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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 통일 후 지방에 포진해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융합하는 민족통합정책을 지향해야했지만 신라의 지배층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성골과 진골 중심의 정치를 실시해 내부권력투쟁에 몰두해 혼란스러웠고, 유민들은 도탄해 빠지자 각 지에 있던 옛 유민들이 봉기를 하게 된다. 크게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해서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가 싸우는 시대를 후삼국시대라고 말한다.
= 궁예와 청주인
궁예는 청주와 깊은 연관이 있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 신라가 혼란에 빠지자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는데 기훤이 궁예를 업신여기자 궁예는 기훤 휘하에 있던 원회, 신훤(申萱) 등과 같이 도망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이후 궁예는 양길의 장군이 되어 성과 현을 공격해 세력을 키웠는데 조선 영조 때 기록인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양길을 섬기고 있으면서 청주를 경략하고 이곳에 상당산성을 축성하고 도읍을 삼으니 따르는 무리가 점차 많아졌다.〔往見梁吉 吉分兵東略地 因築成于此都居之 衆漸多〕”라고 말해 궁예는 청주를 기반으로 세력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정복동토성은 상당산성 북쪽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있는데 궁예가 근거지로 삼았던 상당산성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상당산성 서문 근처에 토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정복동토성으로 보고있다. 영조 20년(1744)에 상당산성의 승장(僧長) 영휴(靈休)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말에 궁예(弓裔)가 양길(梁吉)의 부하로 있다가 군사를 나누어 동쪽을 공략할 때에 지금의 상당산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후에 후백제의 견훤이 상당산성을 빼앗고, 상당산성의 서문 바깥 까치내[鵲江](미호천)의 곁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부세(賦稅)를 거두어 쌓아 두었다가 상당산성 안으로 운반해 들였다. 이러한 이유로 후세 사람들이 시로 읊기를 들판의 토성은 백제 때를 지나오고, 암자의 금부처는 삼한(三韓) 때를 거쳤다고 하였다."
라고 말해 후백제가 먼저 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정복동토성이 후삼국의 쟁란기인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였으나, 성내에서 돌화살촉과 돌창,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고, 성의 위치와 주변 여건이 비교적 성곽으로서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시대의 전·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궁예는 897년 스스로 왕이 되고 양길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양길의 부하였던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국원, 청주, 괴양의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궁예는 901년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摩震)이라는 국호로 바꾸는데 ‘청주인 1천 호〔靑州人戶 一千〕’를 철원성에 이주시켜 도읍으로 정하였다. 당시 1호당 6~7인으로 보면 대략 6~7천 명의 다수 인원이 청주에서 철원으로 이주되었다. 학계에서는 궁예가 청주 사람 1천 호를 이주시킨 이유에 대해서 5가지 설을 제기하고 있다.
궁예가 청주인을 이주시킨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청주인들의 철원 이주는 청주인들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 사람 아지태(阿志泰)는 궁예의 측근으로 동향 사람들을 모함하여 궁예의 총애를 받았는데 당시 시중(侍中)이던 왕건이 청주인들의 모함을 해결해주었다. 또 궁예는 청주의 땅이 기름지고 호걸들이 많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거짓 참소로 청주의 군인 윤전(尹全)‧애견(愛堅) 등 80명을 경내로 불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왕건이 그들을 고향으로 다시 보내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청주 출신 중에 친왕건파가 생기게 되지만 대부분 친궁예파였다. 왕건은 918년 6월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의 태조로 즉위하자 친궁예파인 청주 토착 세력은 후백제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려 모의하였다. 친왕건파인 청주 출신 장군 견금(堅金)은 청주 토착 세력의 반란을 미리 알게 되어 이를 태조에게 보고하였고, 태조는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유금필(庾黔弼) 등에게 병사 1,500명을 이끌고 진주(鎭州)에 진을 치고서 대비하게 하였다. 이를 안 청주의 토착 세력은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 진선(陳瑄)·선장(宣長) 형제,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등 청주 출신의 호족 세력은 반란 사건을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하여 처형당하게 된다. 태조가 청주의 반란을 진압한 지 1년 뒤에도 청주의 호족들이 고려에게 귀부하지 않고 반란을 도모하려하자 태조가 직접 회유하기 위해서 청주로 순행하였는데 드디어 청주에 성을 쌓게 명령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청주의 호족은 고려에 복종하였다.
=고려와 청주 호족 세력
고려는 결국 후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민족통합 정책 일환으로 지방 호족들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자신을 낮추는 ‘중폐비사(重幣卑辭)’와 지방 호족들의 딸과 혼인하는 혼인정책을 시행해 정국을 안정시켰지만 태조 사후 호족가문들 사이에 권력투쟁의 빌미를 주었다.
