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孝經)은 유가(儒家)의 주요경전인 십삼경(十三經)의 하나이다.
자기를 <유(儒-선비)>로 위치를 짓기 위해 귀속의식을 위한 공부하는 책의 한 절 이름이다.
즉,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나라를 위하고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모시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덕목(德目)이다.
충(忠)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국민 또는 그 군국(君國)을 위하여 자기를 바치고 시종 그 절조(節操)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봉건적 군신관계(君臣關係)의 근본윤리로 발전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선비의 내면을 지배한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외부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꼿꼿함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선비다움은 과연 무엇을 통해 어떻게 형성된 것이었을까?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여섯 명의 선비를 떠올린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16세기의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다.
그는 조선의 역관, 즉 통역관이었다.
중인이란 특수한 신분이었다.
그의 언행에서 분명히 확인되었듯, 홍순언은 끊임없는 독서와 수양으로 자신을 연마한 선비 중의 선비였다.
조선 시대의 많은 중인이 홍순언처럼 살았을 것이다.
선비를 양반이란 틀 안에 가두면 안 된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정씨 참의공파 휘 "절"시조의 八世孫 諱 好仁, 好義 선조와 함께 의병한]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이다.
그의 지조와 기개는 늠연(凜然)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는 공의(公義)의 길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선비의 전형이라 하겠다.
나라의 위기, 공동체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을 때 분연히 일어나는 이가 선비란 점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로 손꼽는다.
세 번째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언관(言官)이자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을 떨친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다.
조광조와 김식의 제자였던 그의 지도 아래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등 걸출한 선비가 길러졌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인걸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기회주의자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였다.
조선 선비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백인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여성 선비 송덕봉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유교 사회에서는 비교적 드물었던 여성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덕봉이 남편 유희춘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만 읽어보아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선비란 결코 남성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 점에서 송덕봉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선비이다.
16세기 조선에서는 송덕봉과 같은 여성 선비를 자랑하는 집안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는 선비 중의 선비,
그야말로 최고의 선비라고 평가해도 좋을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통해 선비의 기운을 배양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서가 자리하였다.
옥중에서도 그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의사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또한 우뚝한 ‘여사(女士)’, 곧 여성 선비였다.
그 어머니가 있어 그 아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자신의 학문과 공적으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지 못한 많은 이들 가운데 올곧은 선비가 퍽 많았다.
조마리아 여사는 바로 그런 무명의 선비를 대표하는 존재이다.
끝으로, 현대의 선비로 손꼽히는 분으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을 예로 들고 싶다.
심산은 구한말의 풍운 속에서도 외롭고 의로운 선비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조선의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나라가 해방된 뒤에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김창숙은 일제의 고문으로 이미 불구가 되었으나,
그런 노구(老軀)를 이끌고 반(反) 독재투쟁에 앞장섰다. 그가 유교적 근대를 추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사실은 유명하다.
선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나 현대 한국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선비란 존재를 위선적이고 폐쇄적인 것으로 보아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물로 바라본다.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나는 과거의 유산인 선비를 그렇게 함부로 다룰 일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과거의 대통령, 아부만 일삼는 탐욕스러운 그 측근들이 횡행하는 이 세상에 그저 한숨만 내쉴 일이 아니라,
왜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는지를 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선비가 무엇인지, 선비가 왜 필요한지를 곰곰 다시 생각하는 초가을 새벽이다.
글 <號 上里- 行列字-鎭鉉, 兒字-元澤, 字-元寿 東萊鄭氏參議公派十九世孫>
-윗글의 인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