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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명의 아이콘, 마호메트는 누구인가?
이슬람교 창시자, Muhammad.
대제국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강대국이 각각 서쪽과 북쪽을 압박하고, 풍요한 중개무역의 혜택을 누리는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가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아랍인들은 아직 진이라는 정령과 수백이 넘는 우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 시절의 ‘페르시아 왕자의 결혼식’
그들은 아직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일신교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민족으로서 통일된 정체성은 더더욱 갖지 못한 상태였다. 유목과 약탈을 통해 과격한 호전성과 빠른 기동력을 갖춘 그들은 탁월한 지도자도, 효율적인 정치 체제도 없이 그저 주변국가에게 ‘골치 아픈 침략자’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다.
흩어진 모래알 같던 아랍인은 한 지도자를 만나자 세상을 뒤흔드는 강력한 모래폭풍으로 탈바꿈한다. 그들은 하나의 신 알라를 신봉하며 강력한 신정일치의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일신과 무력을 결합한 새로운 집단은 곧바로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중동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 유럽, 인도아 대륙과 중앙아시아로 진출해나갔다.
모래폭풍을 가르며 알라신의 이름으로 집결한
이슬람세력은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 ‘신에게 복종하는 자’ 무슬림과 그들의 종교 이슬람교는 그 뒤 1400년 세계 역사를 바꿔버렸다. 21세기 들어 세계 인류 13억 명이 신도라고 일컫는 이슬람교의 근원에는 창시자 모하메트(아랍어로는 무함마드)가 자리잡고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 마호메트는 누구인가?
마호메트 (Mahomet ; 570?~632.6.8)
마호메트 (Mahomet, Muhammad)
본명 : Abual-Qasim Muhammad ibn Abd Allah ibn Abd al-Muttalib ibn Hashim.
고대 아라비아의 예언자(nabi) ·이슬람교(敎)의 창시자로서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Muhammad)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보통 라술라(Ras後ll嚆h), 즉 ‘알라의 사도’라고 부른다.
아호메트가 끼친 영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교는 세계의 약 5억 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믿는 산 신앙이기 때문에 그 종교적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둘째, 그가 시작한 운동은 20년이 채 못 되어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를 뒤흔들고 새로운 문명을 수립했으므로 역사적 영향력이 컸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체계이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이슬람 성서 코란 (Qur'an, Koran).
그밖에는 생애의 여러 면에 대한 마호메트의 행동기록(하디스)은 신자가 준수해야 할 규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 후세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과 사물에 대한 견해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도 중요하다.
중년(中年) 이전 그의 경력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코끼리의 해’에 출생하였다는 전승(傳承)이 있으며, 570년경 아비시니아군(軍)이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남(南)아라비아로 침입해 왔으므로 이 무렵에 출생하였다고 생각된다.
마호메트(Muhammad)의 탄생설화 그림
(이슬람 미술에서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다. )
마호메트의 하심 가문(家門)은 메카의 명문인 쿠라이시 부족(部族)의 일원이었지만, 아브두 샴스 가문(후의 우마야 가문)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부친 압둘라가 일찍 죽었으므로, 마호메트는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조부의 사망 후로는 숙부 아브 탈리브의 보호를 받았다.
청년시절 그는 대상(隊商)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였으며, 그 사이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 밑에서 일하는 도중, 마호메트의 성실함에 큰 감명을 받고 그녀가 구혼을 하였다. 595년 마호메트는 십여 세나 연상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으나 남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
이슬람, 마호메트가 25세 때, 연상의 여인 Khadija 와 혼인하는 모습.
At age 25, Muhammad marries Khadija who was a lot older than him.
610년경 마호메트가 40세 되었을 때, 그는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부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새로운 교(敎)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부인 하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마호메트가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는 장면.
(이슬람 미술에서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금기되어 있으므로 하얗게 나타남)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유일신(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메카 지배층의 이익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초기 이슬람의 초석이 되었던 성지 ‘메디나’의 현재 모습.
