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John little
이미 신화로 남아있는 브루스 리의 웨이트 트레이닝 방법론에 대해 연구하기에 앞서 나는 대단히 운좋게도 그의 아들인 브랜든 리와 그가 비극적인 사고를 당하기 직전 마지막 인터뷰를 할 수 있 었다.
브랜든에게 훈련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내게 '이 세계의 진정한 힘' 을 얻기 위해 훈련했다고 말 했다. 그 귀절은 즉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 말은 그의 아버지의 전체적인 훈련방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이었다.
브루스 리는 기능적으로 유용한 힘, 즉 전투와 일상 활동에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는 근육, 관절 그리고 결합조직의 힘을 추구하며 훈련했던 사람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리의 몸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펌핑 아이언에 대한 그의 애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그와같은 완벽한 육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강철같은 팔뚝과 탄탄한 복부를 개발하는데 주로 사용했던 보디빌딩 운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은 이제껏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브루스 리의 트레이닝 일지를 모두 읽고 배워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훈련에 응용할 수 있도 록 공개할 생각이다. 브루스 리 자신도 말했다.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응용을 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의지만 으로는 부족하다. 해야 한다."
브루스 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리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1973년 7월 20일 홍콩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러나 20년 후 그의 생애는 계속해서 그의 신화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그토록 짧은 생애동 안 브루스 리는 매체의 관심이 코뉴코피어(역주:제우스에게 젖을 빨렸다는 염소의 뿔, 풍요를 상 징)를 고취시켜 주었다.
그가 찍은 마지막 영화인 'Enter the dragon' 은 1973년 60만달러를 들여 제작되었으나 최근까 지 무려 3조억달러를 넘는 수입을 올렸다.
브루스 리의 일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부터 전혀 황당무계한 거짓말까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3피트 거리에서 오는 리의 속도는 0.005초 였다는 얘기, 척 노리스가 말한 정교한 젓가 락질 얘기가 있는가 하면 공중에 쌀알을 던졌다가 다시 그것을 공중에서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돌고있다! 또 언젠가는 어떤 남자의 심장을 끄집어내어 그가 쓰러지기 전에 그의 눈앞에 직접 보여주었다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대부분 브루스 리를 이런 식으로 알고 있다.
최고의 예술과 인간적 마력으로 어디에서나 영화팬들을 감격시켜 버렸던 영화배우였고 혁신적인 무예가로, 브루스 리는 20세기가 나은 최고의 무술가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또한 몸과 힘 의 묘기로써 전세계 수천만의 사람들을 분발시켜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화적인 육체
보디빌딩과 무술 사이에 오랫 동안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해 볼때, 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이언 펌핑 형제들 속에 많이 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리의 육체적 발달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보디빌더들은 헐크 루 페리노, 숀 레이, 마이크 마타라조, 케빈 레브롱, 플렉스 휠러, 샤론 브 루노와 도리안 예이츠, 린다 머레이 등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도려진 컷, 멋진 선, 양파껍질과 같은 데피니션, 근육질의 몸 전체에서 솟아 오르고 갈라져 나온 근육들은 깊고 두꺼웠으며 조각칼로 다듬은듯 정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용 본위였다.
리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근본목적은 그가 개발한 모든 근육무리가 '현실세계' 의 목적에 합치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보디빌딩을 통해 그가 개발한 근육은 단지 잘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잖아도 놀라운 그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을 쌓는 선수는 반드시 동시에 스피드와 유연성도 알맞게 길러야만 한다." 고 그는 말했다.
"알맞은 스피드와 유연성 및 지구력이 혼합된 고도의 근력은 어떤 스포츠에서나 우수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전투에서 이런 소질이 없다면 제아무리 힘이 강한 강자라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계속해서 투우사를 쫓다가 결국 지쳐 나가 떨어지는 황소나 재빠른 토끼의 뒤를 쫓는 느려빠진 덤프트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리의 오랜 친구이며 트레이닝 파트너의 허브 잭슨은 말한다. "브루스는 강해지는것에 관심이 있 었습니다." 결국 리는 용접공이 직업이었던 잭슨에게 60년대 후분과 70년대 초반에 걸쳐 그를 위 한각종 기구와 훈련장비를 만들어 주도록 부탁했다. 리는 73년 초 잭슨을 홍콩으로 보내 홍콩에 있는 브루스의 저택에 대학 정도 크기의 마시 서킷 트 레이너를 설치하도록 했다.
