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의 정치제와 사회
1.부의 성립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 “본래 5족이 있었다.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는데, 점착 미약해져 계루부가 대신하였다.”
a.초기 고유명이 부 (고구려 초기인 3세기갖비)
‘부의 용례’
(1)‘부’의 기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부분: ‘나’와 ‘나부가’가 혼용-> 당대에는 ‘부’보다 ‘나’라고 했는데, 뒷시기에 부분적으로 한자식 용어인 ‘부’를 소급해서 붙였던 것이다. ‘나’는 천(川), 양, 내(內), 노(奴)등으로 표기되어 때로는 훈독하고 음독하였다. ‘나’는 지(地) 또는 내(內)나 어떤 천변(川辺)의 평야를 뜻하니, ‘나;란 명칭의 집단은 어던 계곡의 집단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은 높은 산이 이어지는 지대로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에서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넓은 들이 없으며, 사람들이 산의 골짜기를 EK라 거주하며 계곡 물을 식수로 한다” -> 많은 하천은 산사이로 흘러 긴 계곡을 형성했다. 하천유역은 높은 산으로 가로 막혀 있어 다른 계곡의 주민집단과 교섭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하천 상.하류의 촌락들이 하나의 집단 단위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모나‘, ’모모나‘이다. -> 고구려 5부의 기원은 이런 ’나‘였다.
◎BC1세기-AD1세기의 ‘나’의 성격?
비교적 큰 것은 국가 형성과정에 있는 소국 같은 것으로 할 수 잇다. 독립적인 소국인 이들은 나아가 상호통합과정을 거쳐 고구려 국가의 주요 구성 단위로 전환된 것이 5부다.
(2)북방 종족의 ‘부’
<삼국지>에서 부의 용례
a.'오환전‘의 세주 : 이 경우의 부는 오환족이 그들의 방목지를 단위로 형성한 몇 개의 ’호‘로 이루어진 ’락‘들의 연합체로서 자생적 집단이며, ’대인 이하 각자가 스스로 목축을 하며 살아가 다른이에게 요역을 강제하지 않는다‘-> 느슨한 조직체, 대인은 중재역할 담당
당신 중국인이 그 전체가 하나의 정치 단위라하여 ‘부’라 명명
b.한의 기이 정책에 따라 선비나 오환의 기존의 부가 세분되어 복속케 되고, 그 세분된 집단을 ‘부’라 하였다.
c.정치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파생적 집단.
d.고구려의 5부-왕군아래 귀속된 단위정치집단
(3)삼국사기의 ‘부’의 용례
고구려 영내에 포괄된 여러집단중 5부에만 ‘부’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5부의 원형은 ‘나’->상호통합과정: 5부- <삼국사기> 고구려 초기 5부가 지닌 그 자체의 일정한 성격으로 인해 고구려인들이 ‘부’를 다섯집단에 한정 당시 5부는 고구려의 국가 구조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울한 위치에 있었고, 5부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이끌어 나갔던 중심집단이었다는 정치적 측면이 종속적 요소와 함께 작용했다.
◎부(部)와 왕군과의 관계
5부는 왕권 아래 귀속되어 있었다.
1.씨족이나 부족설
*씨족설-혈연관계로 구성
*부족설-‘부족’의 개념: 원시공동체부터 국가 형성에 이르는 과정상의 한 단계에 등장하는 집단‘
씨족-부족-부족연맹-국가
-> 문제점: ‘부’의 기원인 ‘나’와 그것이 ‘부’로 정립된 뒤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논하였다.
2‘부’는 전사단이나 행정구역 단위다.
(1)전사단: ‘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계루부.소노부 등 5부 명칭이 퉁구스어의 방위를 나타내는 말->의문
(2)행정구역: ‘부’가 고구려 국가의 한 부분이며 왕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측면을 중시하여 ‘나’가 고구려 왕권아래 복속됨에 따라 그 성격이 바뀐면을 부각시킨다. ‘부’를 지방통치조직에 의해 편제된 국사적 단위로 파악하여, 고구려가 이른 시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전환하였다고 보았다.
