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이름에 대하여 / | |
왜냐면 | |
지난 1월2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제20차 총회가 열렸다. 백낙청 선생이 평생 동안 쌓았다가는 허물고 다시 쌓던 문학비평의 화두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었다. 그런 이론의 실천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 그의 발의로 만들어졌던, 이 작가들 모임이 벌써 20차 총회를 맞게 되었다. 150여명 회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안건으로 내세워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던 내용이 민족문학이라는 단체 이름 속에 든 말 ‘민족’이었다. 세계무대나 국제무대에 이 이름을 들고 나서면 늘 ‘극우 민족주의’라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고 국내에서조차 편향된 문학단체라는 오해를 넘어서기가 어려워 젊은 작가들이 기피한다는 것이 그 변경 요청의 가장 큰 까닭이었다.
자아를 지키려고 뭉치자고 외치는 ‘민족’ 집단은 그 이름조차 성스러운 어떤 것, 작가회의 속에 든 ‘민족문학’은 바로 그런 이념을 지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문학이면 문학이지 왜 하필 민족문학인가? 맞다. 백번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실은 이 옳은 주장 속에 음험한 함정이 누워 있다. 그래서 백낙청 선생이 이제까지 써온 저술들 속의 민족문학 옆에는 세계문학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민족을 넘어서는, 종족이나 국가 이념이나 믿음을 넘어서는 사람살이의 바른 길을 찾아 나서는 말길이 문학이라고 누구든 말한다. 문학과 예술의 보편적 가치. 이 얼마나 기막힌 주장인가. 그러나 정말로 그런 순수하고 진짜인, 우주인 모두에게 옳고 맞는, 문학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의 눈높이나 그 깊이가 세계인 모두에게 통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인가. 분명 그런 것이 있다. 클로드 란츠만이 만든 영상물 〈쇼아〉를 보면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를 읽으면서, 윤정규의 〈신양반전〉, 김원일의 〈푸른 혼〉, 정찬이 쓴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을 읽으면서, 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사람으로 몸된 수치심에 마음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거기에는 민족도 믿음도, 지성도 모두 넘어서는 슬픔과 아픔이 있고 한 인간존재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는 양심이 있다. 양심, 그것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사람됨의 잣대일 터다. 그러나 이 사람됨을 짓밟는 바보들은 있어왔고 그들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바보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도 모두 국가라는 이름이거나 보기 좋은 어떤 단체의 정당한(?) 이름으로 만들어진 규약, 법규 따위로 몸을 숨긴 채 악은 악대로 사람들을 짓밟아 죽이고 모욕한다. 보편성이라는 말도 그 보호막의 한 꺼풀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떤 종족이든 그들이 지닌 문화나 버릇, 믿음은 존중받아야 하고 용훼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먹잇감으로 여기는 상품 신들에게는, 못 견딜 고정관념이 된다. 그래서 그들 상품 신들의 노예들은 그런 이름 ‘민족’이야말로 파기해 버려야 할 관념으로 둔갑시켜버렸다. 자아, 나를 지키기 위한 단위의 ‘민족’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 주장조차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남을 먹이로 삼으려는 악의로 뭉친 민족이야말로 저주받거나 사라져야 할 거품이지만 자아를 지키려고 뭉치자고 외치는 ‘민족’ 집단은 그 이름조차 성스러운 어떤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할 수가 없다. 작가회의 속에 든 ‘민족문학’은 바로 그런 이념을 지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에 대한 작가들 생각 | |
찬반론 | |
“정체성 여전…소통 안된 것일뿐” [찬성] 소설가 정도상 이념·찬반 논쟁으로 상처주는 것 바람직 안해 얼마 전에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가 있었다. 올해의 총회는 2007년도의 살림을 설계하는 자리였다. 지난해 11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회에서는 조심스럽게 명칭 개정에 관한 이야기가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강형철 이사만 명칭 변경에 반대했고, 나머지 이사들은 개정에 동의하고 총회에서 상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각 지회 지부장과 분과 및 위원장들은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작가들의 뜻이 명칭 변경으로 모아지면 이사회 의결을 거쳐 총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월 초에 사무국에서 각 지회 지부장들에게 이에 관한 의견을 묻는 이메일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모 언론에서 그 이메일 내용을 토대로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하는 바람에 갑자기 명칭 변경이 총회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는 계기로 되어버렸다. 총회가 개최되자 명칭 변경의 문제는 집행부와 회원들 간의 소통 부재로 인한 절차상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결국에는 명칭변경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절차상의 문제를 해소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명칭 변경을 세대 간의 문제로, 혹은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이념논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어떤 회원이 집행부와 회원들 간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점을 지적했는데, 바로 그 점이 핵심인 것이다. 제대로 소통을 하기만 하면 대다수의 회원들은 명칭 변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작가는 모름지기 문학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며, 오직 문학적 성취를 통해 그 생명력을 인정받는 존재들이다. 작가 개개인이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기에 조직활동을 일사불란하게 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현실이다. 소통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랜 세월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문인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이 이념논쟁이나 찬반논쟁을 통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곤란하다. 문학의 존엄을 지키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 지혜를 모아 시대적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야만 한다.
“내적성찰 없는 개명은 백기투항” 자기부정 논리·과정 없이 외부시각 의식한 변화 잘못
물론 그렇다고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쪽이 민족문학의 정신과 가치를 부정하거나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주장 속엔 분명 달라진 시대와 문학적 환경에 대응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는 충정이 담겨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창립 20주년을 맞아 ‘민족문학’을 버린 새로운 단체명을 원했다면 그에 걸맞은 자기부정의 논리와 이유가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구체적으로 이른바 개명론자들은 우선 세계사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 문학이 민족 내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 민족문학론자들은 민족적 가치와 이상에 합당한 문학만을 해왔던가. 당대 현실의 여러 모순과 분단시대 극복이라는 민족적 특수성과 민중적 현실에 주목하면서도, 타민족 또는 인류적 가치들의 차이와 소통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 민족문학론이 아니었던가. 두번째로, 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보수 세력 또는 일부 언론으로부터 좌편향적인 진영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개명 논의 자체가 작가회의 자체의 치열한 내적 반성이나 성찰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강제에 의해 이뤄졌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세번째로, 작가회의의 ‘경로당화’를 운운하며 ‘새로운 문학세대에 대한 배려’를 개명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대론적인 주장은 물리적 나이를 문학적 나이로 환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또한 그 새로운 문학세대가 과연 어떤 문학적 지향점과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거세되어 있다. 따라서 향후 작가회의 소속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될 사항인 개명 여부는 차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앞서 세계시민으로서 열린 자세와 사고가 요구되는 시대에도, 오늘의 세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족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데에 대한 치열한 내부 토론과 공론화가 더 중요하다. 또한 개명이 왜 하필 지금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그게 지금껏 민족의 일원으로서 ‘나’의 보편화, 세계화를 항상 염두해 두며 작품 생산에 임해 온 작가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