메디나 ( Medina), madinah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爻nah)라고 한다. 이슬람교 성지이며, 메카 북쪽 약 340km 지점, 와디함두강 상류의 오아시스 지역에 있다. 원래 야스리브(Yathrib)라 불리는 유대인(人) 촌락이었으나, 5세기 말에 아랍인이 정착하였고, 622년 마호메트가 메카로부터 이 곳으로 이주(헤지라)한 후 이슬람의 정치 ·교단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본래 ‘예언자의 도시’라는 말의 준말이다. 마호메트 사후에도 4대째 칼리프인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슬람 국가의 수도였다.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교단(敎團)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른(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이슬람 초기의 성전 ‘지하드’ 를 수행하는 군사들.
7th Century Muslim Soldiers in Islam: Empire of Faith.
메카측은 마호메트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마호메트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族) 등이 마호메트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마호메트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마호메트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630년 1월 마호메트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메카를 함락시켰다.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마호메트가 메카에 입성하는 장면의 성화.
마호메트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교단 형성이 완성되어,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고, 마호메트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마호메트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採錄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마호메트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이슬람의 메카 'Mecca'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마호메트상(像)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호전(好戰)적인 마호메트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마호메트가 호색(好色)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슬람 확산의 요인
종교적으로는 가장 후발 종교라 할 수 있고, 군사적으로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무기 체계도 우세하지 않던 이 집단이 단기간에 가장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 원인은 무엇일까?
코란의 교리를 설법하는 장면.
신정일치와 무력주의의 결합
마호메트의 성공 원인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신교와 민족적 정체성의 통일 등 이론화 작업에서 성공했다
2. 신정일치 체제+무력주의=전면전 시스템의 완성
3. 종교공동체주의를 성장엔진으로 삼아 성공했다
4. 교리에 현세주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5. 물적 토대를 중시했다
첫 번째로, 이론화 작업을 보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호메트의 지렛대가 종교이고, 종교는 본질적으로 메시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에선 곳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야훼(여호와)의 유대교를, 일부 아랍인들이 비잔틴제국의 영향으로 예수의 그리스도교를 확산하는 등 유일신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의 성화 (Byzantine Museum 소장).
구약성경과 탈무드 등으로 이미 수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종교적·역사적 이론작업을 완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는 유대교와, 세계제국 비잔틴의 문명을 뒤에 업는 등 앞서가는 그리스도교를 따라잡기 위해선 아라비아의 새 종교는 이론 면에서 발군의 비약이 필요했다.
마호메트는 이미 다른 종교의 교리와 움직임에 누구보다 정통해 있었다. 대상이었던 그는 여러 종교와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결혼 뒤 부인 하디자의 조카로 학식이 높은 바라카를 통해 그가 시리아의 그리스도복음서를 히브리어와 아라비어로 옮긴 것이라든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일신론인 ‘하니프’를 접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그 결과 마호메트는 혈통적으로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간주하는 아브라함(아랍어로는 이브라힘)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선조로 규정한다(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정실 부인 사라의 몸종 출신인 하갈이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Abraham.
마호메트가 아브라함의 신성한 법궤 Kaaba 곁에서 기도하는 모습.
교리적으로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하게 계시나 예언 그리고 유일신인 하나님(알라)을 채택한다. 자연스런 결과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등장하는 28명의 예언자 가운데 21명이 그리스도교의 예언자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성경의 마리아가 신의 계시로 예수를 수태한 것을 인정하고, 예수도 예언자로 인정한다(그러나 그 신성(神性)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요소에 더해 마호메트는 새 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적으로 확립한다. 헤지라 3년인 서기 624년 바로 기도의 방향(키블라)을 예루살렘이 아닌 메카로 바꾼 것이다. 이슬람교를 교리상의 뿌리가 유사한 유대교의 아류가 아닌 아랍의 종교로서 정립한 것이다.