태조는 청주 호족과 혼인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청주의 호족이 가진 강력한 세력을가지고 있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견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태조는 재위 23년(940) 전국적으로 신라의 행정구역을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으로 개편하였다. 주·부·군·현을 개편할 당시 청주 지역은 서원경에서 상급행정기관인 주가 되어 청주(淸州)로 불리었는데 이때 청주의 지명이 지금의 청주라는 지명의 유래이다. 각 주·부·군·현 개편과 더불어 지방 호족 세력에게 토성(土姓:토착 성씨)을 나누어 정해주는 토성분정(土姓分定)을 하게 된다. 토성분정은 혈연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게 하고 일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토성을 가진 집단은 대부분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 되었고, 출신지에 남아있던 호족들은 향직을 담당한 재지이족(在地吏族)이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청주 지역의 토성(土姓)은 12개, 망촌성(亡村姓:중심지 주변 촌의 토성)은 4개가 있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청주의 토성 집단으로는 김(金)씨, 이(李)씨, 곽(郭)씨, 한(韓)씨, 경(慶)씨, 정(鄭)씨가 있었다.
김(金)씨 | 이(李)씨 | 곽(郭)씨 | 한(韓)씨 | 경(慶)씨 | 정(鄭)씨 | |
3품이상 관인 | 6 | 7 | 6 | 9 | 5 | 4 |
공신 | 1 | 1 | 1 | |||
후비 | 2 | 2 |
표 고려 시대 청주 토성 중 중앙에 진출한 인물
고려 초기부터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청주의 토성으로는 김씨, 이씨, 곽씨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청주 김씨는 급격히 쇠퇴하여 이름들이 나타나지 않고, 청주 이씨와 곽씨는 고려~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을 유지하며 여러 인물이 중앙에 진출하였다.
청주 김씨에 고려의 중앙으로 진출한 인물은 김근겸(金勤謙), 김긍률(金兢律)이 있다.
김근겸은 고려 초기 청주 장군 견금 반란 사건과 관련있는 친왕건파였다. 〈김덕겸묘지〉에 따르면 김덕겸에 6세조로 나오며 그의 관직은 수사도삼중대광(守司徒三重大匡)으로 고려 건국 기에는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인 김영념(金英念), 김순진(金順眞), 김덕겸(金德謙)은 3대에 걸쳐 승통(僧統)을 이어 현화사(玄化寺)의 주지(住持)를 역임하였는데, 이들은 인종 대에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던 인주(仁州) 이(李)씨인 이자겸 세력과 대항하면서 현화사를 중심으로 불교 교단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긍률은 고려 초기부터 중앙에 진출한 인물로 그의 두 딸이 고려 제2대 혜종과 제3대 정종의 비가 되어 고려 초부터 왕실의 외척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김씨는 무신정변기부터 중앙과 지방에 뚜렷한 명문거족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청주 이씨의 대표적인 문벌로는 왕가도(王可道)인데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본명은 이자림(李子林)이다. 성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서경에 파견되어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지내고 현종 때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왕이 서경에 왔을 때 반란을 일으킨 상장군 최질, 김훈을 제거해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고, 그 후 상주국개성현개국백(上柱國開城縣開國伯)의 작위와 왕씨 성을 받아 왕씨가 되었다. 그의 딸 또한 덕종(德宗)의 비가 되어 문하시랑내사평장사(門下侍郞內史平章事)에 올랐다. 고려 후기에 청주 이씨는 이공승(李公升)이 있는데 무신 정변기에 살아남은 문신으로 그의 두 아들 이춘로(李椿老), 이계장(李桂長)도 무신 정변기에 문신으로 활약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청주 이씨는 여전히 거족이었다.
청주 곽씨는 고려 전기에 중앙에서 활동한 인물로 곽원(郭元)과 곽상(郭尙)이 있었다.
곽원은 성종 15년에 과거로 급제하여 현종 대에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 창지정사(參知政事) 등 요직을 지냈다. 그는 거란과 송나라에 사신을 다녀오기도 하고, 거란 침입 때는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청주 한씨는 초기에 강력한 토착세력 중 하나였지만 원간섭기와 고려말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9명의 3품 이상 관인을 배출하였다.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한씨의 중시조를 한란(韓蘭)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씨 성의 근원은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의 후손 기준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란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고려 군사에게 군량미를 제공하고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청주에는 청주 한씨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데 그 유적으로 방정(方井), 한란 묘소 및 신도비, 무농정(務農亭), 청주 한씨 시조제단비가 있다. 방정은 그가 판 네모난 우물을 말하는데 왕건의 군사들에게 식수를 제공한 곳이라고 말한다. 무농정은 그가 향리로 있을 때 청주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알려준 곳이라고 전해진다.