"브루스에게 맞는 기구를 디자인 할 때 가장 어렸웠던 문제는 그의 손에 기구가 너무나 쉽게 부서져버린다는 점이었지요. 그가 부숴뜨리지 않고 훈련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의 나무로봇을 자동차 부품으로 강화시켜야 했습니다."
심지어 잭슨은 실제로 공격할 수도 있고 보다 더 나은 생생한 가상 전투를 되풀이 할 수 있도록 리 를 위해 움직이는 대련로봇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기구가 채 개발되기도 전 에 브루스는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 기구는 그의 뒷마당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두꺼운 고압선을 연결해 그곳에 매달았을 것입니다." 잭슨은 설명한다. "그와 같은 기구들을 만든 이유는 그의 강력한 펀치와 킥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브루스의 힘과 기술이 높았다는 거지요."
리의 또다른 친한 친구였던 대니 이노산토 (리는 유일하게 대니에게 그의 개개의 무술자세를 가르 치도록 허용했다) 는 브루스는 실질적인 파워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근력에만 흥미를 느꼈다고 덧붙인다.
"언젠과 브루스와 제가 함께 산타모니카의 해변을 걷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갑자기 거구의 보 디빌더가 지나가더군요. 나는 그를 보고 브루스에게 말했지요. '이봐 저 친구의 팔을 좀 보게!' 그런데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크군, 하지만 그에게 그만한 힘이 있을까?'..."
리에게 있어서 파워는 체육관에서 발달시킨 근육을 재빨리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다. 예를 들어 체육관에서는 벤치프레스를 400파운드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투포환같이 근력 이필요한 스포츠에서는 완전히 맥을 못춘다면 그는 결코 실용적인 경기수행을 위한 파워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리는 날렵한 동작과 근력을 종합적으로 개발하는데 부지런히 힘을 쏟았다. 그가 이 점에서 대단 히 성공적이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막강한 근력
리가 보여준 근력의 묘기는 전설처럼 남아있다. 미국 태권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준은 이렇게 말한다. "브루스는 정말 뛰어났어요. 저는 그 만큼이나 강한 사람은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푸시업을 하곤 했습니다."
리가 미국에 건너와 처음으로 가르쳤던 제자인 제시 글로버는 리가 32kg 짜리 덤벨로 그와 비슷한 묘기를 하곤 했었다고 회상한다. "브루스는 한 팔로 32kg 짜리 덤벨을 잡고 옆으로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몇초 동안 그대로 있곤 했습니다. 제가 알던 사람 중 그것을 들고 있기는 커녕 거기까지 올릴 수 있었다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브루스는 또한 코카콜라병의 뚜껑을 손가락으로 밀어 땄다거나 45kg 짜리 샌드백을 사이드킥으로 간단히 한방 먹여서 터뜨려 버렸다는 등 익살맞은 버릇들을 가지고 있었다.
리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중 '1-인치' 펀치를 쳐서 사람들을(그들 중 몇명은 자기보다 50kg이나 더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공중으로 날려보냈는데 그들중엔 5m 거리로 나가 떨어진이도 있었다.
팬아메리카 유도 금메달 수상자였던 헤이워드 니시오카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리의 강력 펀치를 제대로 먹었던 운나쁜 사람중 하나였다.
"그 펀치를 맞고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기억을 씁쓸하게 회상했다. "그 펀치 속에... 그냥 제 배를 가볍게 손으로 쳤는데 그런 힘이 나오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뒤로 날아가서 벽에 부딪쳤다가 떨어졌지요. 그 후론 그를 매우 신중하게 대했습니다."
리가 순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파워는 그의 동료 무술가들이나 스파링 파트너들에게는 절대 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으며 그의 스피드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빨랐어요." 글로버는 말한다. "한때 자동 전자스톱워치로 그의 기록을 측정한적 이 있었는데 가장 빠른 동작은 0.05초 정도였습니다. 가장 느린 기록은 0.08초 정도였구요. 45cm - 60cm 정도의 거리에서 손을 옆으로 내리고 긴장을 푼 상태에서 후려갈기는 동작이었습니다. 그는 놀랄 정도로 빠를 뿐 아니라 상대의 동작을 읽는것도 초고속이었지요."
