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 십리를 걸어 열 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39 .노천명)
"사람은 당장 죽을 지경이 아니면 씨오쟁이는 베고 죽으라"
"남이 장에 간다니까 씨오쟁이 떼어 지고 간다" 라는 속담이 있다
씨오쟁이는 봄에 심을 씨앗을 보관하던 그릇으로 병 모양, 가방모양 등 형태가 다양했고
삼태기나 멍석처럼 주로 볏짚을 재료로 만든 것이었다.
예전에는 씨앗을 보관하지 않으면 이듬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쥐나 새로부터 피해를
막기위하여 줄로 연결하여 매어놓아야 했던 물건이었다.
인용한 두 속담에는 농경시대에 씨오쟁이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 의미가 잘 담겨져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나는 것은 기다림의 창고에 그리움으로 채워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기다려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던것 같다.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고, 여름방학을 기다렸고
여름방학이 끝나면 추석을 기다리고 가을소풍을 기다리고 가을 운동회를 기다렸다.
텃밭에 심은 참외가 노랗게 익기를 기다렸고 장에가신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기다려야 할 것은 한도 끝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다림들만큼이나 그리운 것들이 많아져 있는 것이다.
추석이나 설을 앞두고 서는 장은 대목장이라 불렀다. 일년 중 장이 가장 풍성하고 장꾼들의
수입이 가장 많을 때라 그렇게 불리웠을 것이다. 그리고 대목을 기다리는 장꾼들만큼이나
아이들 또한 그 장날을 기다렸었다. 명절 때나 되서야 부뚜막위에 돼지고기라도 한두 근 걸리고
싸구려 새 옷이라도 하나 얻어 입을 수 있고 차례상에 올려질 맛있는 음식을 먹어볼 수 있는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추석날이나 설날을 기다렸다기 보다는 그 앞에 있었던 장날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씨오쟁이 떼어 지고 간다'는 의미는 물색읎이 개갈안나는 사람을 빗댄 표현이라 하더라도
어른들마져 장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른들도 그러 하였을진대
하물며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몇 날을 졸라 어머니에게 몇 번의 다짐을 받아내고
돌아올 장날을 기다렸다
대목장을 앞두고 어머니는 이것저것 돈 살 것들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셨다.
앞의 시 구절에서도 나왔지만 장에 내다 파는 것을 ‘돈 산다’라고 표현하였다.
물건대신 돈을 얻는다는 의미인 사투리이다. 부피만 많고 값을 많이 받을 수 없는
채소에서부터 참깨 녹두 등의 햇곡식에 이르기까지 바리바리 장을 준비하셨다.
지난여름 품삯을 받아 보리쌀독에 숨겨두었던 돈을 꺼내고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시오리도 넘는 장을 나셨다.
내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장은 광천 장이었다. 장항선이 천안 아산 예산 홍성을 지나면 광천이다.
아직도 명맥을 잇는 토굴 새우젓이 유명하고 안면도등 주변의 섬사람들이 드나들 때는
장항선 일대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장이었는데 토사가 쌓여 뱃길이 막히고부터는 급격히
쇠퇴해져갔고 지금은 겨우 새우젓과 김 가공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광천 장은 양력으로 끝 숫자가 4일과 9일에 섰다. 장과 장 사이를 ‘한 장도막’ 또는 ‘한 파수’ 라고 불렀고 그 간격이 5일사이라 오일장이라 하였다. 그리고 장이 서지 않는 날은 무싯날이라 하였고.
얼마 전 열차를 타고 광천역에서 내려 상지다리를 건너 독고개를 넘고 븜무골을 지나 고향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십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세의 인도에 따라 홍해의 물길을 가르며 애굽의 핍박을 피해
가나안으로 향하던 유대인무리처럼 소나 염소를 끌고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숱한 사람들이 다니던 그 길은 이제 풀숲에 덮여 길마져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장에 따라가봐야 자장면 한그릇, 풀빵 하나 입에 넣을 형편도 아니었지만 장구경은 그 만큼 매력이
있었다. 장에는 온갖 물건들이 다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입이었다.
포목전을 돌아서면 ‘백환루’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중국집이래야 읍내에 한두 군데 밖에 없었고
자장면이 맛이 있다고 소문났는데 그곳 고향을 떠날 때 까지 맛을 보지 못했으니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먹고 싶었던 것은 만화방 옆의 풀빵이었다. 여름이면 까끌까끌한 호박잎 붙은 개떡만 먹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양은 솥 안의 풀빵은 중학교 졸업할 때에 저금했던 돈이라도 받으면 꼭 한번 먹어보겠다고 거창한 계획까지 세웠었는데 역시 먹지보지 못했다.
