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와 공주
-그림 속 주인공 찾기-

라헐 판 코에이의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에서, 주인공은 바르톨로메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굳이 그가 개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모티프로 한 픽션이다.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개가 바르톨로메다. 그러니 그 개는 개가 아니라 바르톨로메다. 이제 우리는 「시녀들」에서 주인공 찾기 놀이를 시작할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자세히 보자. 언뜻 보면 그림의 주인공은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공주인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의 제목이 ‘시녀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 주인공은 공주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제목 그대로 주인공을 ‘시녀들’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사실상 1656년경 그려진 이 그림의 제목이 「시녀들」이라고 알려진 것은 1843년 이후라고 한다. 그전에는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그림의 제목으로 등장했다. 심지어 이 그림의 제목을 화가의 초상화라고도 했다.
이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이 인물들에 대해서는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가 기록한 스페인화가들의 연대기(1724년)에서 밝혀진 것으로써 이젤 앞에 있는 화가와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데 사르미엔토(Doña Maria Augustina de Sarmiento), 마르가리타 공주 (Doña Margarita María of Austria), 다른 시녀인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Doña Isabel de Velasco), 우측 전경에 뚱뚱한 여자 난쟁이 마리바르볼라(Maribárbola)와 공주의 놀이 상대인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Nicolasito Pertusato)가 있다. 그 뒤의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인 도냐 마르셀라(Doña Marcela de Ulloa)와 왕비의 수행원인 돈 디에고 루이스(Don Diego Ruiz de Ascona)일 것이며, 우측 문 앞 계단에 있는 사람은 왕비의 시종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Don José Nieto Velàzquez)라고 한다.
여기 등장하는 시녀도 공주도 주인공이 아니라면 이들 중에 화가 자신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벨라스케스, 즉 화가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화가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잔뜩 폼을 잡고 서 있다. 금방이라도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화가는 모델이 아니라, 누군가를 그리려는 화가 본연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러면 화가는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주인공 찾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화가도 공주도 시녀들도 주인공이 아니라면 누가 주인공인 것일까? 등장인물에서는 찾을 도리가 없다. 혹시 숨겨진 주인공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화가는 그림 밖에서 등장인물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안에서 그림 밖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바깥에 있다는 말일까? 그런데 화가는 캠퍼스 앞, 공주 뒤에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가만히 보면 그림의 뒤편 거울 속에 누군가가 비치고 있다. 왕과 왕비다. 그럼 왕과 왕비가 주인공인 것일까?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펠리페 4세 때의 궁정화가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왕과 왕비가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공주의 우측에 있는 시녀,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가 그림의 밖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왕과 왕비가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에서는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야 만다. 설마, 개가 주인공이라니. 그런데 그 개가 개가 아니라 ‘바르톨로메’라니. 그러고 보니 그림의 맨 앞에 한 마리의 개가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다. 그런데 그 개는 난쟁이 꼽추 바르톨로메다. 그는 시골에서 살다가 공주의 마부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마드리드로 온다.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따라올 수 있었다. 바르톨로메는 우연히 길에서 공주에 눈에 띄게 되어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공주의 놀잇감이 되었다. 그는 개처럼 짖고 개처럼 기어다녔다. 당시 난쟁이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난쟁이들은 왕족의 고귀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그림자로 존재했다. 그런 바르톨로메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벗은 벨라스케스의 화방과 그림이었다. 비록 바르톨로메가 개처럼 분장하고 다녔지만, 스스로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자각하게 해 준 것이 바로 화방과 그림이었다.
그림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색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지만, 그 색은 깊이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나무의 초록색은 푸른색을 통해 그 깊이를 더 하는 것처럼. “회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상의 깊은 본질을 선과 색채로 포착하는 예술”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에서는 누구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림은 이들 주인공들이 또 다른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주인공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