아이언의 입문
굉장한 스피드와 근력을 지녔으면서도 리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소질을 보게 되 면 감탄했다. 그는 한때 이렇게 썼다. "...트레이닝은 물체를 다루는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감정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묘한 성질을 다루는데는 지능과 판단이 필요하다." (The Taoof Jeet Kune Do)
강한 근육은 큰 근육이라는 생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리가 보디빌딩 탑 스타들의 우람한 육체와 훈련방법과 더불어 보디빌딩의 우수한 근력강화 효과를 인정하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의 아내 린다는 브루스가 래리 스코트, 데이브 드레이퍼와 그 당시엔 거의 무명이었던 아놀드 슈월츠 네거의 사진들을 수집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과 함께 훌륭하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루틴을 스크랩해서 모아두기도 했다. "브루스는 머슬 잡지에서 나온 기사들을 한아름 안고 차이나타운의 학교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노산토는 말한다. "그는 말하곤 했어요, '이봐 댄, 이 세명은 모두 이 운동이 데피니션을 개발하는데 가장 좋다고 하는데'..." 그는 그처럼 어떤 일에 일관성을 찾아내서 비교해보고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자료들은 없앴습니다.
나중에 그의 훈련은 웨이더 훈련원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리는 언제 보디빌딩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보디빌딩에 마음을 돌렸을까? 뉴욕에 사는 브루스 리의 역사가인 조지 탄에 의하면 리가 웨이트로로 단련된 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것은 십대였을때 누나인 피비가 남자친구 로버트 찬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였다. 찬은 정통 아이언 펌퍼였고 그의 팔뚝 크기는 어린 리가 완전히 반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후 얼마 안되 리가 출생지인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홍콩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 찬과 훈련할 준비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리를 보디빌딩으로 이끌었는가에 상관 없이 리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모두 65년 이전에는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사실이 없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전까지 그의 주된 운동방법은 고대 중국무술인 윙춘 쿵후의 자세를 끊임없이 연마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환점
스트레칭과 윙춘 쿵후의 훈련이 결합된 전통적인 그러나 간단한 동작은 60년대 초에 걸쳐 전투준비를 하도록 유지시켜 주었다. 리가 보다 규칙적이고 헌신적인 보디빌딩의 장점을 알아차리게 된것은 65년에 이르러서였다. 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65년 후반에 그는 삶과 육체에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될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도장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동안 도장 문이 거칠게 열리며 날아갔고 중국교포 사회의대표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중국 무술인들이 걸어 들어왔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브루스의 미망인 린다 리는 이들 대표자들이 와서 브루스에게 최후 통첩을했다고 한다.
"비동양인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르치겠소." 리는 응수했다. "그들의 피부색에는 전혀 관심이 없소. 그들에게 진실한 심장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가르칠 것이오."
그러나 65년도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는 동양의 '비법'을 비동양인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무술계에서 이단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의 도장으로 침입했던 중국인 무술가 중 한사람이 리에게 도장의 문을 닫는게 좋을것이라 말하면서 싸움을 걸어왔다.
리를 알고 함께 훈련해온 사람들에게 의하면 그 중국인 무술가의 도전은 분명히 잘못된 방법 이었다. 무엇보다도 브루스 리는 금방 흥분하는것으로 유명했으며 그는 결코 도전이나 시비거는 것에 대해서 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즉시 리는 도전에 응하여 상황을 정리시켰다. 심한 싸움 후에 그 대담하고 정의에 불타는 쿵후 선생은 가장 가까운 출구로 달려가고 있었다.
상대방을 쓰러뜨렸지만 그 때 리는 한바탕 격투를 벌이면서 엄청난 기력이 소진되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상황에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린다는 그때부터 리가 효과가 더 큰 다른 컨디션 조절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날의 그 결투는 브루스 리의 훈련방법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바벨을 들다
리는 즉시 'Mr America' 와 'Muscle Builder' 같은 건강관련 잡지를 닥치는대로 찾아 구독하기 시작했다. 책 속에 나오는 온갖 주장과 이론들을 실제로 시험해 보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서점과 헌책방을 샅샅이 뒤져 미스터 올림피아 상패의 모델이 된 인물인 유젠 샨도우가 저술한 책 'Strenght & How to Obtain It' 을 비롯 보디빌딩에 관련한 서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효과적인 원리와 생산성 있는 운동법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타는 목마름 과도 같았다.
이 때부터 73년 사망할 때까지 브루스 리는 신체건강, 보디빌딩, 운동기능학, 생리학, 영양학, 역도 등을 광범위하게 다룬 막대한 장서를 소장하게 되었다. 열심히 운동하고 종종 특히 타당 하다고 생각되는 글이 있으면 줄을 치고 눈에 띄는 구절이 있으면 여백에 주석을 달곤 했다.