그리고 저녁나절 유혹하던 것은 왕대포집의 연탄 화덕 속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익어가던 꽁치나 자반 고등어구이였다. 동태나 갈치는 쉽게 먹을 수 있었지만 꽁치나 고등어자반은 귀하던
시절 이었다
역전통 오거리 우체국 옥상의 오종대에서는 오종이 불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니 싸이렌으로 정오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종이 분다' 라고 표현하였다. 점심은 집에서 싸온 찐 감자 두어 알로 때우고 뙤약볕에 한나절을 앉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보려고 손님들을 얼으고 달래고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아이들 추석빔 하나씩은 사줘야 하니 이젠 한푼이라도 깍으려고 얼으고 달래고
날은 저물어 가고 마을 사람들은 다 돌아오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아직 오시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장에 가신 날은 동무들과 같이 놀아도 별로 재미도 없고 늘 눈길은 마을 어귀에 가 있었는데, 추석을 앞둔 대목장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멀리서 동네 아저씨가 끄는 달구지가 나타난다.
당시에는 ‘구름마’라고 하였었고.
얼마간의 삯을 받고 장까지 짐을 실어다주고 돌아 올 때는 장 물건들을 실어오기도 하였다.
한참을 더 기다리니 어머니가 보이신다.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엄마 내 운동화 사왔어?’
속은 비어 허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종일 파느라 사느라 이젠 말할 힘도 없는데,
그저 자식이라는 것은 손에 든 짐이라도 옮길 생각은 아니하고 대뜸 운동화 타령이었으니.
차례상에 올릴 과일과 포 등이 그리고 우리들 추석빔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그렇게 신고 싶었던 운동화는 없었다.
산업화 이전 농경사회에서 오일장은 진솔한 삶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나는 곳이었다.
가꾸고 거둔 것들을 내다 팔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는 물물교환의 장이었고
사람을 만나고 그래서 사교활동도 하고, 각종 정보가 유통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날이면 가끔 천막을 치고 공연하던 서커스나 약장수는 질을 따지기 이전의
대중문화의 한 갈래이기도 하였고 늘 바쁜 일속에 흙 속에 묻혀 살아야했던 농민들에게
일상의 여유를 다소나마 가질 수 있는 날이었고, 한편으로는 상대적인 궁핍을 드러내
보이던 안타까움이 자리하고도 있었다.
봄의 장마당은 온갖 나물들이 넘쳐났다. 냉이 쑥 달래 그리고 고사리 취나물 머위 순,
온 산과 들 자연이 준 것들이었다. 부피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값이었지만 꼭 필요한 것들을
사고 반쯤은 썩은 국광사과 하나라도 자식들 먹이려고 사들고 오셨다. 요즘에야 사과를
옛날 무 먹듯 하지만 어려서는 어림도 없는 애기였다.
여름장은 봄에 심고 가꾼 채소와 과일들이 넘쳐났다. 호박 열무 오이, 과일로는
참외 수박 복숭아등이 흔했다. 그 먼 장에 이고 들고 내다 팔고 돌아오실 때 거의 갈치를 사들고 오셨다. 전에는 지금보다 갈치가 흔했었던 것 같다. 갈치를 사다가 개울에서 호박잎으로 씻어내고 아궁이에서 석쇠에 노릇노릇하게 구워놓으면 별미였다. 옥수수나 과일이든 좋은 것은 장에 내다 팔았고 상품성이 없는 것으로 집에서 먹었다.
가을이 오면서 추석 대목장을 기다리고 겨울이 오면 설 대목장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자꾸만 고향을 떠났고 이제 떠날 곳 없는 한 세상 살은 나이든 이들만 장날을 기다리고 막대 사탕 한 알이라도 들려줄 기다리는 손주도 없는 텅 빈 집안에 돌아오는 장날의 모습이 되었지만
나는 어디든 여행을 가면 꼭 시간을 내 그곳의 시장구경을 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같은 촌노들이
파는 묵이라든지 산나물이라도 한가지씩은 꼭 사가지고 온다.
백화점보다는 재래시장을 더 좋아하고 지금도 고향의 오일장을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촌놈이라는
스무가지 이유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