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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표어 설교 3 +
+ 제 목 : “주여! 치유하게 하소서! (3)
"분노를 치유하라!"
+ 본 문 : 창세기 37장 1절 - 11절 (구약성경 56쪽)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아멘!
세상에는 벼라별 대회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싸울 테면 싸우란 말이야!"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큰 소리 지르기 대회” 가 있습니다. 이 “큰 소리 지르기 대회” 에서는,
세 아이를 양육하는 한 아버지가 우승을 했습니다. 요쉬히코 카토라는 사람인데 아버지 카토는,
그 큰 소리 대회에서 750불을 상금으로 탔습니다. 그가 "싸울 테면 싸우란 말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115.8 데시빌로 우승했습니다. 그 정도면 달리는 열차 소리보다, 더 큰 소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느냐고 묻자, 세 아이와 지내면서 큰 소리를 쳐서 그렇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얼마나 화가 많이 났으면, 얼마나 자주 큰 소리를 질렀으면, 달리는 열차,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게 되었을까?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금방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때에, 아무래도 자주, 아주 자주 큰 소리를 지르고 혈기를 부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아이들 키우는 일 말고도, 살아가면서 정말 화가 날만한 일들이 정말 정말 많이 있습니다.
운전하다보면 자주 겪는 일인데, 끼어들 상황이 아닌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끼어듭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다행히 안전하게 피하면서 ‘운전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생각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표시만 보면 그냥 갈 참이었는데 미안하다는 표정도 전혀 없고 오히려 큰소리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이 목사만 아니었으면..." 하고 화를 삭이면서도 정말 화가 납니다.
이런 경우 과연 목사이기 때문에 모든 분노를 참아야 합니까? 아니면 버럭 화를 내야 합니까?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 합니까? 아니면 화를 내도 괜찮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이야기하길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내?" 하고 너무 쉽게 말해 버립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 사실 화가 더 납니다. 그래서 진짜로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분노가 죽인다.' 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화날 때 마음껏 화내십시오.
빨리 죽습니다. 화나도 꾹꾹 참으십시오. 가슴이 터져 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화를 냅니까?
아니면 화를 참고 계십니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분노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는 성질이 너무 급해서,
고민이라며, 목사님에게 자기 문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작은 일에 가끔 분노를,
폭발하지만, 그러나 뒤끝은 없습니다. 금방 풀어 버립니다. 마음에 전혀 두고 있지를 않습니다.
나는 일분도 안 걸려 그 사람하고 그 자리에서, 다 툭툭 털어 버리고, 화해하고 끝내버립니다.'
목사님이 그 부인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합니다. “엽총도 한방이면 끝나지요. 오래 안 걸립니다.
그러나 한방만 쏘아도 그 결과는 다 박살납니다. 그렇게 죽고 박살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노는 터지고 나면 주어 담을 수 없습니다. 분노 폭발은 많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평생을 통해서 화를 한 번이라도 내 보지 않으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삶을 살다보면, 화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화가 났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화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처방과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교향악단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혈기를 잘 부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화가 나면, 지휘봉을 두 손으로 부러뜨리기도 하고, 음악가들에게 악보를 마구 내던집니다.
일단 지휘봉이 부러지면 정상으로 돌아와 리허설을 계속하는데, 지휘봉을 두 손으로 부러뜨리려고,
하다가 안 되면 악보를 던지는 것을 본 도서관 사서가 토스카니니가 귀한 악보를 망가뜨리지 않고,
혈기와 분노를 터뜨리지 않도록 하려고, 쉽게 부러지는 지휘봉들을 많이 준비해두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분노를 다스리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분노를 다스리십시오.
오래 전에 44살 된 고독한 중년남자가 직장에서 상관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화가 나자 그는 그 날, 직장 일을 끝내지도 않고,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마음속에 분노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권총 세 자루를 가지고,
직장에 나타나 14명의 직장동료들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시의 우체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에 분노의 감정을 다루지 못해 일어난 파괴적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농사를 지은 가인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양을 치는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므로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 역시 분노를 다루지 못해 일어난 비극적인 불행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에서도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다루지 못해 일어난 비극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들 중에 유독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힐 만큼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꿈 이야기를 했을 때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다른 아들들이 뭐라 하든지, 야곱은 그 꿈의 내용을 듣고 요셉의 꿈을 인정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을 왜 그토록 사랑했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요셉은 야곱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14년을 하루같이 무보수로 일할 만큼, 너무너무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 아닙니까?