살인적인 보디빌딩 프로그램
"그는 체육관에서는 절대 훈련하지 않았습니다." 허브 잭슨은 말한다. "그는 집에서 훈련하는 것이 집중이 더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집안의 뒷뜰에서 훈련하곤 했지요."
이 때 리는 마치 놓쳐버린 시간을 벌충하기라도 하는 듯 웨이트 트레이닝에 많은 시간을 투자 했다.
사실 그는 이 프로그램의 결과에 큰 인상을 받아서 수석 제자 중 하나인 카렘 압둘 자바에게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
"브루스는 70년 여름에 웨이트 트레이닝 프로그램 하나를 마련해 주었어요. 그것은 주로 리가 대근육무리에 하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구성된 일주일 3회 훈련프로그램이었어요. 저는 12회 반복으로 약 3세트 정도를 하고 있었는데 효과가 꽤 괜찮았지요."
리의 훈련은 보디빌딩으로 그렇게 바뀌어간다. 이노산트에 의하면 정해진 날에는 웨이트를 들고 훈련하지는 않았지만 무술훈련 시 웨이트 트레이닝을 추가하기도 했다.
"브루스는 항상 손에 작은 바벨을 들고 박스를 흔들곤 했으며 계속해서 12회동안 펀치를 휘두르 고 1, 2, 3, 5, 7 그리고 10파운드 짜리 바벨을 사용했다가 다시 거꾸로 10, 7, 5, 3, 1 에서 제로 중량으로 돌아가면서 연이어 100회가 넘는 펀치를 하곤 했습니다. 그는 저보고 자기와 함께 그 훈련을 하자고 했어요. 삼각근과 팔에 느껴지는 그 얼얼함이란, 정말 굉장했지요!"
주먹을 갈다
리는 또한 악력과 펀치력을 기르려면 전완훈련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전완의 훈련광이었어요." 린다는 웃으며 말한다. "누구라도 새로운 전완 훈련프로그램을 가지고 나왔다면 브루스는 그것을 얻지 않고는 못배겼을 거예요."
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그의 옛 친구인 조지 리에게 여러가지 쥐는 장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운동기구를 위한 이런 디자인들을 모두 저에게 보내곤 했어요." 조지 리는 말한다. "그리고 저는 그의 요청에 따라 만들었구요. 그리고 저는 절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브루스가 그것을 사용할려고 한다면 그 효과야 틀림없는 것이었고 그에게 보낼 것 하나와제가 집에서 직접 쓸것을 하나 더 만들었지요."
브루스 리의 영화 중 세편에 출연했던 봅 월은 브루스 리가 전완훈련으로 파워와 근육에 크게 이익을 얻었다고 말한다. "브루스의 팔은 제가 봤던 어떤 사람의 신체와 비교해보아도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팔뚝은 정말 굉장했지요. 그의 손목과 손가락은 믿지못할 정도로 힘이 셌습니다."
"브루스의 팔뚝을 잡아본 일이 있는데, 마치 야구배트를 잡는 기분이었습니다." 리의 절친한 친구인 타키 기무라는 말한다.
브루스 리는 팔을 강하게 만드는데 아주 푹 빠져 있었고 매일 훈련하곤 했다.
"그는 팔뚝 근육은 밀도가 높아서 매일 펌프를 시켜야지만 강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어요." 이노산트는 말한다.
용의 복부
무엇보다 그의 복부가 장관이었다.
"브루스는 항상 배를 잘 단련시키지 않은면 심한 스파링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항상 말했어요." 'Black Belt' 지의 발행인인 미토우에는 회상한다.
"그는 복부 트레이닝에 아주 열성적이었지요." 린다는 말한다. "그는 항상 시트업, 크런치, 로만체어운동, 레그 레이즈와 V업을 했어요."
척 노리스는 리의 집을 방문했다가 브루스가 아들인 브랜든을 배 위에 올려놓고 뛰게 하면서 동시에 레그 레이즈와 덤벨 플라이를 하는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는 시트업을 엄청나게 해서 환상적인 복부를 발달시켰지요." 허브 잭슨은 말한다. "그는 제게 말했어요, --- '시트업을 올바로 하는것은 그냥 올렸다 내렸다 하는것이 아니다. 몸을 말아 올리 는 것이다. 마치 두루말이 종이를 감아 올리는것과 같다.' --- 리의 말에 의하면 효과적으로 시트업을 하는 방법은 복근을 고립시키는 것이지요. 그는 또한 몸을 말아 올리면서 팔꿈치를 반대쪽 무릎으로 돌리는 시트업을 하곤 했어요."
