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에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계시, 신학 등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부활이라는 주제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논리적 근거를 통해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고,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각자의 믿음을 통해서만 부활의 신앙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활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어남과 일으켜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일어남인가요, 아니면 일으켜짐인가요?
일으켜짐이라는 단어는 신학적 수동태, 즉 성부 하느님의 주도권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일어남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인데, 비교적 먼저 쓰인 복음서에는 일으켜짐이라는 동사가 자주 나타나고, 비교적 후대에 쓰인 복음서에는 일어남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에 대한 의뭄과 이단들의 문제 제기가 많아서, 성부 하느님의 주도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두 표현이 함께 사용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인류 최초호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의미는 다시 살아남이지만, 소생과는 다릅니다.
심폐소생술을 통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남 +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나 과부의 아들은 예수님에 의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결국 다시 죽었기에, 부활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다시 생물학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몸으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신의 부활, 새로운 몸으로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일까?
첫번째 증거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서, 열두 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24장),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일곱 제자(요한21장) 등 많은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던 중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했던 사도 바오로(사도9장) 역시 중요한 증인입니다.
참고로, 부활과 관련해서는 여러 시대를 거쳐 다양한 논의와 의견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이한 논의 중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중세의 여러 신학자가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식사를 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화장실(?)을 가셨을까요?
다소 황당한 질문이지었지만, 이것은 부활한 육신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위층 방 문을 잠그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셨던 것처럼, 그리고 빵을 쪼개신 후에 홀연히
사라지셨던 것처럼, 부활한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다고 보아야합니다.
두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한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부활하셨다면 무덤은 비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활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실일까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건, 즉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까요? 역사적 사건이란 시공간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로 지상에 태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은 역서적 사건인가요? 한편으로는 그렇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의 시공간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역사를 뛰어넘는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부활 사건의 신학적 특성
첫째, 부활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 즉 감각적인 경험과 추론을 통해서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계시 사건입니다.
종말이라는 단어 자체의 뜻은 끝이나 마지막이지만, 신학적인 의미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판이란 단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았고 함부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심판은 단죄를 의미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사람에게 심판은 구원 내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이나 종말론을 그리스도론적을 해석하면 구원, 구원론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부활 사건이 종말론적 계시 사건이라는 의미는 믿는 이들의 미래를 예표 해주는 사건, 믿는 이들에 대한 구원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나 성모님의 승천 들은 신앙인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셋째, 부활 사건은 하느님의 능력과 주도권 그리고 구원 의지를 드러냅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구약과 신약 전체에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계약입니다.
이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이고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이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을 신학적으로 혹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활 사건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신앙의 중심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당신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아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 그분이 부활하셧을 거라고 기대하거나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20,1)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한 후에 다시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계속 무덤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무덤 박에 서서 울던 마리아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신줄 몰랐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육신은 다른 몸, 다른 음성,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잠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때까지도 못 알아보다가 어느 순간, 즉 예수님께서 평소 그녀를 부르셨던 것처럼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마리아는 왜 어두운 새벽에 예수님 무덤에 갔고, 왜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곁에 머물렀습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은 많이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외모와 음성은 달라졌지만 평소 자기를 부르시던 모습을 기억하였고 그래서 부활하신 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고, 사랑은 부활을 알아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항상 함께하는데, 그 중의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장 깊은 신비라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믿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