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ul Mauriat - Isa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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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의 이사도라 ]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은 1877년 5월 26일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습니다.
< 16세 때 나는 음악 없이 관객 앞에서 춤을 추었다.
관객 중 한 사람이 '죽음과 소녀'라고 외쳤다.
그래서 그 춤은 <죽음과 소녀>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화려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극을 알기 시작한
나 자신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삶과 소녀>라고 제목을 붙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 Isadora Duncan / My Life, 1928

그녀는 고전 발레의 형식에 변화를 준 현대무용의 개척자였고,
예술은 시대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곡선미와 원칙적인 율동만을 강조하는
고전 발레의 형식에서 벗어나
움직임이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그 움직임을 통하여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다양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상이나 긴 스카프를 두르고
맨발로 무대에 섰으며,
고전 발레의 형식 보다는
자연스런 움직임에 따라 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움직임의 자유를 주로 자연에서 찾았습니다.
자연에는 어디서도 간섭받지 않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그 자유로움 속에 생명이 있고, 거짓과 가식보다 사실 그대로를,
즉 현실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도라'는 바로 여기에서 소재를 찾아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여러 감정을 무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 잔잔한 바다모습과 사납고 무서운 파도,
희뿌연 안개가 자욱히 깔린 숲 속의 아침 풍경>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녀는 "움직임은 영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 무용수는 오랜 연구와 기도와 영감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빛나는 표현임을 터득한다.
그의 몸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면서
보다 심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된다.
이런 무용수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무용수이다.
자연을 본받되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동작으로 말하되
모든 자아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 Isadora Duncan / The Philosopher's Stone of Dancing, 1920 )

- Isadora as PRIESTESS in 'Iphigenia in Tauris' by Gluck (1903)
1989년에는 그녀의 무용세계를 담은 영화
"Movement from the Soul(영혼으로부터의 움직임)"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무용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1900년 유럽으로 건너 갑니다.
파리에서 기존의 발레와 전혀 다른 새로운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하게 됩니다.
그녀는 특히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1904년에 '베를린' 근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 Isadora and pupils from the Grunewald School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로
자연주의를 주장하였고,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 부터 받은 느낌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발레복이나 토슈즈 없이
그리스 시대의 나풀거리는 천 조각 하나와 맨발로 춤을 추는
그녀의 댄스 스타일은 유럽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무용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킵니다.
파도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유연한 동작으로 내적 감정을 표출하였고,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본 후,
그 흐르는 듯한 인체의 곡선이야말로
항구적인 아름다움의 표상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여
종교적 경지에까지 이르는
고도의 예술임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 Edward Gordon Craig, who was an actor,
designer, a director, and a graphic artist
무대에서 춤 연습을 하던 '이사도라'는
어느 날 배우이며 디자이너인 Gordon Craig를 만납니다.
그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지지만 결혼에 부정적이었던
'이사도라'는 혼자서 딸 '디어드리'를 낳았습니다.
Craig와 헤어진 후에 '이사도라'는
줄기차게 그녀에게 구애를 하였던 대부호, Paris Singer와 살면서
무용학교를 경영하고 아들 '패트릭'도 얻습니다.

하지만 춤만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철학은.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였습니다
비극은 항상 더 큰 비극을 불러오는가,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춤 연습 때문에 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것이 아이들과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가
강둑의 경사면 아래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고,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때 아이들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 Isadora Duncan in 'MAZURKA, Chopin Opus 17, No.4' in 1915.
1920년 모스크바 무용학교 설립을 위촉받아 러시아에 갔을 때
'이사도라'는 17세 연하(年下)의 천재 시인(詩人),
세르게이 에세닌(Serguei Esenin)을 만납니다
'에세닌'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아마 너는 그 공통점을 모르겠지?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

- 이사도라와 세르게이 (Serguei Esenin)
그녀는 '에세닌'에게서
세상을 떠난 아들 '패트릭'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어머니 같이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철학은 깨어지고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그러나 당시 반공산주의 정서가 팽배하였던 미국에서
두 사람은 '볼셰비키'로 몰려 유랑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유럽으로 옮기어
그들만의 둥지를 틀고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였으나,
유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세르게이는
혼자 러시아로 돌아갔고,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 내 詩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당신을 떠난 후, 나 또한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라는 詩句를 남기고...

그 화려하고도 파란 많은 그녀의 생애도
프랑스의 휴양지인 리비에라 해안에 있는
'니스'에서 극적인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그녀를 흠모하는 청년의 권유로 드라이브 하기 위해 차에 타면서,
친구들에게 아래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 잘있어 친구들아, 내 친구들, 난 내 영광을 쫓아갈거야. "
그러나 차가 출발하는 순간 그녀가 두른 붉은 색 비단 쇼올이
자동차 바퀴에 말려 들어 갔습니다.

- Print of study of Isadora dancing
장미 가시에 찔려,
시인다운 죽음을 맞이하였던 '릴케(R.M.Rilke)'처럼,
너울대는 긴 쇼올에 목이 감겨,
'이사도라 던컨'도 무용가 다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카페 게시글
문화 및 예술
맨발의 이사도라
nk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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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03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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