그토록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뒤늦게 낳은 늦둥이였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요셉에 대한 사랑이 더 했는데, 그의 생모마자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야곱은 요셉을 더 사랑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면서 야곱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던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야곱이 요셉만을 감싸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도무지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멘! - 형들이 요셉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샬롬" 이라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가족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아는 체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습니다. 요셉이 말도 안 되는 꿈 이야기를 하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생각하기를 ‘어떻게 사람이 그 부모에게,
절을 받으며, 어떻게 그 형제들에게 절을 받고 섬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꿈 이야기를 하는 동생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화가 난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리고 맙니다. 바로 이것은 요셉의 형들의 마음을 끌어 오르게 하는 분노의 결과였습니다.
이 시간 요셉의 형들의 마음속에 생긴 분노와 그 분노의 치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분노란 무엇입니까? 먼저 분노의 정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분노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가벼운 짜증(irritation)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의해 초래된 가벼운 불쾌감 정도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경험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개(indignation)의 단계입니다. 분개의 단계에서는 잘못된 것에 대한 앙갚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짜증과 분개는 표현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격분(wrath)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분하면, 보복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네 번째는 격노(fury)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노하면, 폭력과 감정적인 통제의 상실까지도 나타납니다.
다섯 번째는 광분(rage)입니다. 미친 사람처럼 화내는 광분은 가장 위험스런 형태의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의 다섯 단계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의 요셉의 형들은 그 분노가,
네 번째 단계와, 다섯 번째 단계인 격노와 광분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이 "시기했다. 분노했다.“ 고 했는데, 그 시기와 분노가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까? 사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크게 화내는 분노를 마음에 품은 것은,
큰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처럼, 누구나 분을 낼 수 있지만, 죄는 짓지 말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열여덟 번 이상이나, 하나님도 분노해야 할 일에는 크게 분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 역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을 향하여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채찍을 휘두르며, 물건을 놓고 파는 상을 엎으시기까지 화를 내며 성전에서 그들을 쫒아냈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도, 독설을 퍼부으며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더라도 조건이 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날이 저물기 전까지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해도, 형제들과 싸우더라도, 며칠씩 오래오래 분노를 품고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낮에 있었던 불쾌한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밤잠을 설치는 경험을, 누구나 자주 경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무엇을 하게 됩니까? 화가나서 씩씩거린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그 사람을 저주한다거나, 어떻게 하면 골탕 먹일까 궁리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골탕 먹일 방법이 떠오르면 화가 가라앉고, 그제야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잠을 자게 됩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들고나야 잠이 오니, 우리 인간들 정말로 우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죄짓는 악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아멘!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죄짓지 않기 위해서,
분노를 하지 말며,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해야만 합니까?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찰스 R. 스윈돌 목사님은 “분노에도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가 있다.” 고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 말씀과 뜻이 고의로 불순종 되었을 때 분노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마음속에 의분이 끌어 올라야 정상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것을 보고, 의분이 끌어올라서,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열왕기상 11장의 말씀을 보면, 솔로몬의 말년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말년에 이방여인들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신을 들여와 섬기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11장 9절과 10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에게 두 번이나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는 악행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순종을 할 때, 언제나 강하게 분노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기들의 권한 밖에 있는 지배권을 취할 때 분노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자유가 위태로워질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오히려 구경꾼으로 있는 것은 죄가 됩니다.
셋째로, 부모들이 그 자녀들을 불공평하게 다룰 때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가 발생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공평하지 못하게 다룸으로 그들을 격동시킬 때, 그들은 분노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할 때의 기본을 “주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양육하라” 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 이외의 일로는 분노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라든지,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든지,
진실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채 너무 속히 반응하면서 분출시키는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홧김에 범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자식을 끔찍히 사랑하던 부모도 화를 참지 못하면 그 자식들을 죽입니다.
분노는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려면, 사소한 감정을 잘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알랭(Alain Emile Auguste Chartier) 이라는 사람은 그의 행복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사람은 흔히 큰 불행에 대해서는 체념을 갖지만, 조금 기분 나쁜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은 큰 불행보다는 사소한 일에 있다.