청주 경씨는 고려 초기에 문벌귀족으로 활동은 뚜렷하게 나오지 않지만 무신 정권 제3대 집권자 경대승은 대표적인 청주 경씨이다. 무신 정권의 집권자들은 대부분 재산과 사병을 길러 권력쟁탈전만 하였지만 경대승은 무신 정권 집권 후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해 무신정변 이전에 상태로 회복하려 하였다. 또한 경대승의 부친 경진은 무신 정권 제2대 집권자 정중부 편에 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는데 그는 청주에서 남의 전지를 빼앗아 재산을 축적하였다. 경대승은 부친 경진이 죽자 부친의 전지 문서를 선군도감(選軍都監)에 헌납하고 그는 생활고로 고생할 정도로 청렴하였다. 고려 말에 중앙에 진출한 대표적인 청주 경씨는 경복흥(慶復興)이다. 그는 공민왕의 배원(排元) 정책에 협력해 친원파 권문세족 기철(奇轍) 일당을 몰아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신돈이 권세를 잡아 자신이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자 신돈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해 가족은 노비가 되고 본인은 흥주로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죽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좌시중에 올라 정방제조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자 그는 부원세력인 임견미, 이인임이 우왕(禑王)을 세우는 것에 반대하고 왕의 존친을 세우라고 말해 부원세력에게 미움받게 되었다. 우왕 때 이인임이 전횡하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평소 술에 취해 살아 관리들에게 문책을 받았는데 1380년 명나라에서 북원 세력 나하주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임견미와 이인임 등이 이를 기회로 삼아 경복흥이 술에 취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탄핵해서 그는 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청주 경씨와 관련된 유적은 청주시 지북동 일대에 많이 있는데 본래 청주 경씨의 기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적으로는 청주 경씨 경번, 경수, 경사만 3대의 묘소, 경대승 신도비, 조선시대 효자로 알려진 경연 묘소와 그의 효자비 등이 있다.
청주 정씨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정의(鄭顗)가 고종 때 대장군이 되어 고종 20년에 서경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던 와중에 전사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그의 공으로 문벌귀족 가문이 되었다. 고려말부터 청주 정씨는 유력한 가문들과 통혼하면서 권문세족이 되었다. 한편 이성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청주 정씨에서 조선왕조의 개국공신 2명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도 계속해서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말 임시 수도 청주
고려 말기에는 홍건적의 난이 2차례 일어나는데 심지어 공민왕 10년(1361)에는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해 고려를 수도 개경을 함락하였다. 공민왕은 복주(福州:현 안동)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후 고려 장군 정세운이 고려군 20만 명을 이끌고 개성을 함락시킨 홍건적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자 공민왕은 재위 11년(1362)에 다시 수도 개경으로 환궁하기 위해 안동을 떠나 청주에 들러서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아 7개월간 머물렀는데 지금의 청주 읍성이다. 이곳에서 공민왕은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청주 읍성 공북루에 올라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환송식을 치루고, 응제시(應製詩) 짓기 등의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공민왕은 취미인 승마를 자주 즐겼다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청주 읍성에서 그해 8월 8일, 8월 10일, 10월 2일 등 세 차례나 승마를 즐겼다고 나온다.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천산대렵도〉가 있는데 이 그림에선 원나라식 변발을 하고있어서 공민왕이 배원 정책을 펴기 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 4일에는 공민왕은 『고려실록』을 회수해 엄히 수장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고려실록』은 1390년 충주 읍성 서고로 옮겨졌다. 조선 세종 때 세종은 충주 읍성 서고에 수장된 고려실록을 한양으로 옮겨, 이를 바탕으로 김종서에게 『고려사』를 집필하도록 명했다.
또한 공민왕은 청주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과거 급제한 인물이 박의중(朴宜中:초명은 박실), 정천익(鄭天益)이다. 박의중은 훗날 명나라로부터 철령위를 되찾은 인물이고, 정천익은 문익점의 목화씨를 발아시킨 인물이다. 14세기 중반에 중원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왕성해지게 된다. 명나라는 원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고려에게 철령 지역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공민왕은 재위 5년(1356) 지역을 탈취하고 화주(和州)를 설치하고 고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의중은 이때 명나라로 가서 명태조 주원장을 3단계 논리로 설득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조종으로부터 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니 이는 본래 본국의 땅입니다.
