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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직후 마산의 산업>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마산포에 대해서는 열다섯 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비제품들은 마산포를 통해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공급되어 1908년경에는 전라도는 물론 멀리 충청도까지 판로가 아주 넓었습니다. 1910년에 들어서도 마산항은 수출액이 158,834,000엔인데 비해 수입액이 566,869,000엔으로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항구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출은 주로 웅천․칠원․진해․영산․함안․창원․의령․김해․ 덕산․거제․사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의 大阪과 兵庫․중국의 대련․ 국내의 부산과 염포(울산에 있었던 포구) 등지로 내 보냈습니다. 이 때도 수입품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는데 수입품 중 1/3이 동경, 2/3가 오사카 제품이었으며 그것도 효능 위주의 필수품이 아닌 양산․모자․가방․넥타이와 면포․면사․솥․성냥 등 사치성 고급소모품과 고급 생활필수품 등이었습니다. 생산된 소비품을 수입하는 항구였던 겁니다.
이런 정책 기조 속에서 마산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금융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878년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한국 땅에 들어 온 외국 금융업의 최초였습니다만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월남동 소재 월남성당 터 이 건물은 1960년대 중반에 현재의 성당이 거립되면서 철거되었지만 사진 속에 서있는 일본인들이 밟고 섰던 현관입구의 계단석은 성당 마당 한쪽에
보존되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성당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밑 보호석입니다. 원래 은행건물의 화단석으로 유일한 흔적입니다.
○ 금융업 러일전쟁 승전 후 한국에서 유리한 지위에 선 일본은 종전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까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화폐개혁․금융제도, 재정정리, 교통운수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창원지방금융조합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보험업도 번성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개설한 보험회사가 11개소나 되었습니다. 모든 금융기관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금융조합은 한국인이 조합장을 맡았으나 중요 업무는 역시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이율이 월 2.3%에서 7%의 고리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빌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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