"리는 또한 그 자신이 '플래그' 라고 명명한 아주 힘든 복부운동을 고안해 냈어요. 벤치에 누워서 벤치에 붙은 업라이트를 양손으로 잡고 어깨힘으로 받치면서 벤치에서 몸을 띄우는 것이었습니 다. 그 다음 무릎을 일자로 고정시키고 허리를 벤치에서 뗀 그 상태에서 레그레이즈를 했지요."
영화 'Enter the Dragon' 을 촬영하는 동안 동료배우 볼로 융은 벤치 끝에 어깨만 지지한 채로 몸통과 다리를 벤치 끝에서 수평으로 띄운 채 이런 동작을 하는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완벽한 수평으로 공중에 몸을 띄웠어요!" 볼로는 외치듯 말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렇게 완벽한 자세로 그 운동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볼 수 없을것 같습니다."
댄 이노산트는 말한다. "브루스는 근육관련 잡지를 항상 샅샅이 읽고 좀 더 근육질의 몸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찾곤 했습니다. 새로운 항목을 찾게 되면 즉시 그 책을 주문했 고 다시 책 속에서 주장하는 방법이 맞는지 직접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대했던 것 과 다르다면 즉시 버리고 다른것을 시도했지요. 그는 계속해서 실험적인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실험은 리의 전체적인 훈련방법의 초석이었다.
그는 한 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경험한 바를 연구하고 유익한 것을 흡수하되 쓸모없는것은 과감히 버려라. 그리고 자신만의 특별한 고유한 것을 가미하라."
60년대 후반기에 몸의 기초를 만들고 70년대 초에는 소위 본능적인 트레이너가 되었다. 웨이더 본능훈련원칙대로 "우리는 일정한 날, 일정한 훈련에서 필요하다고 느끼는대로 훈련한다." 는 경지에 이르게 된것이다.
70년대 초의 브루스 리는 매우 절충적이었고 실로 자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리가 죽기 전 여러번 그의 홍콩 자택을 방문했던 밥 월은 말한다.
"홍콩에 있는 그의 집엔 방마다 훈련장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훈련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즉시 그 장비들을 사용했어요. 또 그의 차고엔 결코 차를 들여놓은적도 없지요. 언제나 차고에는 트레이닝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간에 심지어는 사무실에 서도 덤벨과 바벨을 만졌습니다."
그 무렵 리의 보디빌딩 프로그램은 이틀 훈련, 1일 휴식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다고 월은말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그가 많은 변화를 주었다는것을 알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그의 프로그램은 한 운동에 3세트, 세트당 약 15외 내외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어떤 훈련 도 같은 각도로 똑같이 훈련하는 법이 없었지요. 항상 약간씩 다른 바리에이션을 주어 해보곤 했습니다."
유연성 --- 진정한 힘을 내기 위한 스트레칭
리의 보디빌딩 프로그램 중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는 유연성이었다. 수술로 슬와근을 잘라낸다면 300파운드 백을 공중으로 차 올리는 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는 스트레칭이 그의 기량에 절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다.
그러나 순간적인 방심으로 그는 큰 낭패를 겪게 된다. 1970년대에 워밍업과 스트레칭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60kg 짜리 바벨을 얹고 굿모닝을 하다가 척추 제4천골신경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그는 3개월동안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에 더해 다시는 킥을 할 수 없으 리라는 충격적인 진단이 덧붙여졌다.
물론, 리는 참았고 그 의사의 진단이 틀렸다는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후 리는 운동전에 워밍업 과 스트레칭의 중요성에 대해 결코 과소평가하게 되지 않았다.
근육질과 같은 신체적 특성은 항상 객관적으로 판단되지만 어떤이도 브루스 리의 충격적 신체에 필적할 사람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인생은 그대가 그 활용법을 알기만 한다면 결코 짧지 않다." 브루스 리는 그 활용법을 알았고. 비록 짧지만 짧지 않은 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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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트레칭과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어렸을때의 우상
유용한 정보네여


역쉬

기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이 글을 읽고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낄수가 있네여...
멋져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