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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산 장로<신창감리교회 원로> | 박영산 장로, 그는 아직 청년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나이는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 할아버지이지만, 분명한 청년이다. 청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박영산 장로는 하고 있다. 시골 중학교에서 학생돌보미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동네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나이가 더 많은 노인들에게는 다정한 친구이고, 아들이다. 농사철에는 내 밭이 아니어도 소독통을 등에 질 수 없는 노인들을 대신해서 소독통을 짊어지고, 내 땅이 아니어도 거름을 준다.
그런 박영산 장로에게 동네 할머니들이 늘 다가 온다. 시금치 심을 밭을 갈아달라는 부탁을 하러 오기도 하고, 더러는 고춧대를 좀 뽑아달라고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우스에 비닐을 덮어 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있다. 동네 노인들이 부탁만 할까? 그렇지는 않다. 농사를 많이 짓는 박 장로가 고추를 따러 가면 할머니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고추를 따 주고, 배추를 심을 때도 모두 나와서 거들어 준다. 박 장로가 하는 일에 모른 척 하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된장을 담던 날도, 된장을 가르던 날도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서 거들어 준다. 내 집에 찾아온 노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즐겨하는 박영산 장로는 좋은 기독교인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다.
30대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된 박영산 어르신, 그분의 신앙여정을 따라가 보자. 박영산 장로가 처음 교회에 간 것은 어린 시절 병을 얻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그런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열 개의 발가락에서 발톱이 모두 빠질 정도로 온 산을 뒤지며 약초를 캐러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양식까지 다 털어 큰 굿을 한 다음에도 여전히 아버지의 병에 차도가 없자,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병은 고통이 아니라 집안에 복을 가져온 셈이다.
스무 살 무렵, 흙벽돌을 찍어 교회당을 건축했고, 교회에서 만난 착하고 영리한 처녀와 결혼한 한 후, 7남매의 자식을 두었다. 흙벽돌을 찍어 지은 예배당이 20여 년이 지나고 여기저기 비가 새기 시작했을 때, 박영산 장로는 교회에 쌀 백가마를 내 놓아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다시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교회는 또 한 번의 성전건축을 앞두고 있다.
목회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60년 넘게 시골 교회를 지키고 있는 박영산 장로, 그는 유쾌한 사람이다. 이야기꾼이다. 교회에서 야유회를 가거나 꽃구경을 갈 때 박영산 장로의 구수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지루한 줄을 모른다. 박영산 장로는 사람의 마음을 잘 살필 줄 안다. 최대한의 존중과 예의를 다하는 박영산 장로 앞에서 교인들은 자신이 귀한 신분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박영산 장로는 목회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장로이다. 목회자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박 장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목사님과 사모님 종합건강검진을 하게 되었는데, 물론 교회 재정에서 지출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교인들 마음을 목사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광고시간에 앞으로 나갔지요. 그리고 다음 주 헌금이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가 더 나왔어요.”
억지로 하는 헌금은 목표액을 겨우 채울 뿐이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헌금은 목표보다 훨씬 많다. 그 비결을 들어 보았다.
“성도님들에게 억지로 헌금하지 말고 목사님께 짜장면 한 그릇 사드리자고 말했어요. 그저 짜장면 한 그릇 값만 헌금하자고 말했어요. 목사님 한 분만 대접할 사람은 한 그릇 값만, 목사님과 자신이 함께 드실 분은 두 그릇 값을, 사모님도 함께 대접할 사람은 세 그릇 값을 하면 된다고 말했지요. 목사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거니까 이왕에 탕수육 하나 더 하면 탕수육 값을 보태서 정성껏 목사님을 섬기자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목사님과 짜장면을 모두 함께 먹는다고 난리가 났지요.
한 그릇 값만 헌금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오히려 더 비싼 음식을 대접하는 심정으로 더 많이 예물을 드린 사람이 많았어요. 물론 목사님께서 아주 많이 감동하셨고, 목사님의 목회는 더 힘이 나 보였어요. 목사님도 사람인지라 때때로 사람이 주는 위로와 힘도 필요한 법이지요.”
두 아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고, 맏사위도 목회자다. 딸들은 모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사위들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동네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진짜 장로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박영산 장로, 그의 학생돌보미 이야기를 들어 보자.
“내 나이가 이제 70 중반을 넘어섰는데, 나이 70이 넘은 사람을 누가 쓰겠어요? 그런데도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내가 학교에 와 주기만 하면 좋다고 해마다 부르네요. 작년에는 중학교 전 교직원의 이름으로 주는 감사패를 받았는데, 정말 기쁘고 보람을 느꼈어요. 학생들이 용돈을 모아 내의를 사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박영산 장로는 현재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있는 신창중학교에서 학생돌보미를 하고 있다. 적은 월급이지만 그 월급을 모으고, 학교에서 나오는 폐지를 모아다가 팔아서 학생들에게 다시 돌려준다. 체험학습비를 못 내는 학생에게는 그 비용을 내 주고, 매월 지원이 필요한 학생에게는 정기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편부나 편모, 혹은 조부모와 사는 학생들에게는 김치를 담아다 주는 등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외롭고 소외된 학생들이 박영산 장로를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박영산 장로는 학교에는 가장 일찍 출근하고, 남보다 항상 먼저 일을 한다. 늘 낮은 자세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분리수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달려와 함께 거들고, 낙엽을 쓰는 그를 보고 학생들은 스스로 빗자루를 든다.
박영산 장로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흡연하는 학생이 없다. 처음 근무할 당시에는 흡연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박영산 장로는 흡연하는 학생들을 야단치지 않고, 그들과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특별한 사랑을 쏟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하나 둘 금연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도 ‘장로님’으로 통하는 박영산 장로, 그는 참으로 선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오늘 이 사회에 기독교의 선한 빛과 향기를 발산하고 있다.
이 글의 출처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38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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