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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은식 (朴殷植, 1859.9.30 ~ 1925.11.1) |
호 |
겸곡(謙谷)·백암(白巖)·태백광노(太白狂奴) |
본관 |
밀양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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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 |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움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 교육, 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 독립협회가입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냄.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음.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함.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 장지연 등과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함.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
1912년 상하이에 도착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됨.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됨.
1918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됨.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1925년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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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학규신론(學規新論), 학규신론(學規新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한국통사(韓國痛史), 안중근전,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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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박문일(朴文一), 박문오(朴文五), 신기영(申耆永), 정관섭(丁觀燮), |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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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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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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