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듣기 좋은 소리
사30: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렘 43: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미 2:11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1. 사람의 본성 자체가 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있다. 그래서 세상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라는 말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어떤 한 집사님이 말씀하길, “일주일 동안 고되고 힘들게 일하다가, 좀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누리려고 예배당에 왔는데,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하시며, 죄인됨을 늘 말씀하시니, 설교가 지루하다” 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의 귀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실하게 가르침 받는 것보다 오히려 꿈과 허황된 이야기(dreams and fabulous tales)를 들려주는 것을 더욱 원한다. 그래서 그 성경의 교리에 대해서 눈과 귀, 아니 모든 감관을 외면할 뿐 아니라 그 교훈을 파괴하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려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와 같이 말씀의 위력과 효능은 거칠고 사나운 짐승과 같은 악인들의 흉포와 잔학성을 자신들이 드러낼 정도로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들을 격분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그 말씀과 교훈에 눈과 귀를 막는다. 이러한 사악함은 교리와 교사(both the doctrine and the teachers)를 뒤엎고 뽑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 목회자에 대한 혐오, 조롱, 경고, 박해, 추방과 고문 그리고 죽음을 낳는다. 그들은 한마디로 교활한 위선자들(cunning hypocrites)이다.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자부하면서도 목회자들이 부당하게 자신을 경책했다고 원망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이런 표현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실제 기질과 실상(the state of the fact and their actual dispositions)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악을 질책하고 날카롭게 징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증언을 하였음으로 선지자들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감정 상태가 그와 같았기 때문에 부드럽게 말해 주기를 요구하였고, 날카로운 책망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들 중에 어느 하나도 자신이 기만당하기를 원한다거나, 진리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뻔뻔스럽지 못하였다. 그들이 극진한 성의를 다하여 진리를 좇는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자기에게 유익하거나 즐거운 말만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들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이렇듯 위선자들은 얼마동안 가면을 쓰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몰아붙이면, 그만 제정신을 잃어버려 “네가 거짓을 말하는 도다”라고 까지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선지자가 전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겠다고 하고서, 이제 그를 거짓 선지자로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속은 얼마나 깊고, 변덕스러우며 비뚤어졌는지가 나타난다. 이렇듯 한입에서 거의 같은 순간에 단것과 쓴것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나아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렘11:21)”고 협박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기만당하는 편을 택하였고, 거짓된 것을 들려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위선적인 신자들은 아첨하는 자들을 끝없는 갈채로 환영하고자 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귀를 솔깃하게 해주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상이 미혹으로 말미암아 좌우하는 경향으로 흘러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게 그 미혹을 요구하는 이유다. 세상에서의 행복과 성공을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한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악덕을 참아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격려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바꾸고, 그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역시 미가가 말한 것같이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서 예언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선지자도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첨을 통하여 자기들이 아무 책망도 듣지 않을 때에, 어떤 면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되었다(they are in a manner exempt from God’s judgment.)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사면해 주는 아첨꾼(flatterers)을 얻을 때에, 그들은 행복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에 대한 거짓된 아첨을 통하여 속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첫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것(the first condition in God’s covenant was, — that he should rule among his people.)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전적으로 떠나갔다는 사실과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더 이상 맺고 있지 않다는 점이 증거된다. 그들의 욕망은 그들의 모든 부패에 대하여 엄하지 않고 관대한 아첨꾼만을 만나는 것이었다.
3.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시고, 신자들이 원하는 것들에 따라 모든 계획과 뜻을 바꾸시기를 바라는 것이 현실의 교회의 양상들이 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그러한 사악함에 대해 경고하였음에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양,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이제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양, 자기 정욕에 듣기 좋은 것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매일 매일 맛집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