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지배층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지 못하도록 만든 정교한 안전장치였다.
버지니아의 대지주였던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제51호에서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 없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노예제가 필요 없는 북부 자본가나 무산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존립 기반인 노예제와 지주적 특권을 박탈할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초기 공화국에서 버지니아는 이 타협 구조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를 배출한 “버지니아 왕조”는 남부 노예 플랜테이션 체제의 심장부이면서 동시에 북부 자유주들과 직접 맞닿아 있는 접경 지역이었다.
이후 미국이 노예주와 자유주를 가르는 상징적 경계선으로 삼게 되는 1763~1767년의 메이슨–딕슨 라인도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버지니아 사이를 가르며 그려진 선이었다.
1780년 펜실베이니아주가 점진적 노예제 폐지를 시작하면서 이 선은 결국 노예주와 자유주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었고, 이후 1820년 미주리 타협 등을 거치며 남북 간 갈등이 심화될 때마다 “북부”와 “남부”를 나누는 결정적인 잣대로 인용되었다.
결국 메이슨–딕슨 라인은 단순한 지리상의 경계선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자유이고 어디부터가 노예인가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정치·도덕의 경계선으로 기능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이러한 움직임 앞에서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같은 버지니아의 대지주이자 자유의 투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노예제 남부 질서의 핵심이자 북부 자유주의와 맞붙는 최전선이었으며, 바로 그 경계에서 나온 엘리트들이 해밀턴과 함께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작성해 연방 헌법을 정당화했다.
중앙 권력과 주권, 자유 이념과 노예제 토대 사이의 긴장이 헌법 구조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버지니아는 대통령을 배출한 중심지이자 노예제와 자유제의 정치적·지리적 분수령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 갔다.
이렇게 보면 미국 헌법은 가장 숭고한 문장으로 장식된, 동시에 매우 세속적인 이해관계의 계약서였다.
전문에는 “더욱 완전한 연합”과 “자유의 축복” 같은 표현이 올라갔지만, 본문 조항에는 노예 무역을 일정 기간 묵인하고, 노예를 인구에 포함시키며, 각 주가 노예제 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구조가 함께 들어갔다.
정신은 북부 청교도·계몽주의 전통이 제공한 언어를 빌렸고, 토대는 남부 플랜테이션 경제와 버지니아 대지주 계급이 제공한 힘을 빌렸다.
미국은 이 둘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국가로 출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