이슬람교의 교당 ’무슬림 모스크’
두 번째, 신정일치와 무력주의를 결합한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 뛰어난 비교종교 연구가의 자질을 갖춘 것으로 추정되는 마호메트는 신정일치의 특장점도 잘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의 경우 역사상 신정일치의 시기를 넘어 왕정의 형태를 유지하다 멸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아가 신정일치 체제에 최초로 무력 해결 방식까지 도입한다. 아라비아반도 유목민의 약탈 전통에서 비롯된 이 방식은 애초 메디나로 망명한 마호메트 세력의 생존을 위해 채택한 뒤 종교적 독트린으로까지 발전해나갔다. 그 결과 호전적 유목민이 종교적 열정을 안고 싸우는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생계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는 시스템
세 번째, 종교공동체주의를 성장엔진으로 삼았다는 부분은 다른 일반적인 제국과 비교할 경우 훨씬 그 효과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종교공동체인 움마는 급속도로 다른 모든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종교의 우산 아래 기존의 역량을 재결집했다. 이제 아랍인들은 그 혈통을 떠나, 그 계급을 떠나 이슬람의 깃발 아래 단결해나간다.
종교공동체인 움마(ummah)는 아랍인들을 집결하는 힘이다.
움마는 정복전쟁의 경제적 이익을 분점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군대의 병력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제국의 팽창 과정을 보면 기존 세력과의 연대나 견제가 불가피해 성장 속도가 느린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네 번째, 이슬람의 현세주의적 요소는 다른 세계 종교와 상당히 구별된다. 사후의 심판에 대해 규정한 부분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이다. “죄가 없는 자는 천국에 가고, 거기서 생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 즉 나무 그늘이나 시원한 동산, 맑은 물, 훌륭한 음식, 빛나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등을 얻게 된다.”
어느 종교도 이처럼 사후의 보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현세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일부다처제 등의 요소는 확실히 다른 문명권으로부터
비판받는 요소이다. 그러나 내부 신자들에게는 더 실질적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보상 체계를 제시해 이슬람교가 일정 정도 ‘현세적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물적 토대의 요소를 보자.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의 5가지 의무인 ‘오행’ 가운데 법적 의무로 보시라는 뜻의 ‘자카’는 이슬람 세력의 강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자카의 목적이 바로 ‘메디나의 무슬림을 먹여 살리고 강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는 것’이다. 강력한 군대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불굴의 힘을 자랑하는 이슬람 군대.
나아가 서기 626년부터 도입된 ‘지지아’라고 불리는 새 인두세 역시 그런 목적으로 시작됐다. 10세기에 성립한 <리잘라>라는 규범집은 이슬람교의 물질주의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른바 ‘지하드’(성전)가 끝나고 전리품을 나누는 방식을 참가자의 종류, 성격, 계급 등에 따라 대단히 자세하게 분류돼 있다. 사원이든 군대든 이슬람에 복무할 경우 그 생계는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을 지향한 것이다. 어느 누가 용감히 싸우지 않겠는가?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호전적인가?
9·11 테러를 계기로 한국은 이라크 파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김선일씨 살해사건까지 경험하는 등 이슬람 세력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착륙적인 충돌 국면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명론적인 성격과 별도로 한국의 현재 경제-기술적 성격은 불가피하게 중동의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에 고착돼 있다. 인류의 문명론적 충돌이 한국의 경제-기술적 생존을 위협하는 극도로 불안정한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슬람은 과연 본질적으로 테러 등 호전성을 안고 있는 것일까? 한국은 과연 무력을 피한 채 에너지 생존전략을 평화적으로 펴나갈 수 있을까? 마호메트가 일으킨 모래폭풍은 1400년을 지나 이제 한반도에까지 밀어닥쳤다.
[출처] 마호메트 - 이슬람교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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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규선 학생, 도움이 되었나요? ㅋㅋㅋ. 반갑고 고맙네, 언제 인천가면 연락할께. See you there.
넵,감사합니다. 주변에 무슬림들이 많아서 어느정도 알고있어야 함께 생활 할 수있기에~~ 꾸벅
아니 근데 사진이 다 지워졌네. 어떡하지? 좀 더 두고보다 안되면 다시 올리겠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