사소한 기분 나쁜 일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는 것이며, 또 그 사소한 일들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그릇이 기울어지면 엎어지는 물과,
같은 것이니, 늘 조심성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일단 기울게 되면 평화와 조화가 파괴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울기 쉬운 순간에 억제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미는,
일들은 알랭의 말대로, 대부분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주,
사소한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인간관계에 성공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힘센 사나이라고 믿고 있는 한 장사가 어느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한참 걷다보니 사과 크기만 한 이상한 물건 하나가 길의 중앙에 놓여 거슬리게 합니다.
'아니, 감히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다니.' 그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을 발로 툭 한 번 찼습니다.
그러자 사과 크기만 했던 그것이 어느 새 수박 크기만 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장사는 그것을 보고,
더 힘껏 발로 찼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바위만큼 커져 버렸습니다. '뭐야, 나를 이겨 보겠다고?
어림없다!' 하며 열이 오른 장사는 몽둥이로 그것을 마구 내리 쳤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키보다,
더욱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는 그것을 들고 집어던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커져만 갔고, 덩달아서 그의 얼굴도 일그러져 갔습니다.
어쩔 수 없게 된 장사는 그것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앞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산더미만큼 커진 물건을 보고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자 순식간에 사과 크기만 하게,
변해서 길모퉁이에 툭 떨어졌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꾸 건드리지 마세요.
그것은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두거나 오히려 웃어넘기면 작아지지만,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커지고 만답니다. 조금만 참으면 곧 잊혀지는 그것은 바로 당신 마음속에 들어 있는 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여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노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잠언 19장 11절 말씀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 아멘! 사소한 일에 노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그 다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려면, 말조심 - 혀를 억제해야 합니다.
혀를 억제한다는 것은 분노를 다스리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분노를 일으킬 만한 소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의 말에는 아주 안 좋은 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말씀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많은 경우 성도들이 상처받는 것도 이 "혀의 문제, 말의 문제" 에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이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다른 사람의 신앙인격을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에 대해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쉽게,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수만 있다면 말을 적게 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혀를 다스리는 지혜입니다. 혀를 다스리기에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혀를 길 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문제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문제만 다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상관치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서 문제를 찾고, 그것을 인정할 때, 내 혀가 통제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혀를 통제함으로써 아름다운 말만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5장 1절 말씀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혀를 다스리십시오. "노를 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려면,
정직하게 말함으로 분노가 자라지 못하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분노가,
자라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아멘!
우리는 말 한 마디라도 사랑스럽게 하고, 또한 진실하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실이,
담긴 말이야 말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런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불평할 때,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심으로 베드로를 사도다운 사도로 만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려면, 분노를 솔직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에 대한 반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분노를 마음속에 가둬둡니다.
마음으로 삭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노를 꾹 억누르고 참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가지 물어봅시다. 화가 났을 때 그것을 마음속으로 꾹 참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만약 분노를 참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 다음에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화를 참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저명한 상담가들은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솔직하라!"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라!" "다른 이들에게 당신이 느끼는 마음의 감정을 확실히 알게 하라." 고 권면합니다.
저는 여기에 딱 세 가지를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나는 표현은 하되,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분명,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기 앞서,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를 생각해 보고, 문제가 없다면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럴 때, 또 다른 분노를 야기시키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 쉽게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에게도 분명한 단점과 실수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야 말로,
분노를 풀어줄 최고의 열쇠입니다. 마아크 트웨인은 "용서란? 보라색 오랑캐꽃이, 짓밟고 있는,
사람에게 발하는 향기와 같다." 고 말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용서만이 분노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분노를 일으킨 분이 계신다면 용서하십시다.
분노를 일으키는 그 분이 부모님인지, 형제인지, 친구인지, 시어머니인지, 자부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십시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되길 진정 바랍니다.
진정한 용서야말로 분노에서 벗어나 참 자유함을 느끼게 만드는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분노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가장 치명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분노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사소한 감정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먼저 혀를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심 없는 사랑과 거짓이 없는 진실 된 언어로, 솔직하게 말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힘써 지킴으로써,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일터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릴 용서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잠시 침묵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