②지정(至正) 16년(1356) 사이에 원나라 조정에 아뢰어 ①항의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을 다시 본국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③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고, 두터운 덕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몇 개 주의 땅을 하국(下國)의 땅으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박의중의 논리에 설득당해 결국 철령위 설치 의사를 철회하고 그에게 고려의 공자라는 뜻으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는 칭송을 주었다. 그러나 박의중은 이러한 성과를 가지고 귀국하는 도중에 이성계가 요동정벌 4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에서 고려의 군대를 회군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히 요동을 통해 개경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박의중은 1389년에 외교 담판에서 승리한 공으로 고려 창왕으로부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이란 호와 문의군(文義君)에 봉해지게 된다. 이에 대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만일 박의중이 항변을 잘하지 않았다면 우리 영토의 절반을 잃어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공자가 ‘사신이여, 사신이여!’라고 한 말은 의중에게 합당하다 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유학자였지만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에 있는 보물 〈대지국사탑비〉는 고려 말기에 충주 억정사 주지를 지낸 고승인 대지국사를 기념하는 탑비로 그 탑비의 글을 박의중이 지었다. 그는 대지국사에 대해 “다른 사람의 지난 악행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회포에 남겨두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며 극찬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할 때 박의중은 김제로 낙향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는 정도전 등과 『고려사』를 편찬할 때를 제외하고 한양도성을 출입하지 않았는데 그의 문중에서 편찬한 박의중 시문집 『정재일고』에서 ‘문닫고 용렬한 무리와 끝내 만나지 않지만’, ‘태평시절 벼슬했지만 부끄럽게 이룬 공이 없네.’라고 말해서 자신을 찾아오는 조선의 부용세력을 비판하고 자신이 벼슬했던 고려말시기를 ‘태평시절’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전히 고려의 신하라고 생각하였다. 말년에 그는 김제에서 67세에 졸하였다. 박의중이 고려 창왕으로부터 봉해진 문의군의 ‘문의’와 박씨 성을 따서 ‘문의 박씨’가 이루어졌는데 그는 문의 박씨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현재 청주시 상당군 문의면이 있던 곳이 문의 박씨의 관향인데 왜 이 지역을 관향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의 두번째 부인이 청주 한씨였고, 그 부근에 청주 한씨 시조 한란의 묘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그곳에서 처가살이를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려의 멸망
고려말에는 소수 권문세족이 강력한 권세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사전(私田)으로 만들었는데 권문세족의 땅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다. 또 그들은 본래 고려의 토지제도를 폐하고 땅 주인이 여러 명이어서 한 해에 여러번 조세를 거두어 백성들이 하루종일 일해도 조세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사전 혁파와 대안적인 토지제도를 해결할 수 있는지가 고려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라고 불린 세력은 권문세족에 대항세력으로 등장했는데 이들은 민본적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성리학 이념을 가지고 사회 개혁을 지향하였다. 본래 신진사대부의 대부분은 목은 이색의 제자들로 이색은 성리학자 이제현의 제자였다. 이목은 스무 살 때 원나라로 유학가서 원나라 국자감 생원이 되고 부친상으로 고려에 귀국해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지만 다시 원나라로 가서 원나라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는 국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말년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지내면서 많은 문사들을 길러내는데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다 이색학당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려 왕조 존속과 토지개혁 문제에 의견이 갈리어 두 파를 형성하였는데, 하나는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개혁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적 ‘역성혁명파’였다. 온건개혁파는 고려 왕실의 존속과 토지의 소유자를 한명만 존재하게 하자는 온건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했고, 역성혁명파는 새 왕조 개창과 모든 토지를 국가에서 거두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자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결국 이목 중심의 온건개화파는 정도전, 조준 중심의 역성혁명파에게 밀려 새 왕조 조선이 개창되었고, 사전을 혁파해서 본래 고려의 토지제도인 과전법이 실시되었다. 조선 개창후 온건개혁파 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는 삼은(三隱)으로 불리었는데 은(隱) 자는 은거하다는 뜻으로 조선 왕조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의 제자들은 현실정치에서 배제된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조선 중기에 진보적 ‘사림파’를 형성한다.
과거 청주 읍성이 있던 청주시 청주중앙공원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에는 이색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390년(공양왕 2)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여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이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무고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색 등 10여 명이 옥에 갇히는 소위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히게되었다. 마침 큰 홍수를 만나 청주성이 물에 잠기자 이색 등은 이 은행나무에 올라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이는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 일화이다.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청주 사람들이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에게 더 동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또 청주에는 온건개혁파 영수 목은 이색의 영정을 봉안한 목은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목은 이색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청주시 상당구 주성동에 소재해 있다. 이 사당은 이색의 학덕과 청주에서의 유서를 기리기 위해 후손인 한산 이씨 이붕해와 그의 종형 이조해서 주도하여 숙종 40년(1714)에 세운 사당이다. 아마도 이목이 개경에서 청주로 놀러왔을 때 청주를 소재로 시를 남긴 영향이 컸을 것이다. 또한 이목이 청주에 놀러온 것도 청주 한씨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한수(韓脩)와 교분이 깊었던 것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