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남부 코트다쥐르 지방의 문화·예술 인프라는 세계적이다. 흔히 프로방스라고 불리는 남부 프랑스의 동쪽 해변을 지칭하는 코트다쥐르는 프랑스 말로 ‘남색 해변’이라는 뜻이다. 바닷물 색깔이 특이해 남색(아쥐르)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코트다쥐르 지방의 대표도시 니스(Nice)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시들이 산재해 있고, 이들 도시에는 특색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많다. 우선 니스에만도 현대미술관, 동양미술관, 쉐레미술관을 위시해 마르크 샤갈 聖書(성서) 국립 미술관과 앙리 마티스 미술관이 있다.
특히 샤갈미술관과 마티스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드골 대통령 당시 문화성 장관을 지냈던 앙드레 말로는 생전의 샤갈과 끈질긴 협상 끝에 상속세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성서를 주제로 한 대작을 제작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토록 합의했다. 앙드레 말로 장관의 집념과 샤갈의 정성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르크 샤갈 국립 미술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니스 주변의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방스(Vence) 역시 과거부터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고 많은 화가들이 정착한 예술의 도시다. 방스에서 유명한 곳은 생전의 앙리 마티스가 설계해 예술 작품으로 만든 로자리오 성당이다.
1943년부터 방스에 살면서 작품 제작에 열성이었던 마티스가 투병 중일 때 도미니크회 수녀 한 분으로부터 극진한 간호를 받았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병원에서 퇴원한 마티스는 3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1951년 로자리오 성당을 완성시켰다.
마티스의 손길이 남은 성당
마티스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과 노란색과 초록색은 오랫동안 코트다쥐르에서 살아온 마티스가 이곳의 상징인 바다와 미모사꽃과 올리브 나무를 연상시키기 위해 연출한 색채이기도 하다.
마티스는 계절에 따라 또 時差(시차)에 따라 오묘한 색상을 느끼게 하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직접 도안하고 벽화도 손수 그렸다. 그뿐 아니라 성직자의 예복과 미사용품들, 그리고 로자리오 성당 안팎의 모든 것을 스스로 도안하는 것으로 작업을 매듭지음으로써 성당 자체를 마티스 예술의 집약판으로 승화시켰다.
오늘날 전 세계의 미술관들과 수집가들은 마티스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열심이지만 그의 작품은 좀처럼 미술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마티스는 多作(다작)을 하지 않았기에 작품이 귀하고 비쌀 수밖에 없다. 로자리오 성당을 화폐가치로 환산해서도 안되고 계산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웬만한 미술관 전체와 맞먹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방스와 이웃하고 있는 생 폴 드 방스에 있는 마그(Maeght)재단 역시 규모 면에서나 미술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현대 미술관이다. 파리의 테헤란路(로)에서 20세기 초부터 화랑을 경영하던 마그 씨 부부는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많은 화가와 친하게 지냈고, 화가들 역시 마그 화랑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소망이었다.
이 같은 畵商(화상)과 畵家(화가)와의 숙명적 관계를 한 단계 승화시킨 마그 씨 부부는 자신들의 소장품을 뜻있게 전시하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생 폴에 미술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마티스와 샤갈이 모자이크를 맡았고, 미로와 자코메티는 수많은 작품을 정원에 전시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20세기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가들을 거의 모두 마그 재단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화상 마그 씨의 심미안과 예술가들과의 끈끈한 우정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니스와 칸 사이에 위치한 앙티브(Anti-bes)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도 특색 있는 곳이다. 2차 대전 직후 파리에서 코트다쥐르 지방으로 내려온 피카소는 당시 변변한 아틀리에가 없어 이곳 저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피카소에게 앙티브 古城(고성)의 큼직한 방 한 개를 작업실로 제공한 앙티브 미술관 학예관의 고마움에 피카소는 이곳에서 제작한 작품 상당수를 기증했고, 이 작품들을 토대로 앙티브市(시)는 고성을 피카소 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난달 앙티브에서 피카소 미술관을 들렀더니 상설전시와 함께 <1944-1949 피카소전>이 열리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앙티브 시대의 작품들이 세계 각국 미술관과 수집가들의 협조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피카소 예술의 전환점이었던 앙티브 시대의 예술 감각을 읽을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피카소는 그 후 칸과 가까이 있는 무장(Mougins)이라는 마을에 저택과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한때 무장 이웃 마을 발로리스(Vallauris)에서 도자기 작업에도 열중했다. 원래 발로리스는 고대 때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곳으로,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전통 도자기의 형태와 색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특색을 조화시켰다. 오늘날 피카소의 도예 작품을 보면 발로리스 전통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 발로리스 미술관에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가 전시돼 있다. 수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발로리스 미술관장 산드라 여사는 동양미술을 전공한 분으로 생전의 李聖子(이성자) 화백(필자의 모친)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이 화백의 전시회를 발로리스 미술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고발한 피카소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한국전쟁 중 프랑스에 건너와 창작 활동을 한 이 화백의 작품들을 같은 미술관에서 전시하게 된 것은 특별한 인연이라고 항상 말했던 산드라 관장은, 1950년대 초 피카소의 사상적 편력을 보면 그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과 작품 <전쟁과 평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오트의 레제 미술관
레제 미술관 입구의 벽에는 대형 모자이크 작품이 눈길을 끈다. |
세계적인 기술연구단지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소피아 앙티폴리스’가 위치한 비오(Biot)에는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 미술관이 있다. 1970년대 초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국제회의 취재차 코트다쥐르에 들르는 길에 처음 찾은 곳이다. 그 후 근 40여 년 만에 비오의 레제 미술관을 찾은 감흥은 남다른 것이었다.
