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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2) 2025. 2. 26
벧엘의 늙은 예언자
열왕기상 13:11~32
<지난 시간 요약 - 심판의 예언과 징조>
여로보암의 잘못된 종교정책에 분노하신 하나님은 유다 출신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여로보암을 책망하셨습니다. 때마침 여로보암이 벧엘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이 아니라 제단을 향해서 선포합니다(제단아 제단아). 장차 ‘다윗 왕가’에서 ‘요시야’라는 왕이 태어나 벧엘의 산당을 헐고, 태우고,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던 역대 제사장들의 뼈와 주변 무덤에 있던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 300년 후에 이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요시아 왕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왕하23장).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예언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징조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곧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제단에서 쏟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 여로보암 왕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면서 “그를 잡으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마비되어서, 다시 오므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말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 제단이 갈라지면서 재가 쏟아지는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당황한 여로보암은 그가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의 팔이 다시 회복되는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통하여 여로보암을 회개케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징조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벧엘 제단을 폐쇄하지 않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懷柔)하려 하였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예물도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를 회유하여 심판의 예언을 축복의 예언으로 바꾸려 했을 것입니다(발람 선지자처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않고 자신의 갈 길로 곧장 갔습니다.
그러면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향해 갔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주신 또 다른 사명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벧엘’에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예, 북쪽에 있는 ‘단’ 제단입니다. 거기에서도 똑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북쪽에 있는 ‘단’을 향해 갔을 것입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1절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누구였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나이가 많았다는 것과 그는 여로보암이 새로운 종교정책에 저항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의 아들들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에게 모든 일을 자세히 목격할 수 있었고, 아버지에게 그대로 보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간 늙은 선지자>
아들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벧엘의 선지자는 그것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는 회유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부랴부랴 쫓아갔습니다.
12~15절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그는 나귀를 타고서,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아 갔습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아마도 도보로 이동했기에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 그대가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늙은 선지자는 (여로보암 왕과 똑같은 말로)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며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단호히 거절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로 거절합니다.
16~17절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명하시기를, 여기에서는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속이는 늙은 선지자>
그러자 벧엘의 예언자는 거짓말로 그를 설득합니다.
18~19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그를 유혹한 말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늙은 선지자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이 그를 무장 해제시켰습니다(동료 의식 발동). 무장해제된 ‘하나님의 사람’은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서, 떡도 먹고, 물도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그들이 상에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20~22절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유다에서 온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서 자기 집으로 데려온 바로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의 입을 사용하셔서 유다에서 온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에게 심판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았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객사(客死)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순간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선 누가 더 잘못했습니까? 늙은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물론 둘 다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가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으니 더 잘못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잘못한 사람의 입을 통해 덜 잘못한 ‘하나님의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에 비례해 너무나 큰 심판이 주어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저도 고민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묵상 가운데 놀라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맡겨졌습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입니다. 이미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에게 사명을 맡긴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일회용으로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 믿음의 세계에서는 그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자로 살아갈 때 선지자인 것이지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떠났다면 그것은 선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번 쓰임 받고 버려지지 않도록 늘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사명을 맡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큰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 더 큰 책임과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맡겨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말에 속아, 자신이 받은 사명을 소홀히 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알리시려 본보기로 큰 심판을 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 후 실제로 일어납니다.
23~24절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준비해 준 나귀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걷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길에서 사자를 만나 그만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를 죽이기만 했지, 시체를 훼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타고 가던 나귀도 물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곁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울며 장사하는 늙은 선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늙은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25~30절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안장을 지우매/ 28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그 이야기를 들은 선지자는 즉시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시체를 수습하여 벧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울면서 자기의 묘실에 안치합니다. 아마도 자책성 눈물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의 거짓말과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하나님이 보내셔서 시험하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함). 벧엘의 늙은 선지자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 그가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확신합니다.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늙은 선지자>
장사를 마친 뒤에,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31~32절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내가 죽거든, 나의 뼈(시신)를 그의 뼈 곁에 두라고 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과 죽어서라도 함께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말씀, 곧 벧엘에 있는 제단과 사마리아 성읍 안에 있는 모든 산당을 두고 외친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훗날 요시아가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보존하였습니다. 왕하23:17~18).
<배우는 교훈>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가장 위험스러운 유혹은 대개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그를 유혹한 말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그를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친밀한 성도, 같은 일을 하는 동료,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 때로는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 1) 마16:23(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둘째, 우리가 받은 유혹은 주로 육신의 욕구와 맞아떨어지는 것들입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그를 유혹한 말은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고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과 전혀 다르다면, 상대방의 말을 거짓된 것으로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말을 따른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보다 늙은 선지자의 말을 더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는 유다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쳐 있었고, 배고팠고, 목말랐습니다.
하와의 범죄 – 창3:6(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보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다윗의 타락 – 지붕 위에서 목욕하는 여인(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몸을 봄(삼하11:2 – 정욕의 유혹).
사탄의 예수님을 유혹하는 내용(마4:1~10) - 떡, 성전 위, 천하만국.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는 유혹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 되지 않습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셨다고 거짓말을 하자 그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었음에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같은 하나님이 왜 다시 먹고 마시라고 했는지 확인해 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확인도 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24:23~24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사도 바울의 경고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갈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넷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조금의 틈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잘 이행하여 왔습니다. 유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북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그것도 축복의 말이 아니라 저주의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초대도 즉시 거절하고 곧바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게 신앙의 흔적이 있을 때, 그 흔적을 도구 삼아 자신의 신앙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이런 행동을 하는 내가 대단하지 않는가? 이렇게 하는 나의 신앙이 좋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신앙을 마치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의한 생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사람이 참으로 연약한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인간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섰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이미 넘어진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방심(교만)이 그를 무너지게 만든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사명이 있고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에 끝까지 집중할 때(방심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께 긍정적인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습니다.
바라기는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방심하지 말고 내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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