니스의 샤갈과 마티스 미술관, 방스의 마그 재단과 로자리오 성당, 그리고 앙티브와 발로리스의 피카소 미술관은 그 후에도 자주 찾곤 했지만, 비오의 레제 미술관은 무슨 이유였는지 4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찾지 못했다.
그동안 미술관 주변에는 별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 정원의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들은 크게 자라 있었지만, 미술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레제의 모자이크 작품들과 전시실에 있는 대형 유화들이 주는 강한 감동과 인상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난 40년 동안 서서히 변한 필자의 안목과 느낌이었다. 1970년대 초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를 풍미하던 강성 노조 운동의 와중에서 페르랑 레제 미술관에서의 느낌은 기계 문명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이념적 작품 같다는 것이었다.
기계 문명과 인간사회 전체의 문제를 생각했던 작가의 보다 넓은 인식에 공감하기보다는 힘없는 근로자들의 편에 작가가 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40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작품을 보면서 당시의 느낌이 다소 편협했었다고 생각된 것은 이번 레제 미술관 관람의 또 다른 소득이었다.
처음에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 캉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던 레제는 22세의 나이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로부터 감화를 받았고, 마티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세잔의 작품에 감동을 받고 화면 구성이나 공간 표현 등을 진지하게 탐구한 것도 미술학교 시절이었다.
미술학교를 나온 후 1910년 피카소, 브라크, 이폴리네르, 들로네 등과 교유하면서 입체파(큐비즘) 운동에 참여해 대표적인 입체파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됐다. 레제는 자연과 인간 생활의 큰 구도를 즐겨 다루고 단순한 명암이나 색채로써 대상을 간명하게 표현하면서 기하학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기계 문명의 다이내미즘과 명확성에 매료되어 이를 반영한 다이내믹 입체파라는 畵風(화풍)을 만들게 됐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은 레제는 전쟁의 체험을 통해 기계와 인간의 공동 작업이라는 산업사회의 현실에 눈을 떠 명쾌한 구상과 단순한 색채 등 기계적인 표현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와 화가 몬드리안 등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회화는 물론 벽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타피스트리, 영화, 연극 등 예술의 모든 장르를 넘나든 작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페르낭 레제는 산업사회와 인간의 갈등을 구상 화법으로 탐구했던 작가였던 것이다.
건립 10년 만에 국립 미술관으로 승격
기계 문명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레제의 대표 작품 앞에 선 필자. |
1955년 레제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부인 나디아 여사는 2년 후인 1957년에 비오에 레제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결심하고 주춧돌을 놓았다. 1924년부터 레제의 제자였다가 조수로 일하던 나디아 여사는 레제가 별세하기 3년 전 정식 부인이 된 각별한 사이였다.
3년간에 걸친 미술관 건립 작업은 나디아 여사를 위시해 건축가 보쥐에르와 스베침 씨를 중심으로 브리스(세마믹), 멜라노(모자이크), 오베르(유리 공예) 씨 등의 정성과 열정으로 완성됐다. 개막식에는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이 중에는 브라크, 샤갈, 피카소 같은 당대의 거장들도 참석해 레제 미술관 개관을 축하했다.
레제 미술관이 완공된 후 코트다쥐르의 名所(명소)로 자리 잡게 되자 나디아 여사와 보쥐에르 씨는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레제 작품들을 1967년에 모두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문화성 장관 앙드레 말로는 레제 미술관을 국립미술관으로 격상시켜 오늘에 이르게 된다.
페르낭 레제 미술관이 주는 또 다른 감동은 평소 레제와 함께하며, 그와 가까웠던 친구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미술관이 건립됐고, 많은 동료화가들이 이를 지원했으며, 마지막으로는 국가가 이들의 뜻을 높이 평가해 국립 미술관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미술관 건립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국립미술관이 된 레제 미술관의 역사적 배경은 우리나라의 많은 공립 또는 사립 미술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코트다쥐르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미술관과 예술 작품은 남부 프랑스에 하나의 거대하면서도 보석과도 같은 미술 인프라를 구성하고 있다. 이 같은 미술 인프라는 화가들과 수집가들, 그리고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의 뜻과 지원에 의해 하나하나 만들어져 오늘날 코트다쥐르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