◎5부의 성립시기
5부의 전신은 ‘나’였다. ‘나’의 상호통합. ‘나;는 독자적인 소국이나 부족이지만 5부는 왕권 아래 종속된 자치제였다.-> 이는 곧 5부의 성립시기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모든 집단들에 대한 고구려 왕의 지배력이 확립된 때였음을 의미한다 ->왕권이 제나의 자치력 일정부분 통제
제나에 작용하던 외세배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왕실이 소속된 계루부를 제외한 4부에 해당하는 연나부, 관나보, 비류부, 환나부가 보인다. 연나부는 대무신왕 4년에, 비류부는 동왕 15년에, 관나부는 태조왕 20년에 , 환나부는 동왕 22년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태조왕 22년 이후에는 방위명의 부외에는 위 4부의 명칭만 보인다. 여타 ‘나’는 이후 나타나지 않는다.-> 태조왕 22년까지는 5부체제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한군현에 대한 대규모의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부체제의 구조
‘부’는 왕권의 통제를 받으며 일정한 자치력을 유지하는 단위 정치체로서의 성격이다. ‘부’의 내부에도 하위의 단위체가 존재하였다. 앞에서 고구려의 발흥기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 다수의 ‘나’들이 상호통합했다는 것을 볼 때, 부내부형성의 주된 계기는 제나의 상호통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부;는 그 내부에 하위 자치집단인 부내부들이 있었고, 집단예민을 예하에 두었다. 중앙의 왕군에 의해 일정한 통제를 받으면서 자치를 영위하고 있던 단위 정치제라고 할 수 있다. 5부를 대표하는 고구려 왕에게 다수의 피복속민들이 각각 집단적으로 예속돼 있었다. ☆부내부⊂부⊂고구려(B)⊂고구려(A)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 각급의 자치제들을 그 정치적인 통합형태와 지배-피지배관계에 따라 상하누층적으로 편제한 형태, 각급 자치제가 고구려 국가구조내에서 점하는 정치적 위치와 현실적 처지는 각각 상이하였지만, 하위집단의 자치력과 상급통합체의 통제력을 절충하여 균형을 도모하는 선에서 다시 정치구조가 구체화되었고, 상당기간 지속되었으며 상대적인 안정성을 지녔다. 이런 구조의 핵을 이루는 것이 ‘부’였다. ‘부’가 각각 그 하위 집단이나 그 상위의 왕실과 맺었던 관계와 그리고 ‘부’의 자치제적인 성격이 여타 집단들의 그것과 통하는 면을 지녔고 5부가 고구려(A)의 지배족단을 형성했다->고구려 국가전체 성격 규정하는 면
*5부 성립 후 자치제의 분권력과 왕싱 집권력 간의, 대가들의 세력과 왕권간의 관계는 고구려 초기 정치사 흐름을 결정짖는 주요 요소였다. 몇가지 진통을 겪으면서 점차 왕권과 중앙 집권력 강화의 방향으로 바뀌었다.
*대가
(1)대가들의 권한은 재판권이다. ‘뇌옥이 없으며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평의하여 곧 죽이고 그처자를 노비에 삼는다’(삼국지 고구려전)고 하였다
(2)공부의 징수-대가의 권력 유지에 기본이 되었다
부체제 하에서 대가들의 수취기반은 기본적으로 읍락을 단위로 했고, 거수(호민)을 매개로 하여 생산물, 역역을 수탈했다. 국가는 5부의 대가층의 지배기반을 유지하는 긍정적 작용을 했다. 부체제하의 고구려 국가는 5부대가들의 연합체였다. 왕은 5부전체의 수장인 동시에 계루부의 장이었고, 계루부 왕족 대가들의 대표였다. 그러므로 왕은 대가들 중 가장 강력한 ‘가’라 할 수 있다.
*제가회의
국정의 주요부분이 제가들의 회의체에서 처결되었다. <삼국지>고구려전을 보면 범죄자를 제가가 평의해 처결하였다 한다. 또한 국정 주요사항을 논의해결정했다.(6C 초 신라 봉평비, 냉수비) 왕가 5부의 주요 대가들이 국가적 대사를 결정할 때 참석했다. 제가회의는 주요문제에 대한 제가들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여 국정에 반영함으로써, 제가층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한편 회의제를 통해 주요 상황을 결정함으로써 미약한 관료 조직과 집권력이 지닌 취약성 보완하고 5부전체에 걸친 통합력과 동원력을 확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가회의가 왕권을 견제할수 있었지만 왕도 제가회의에 크게 의존했다. 5부의 통합력 유지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1)천손국 의식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무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묘지(墓誌)-
여기서 천하와 사방은 같은 의미로서 고구려를 포함한 온세상이란 뜻
‘영락대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이 민을 어여삐 여김과 같이 넓고, 그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쳐서’
-광개토왕릉비(‘능비’로 줄임)
사방과 사해는 어느 한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포함한 넓은 공간을 듯하는 의미로 쓰여졌을 때 그 말 자체에는 중심국을 설정하는 의미 함축
위의 묘지에서 시조인 추모성왕인 ‘하백지손 일월지자(河伯之孫 日月之子)’인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럽다는 의식
그런 의식은 능비에서도 보인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 시조는 북부여에서 나셨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태어나셨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어’ -능비-
그리고 능비의 1면 5행에서도 추모왕을 “황천(皇天)의 아들이요, 모는 하백의 딸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제는 만유를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인 천신, 황천도 같은 의미 ->곧 추모왕은 천자가 됨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주몽이 하백녀가 일광을 받아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시조 설화를 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의 동명왕 주몽설화와 같다. 곧 주몽이 태양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됨.
고구려 초기의 왕의 초월적인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함에 따라 일광(日光)은 황천.천제 및 일월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의할 때 고구려왕은 일신 또는 천제의 아들인 주몽의 자손으로서 천손이 되며, 지모신(地母神)인 하백녀의 아들로서 주몽이 지니는 농업신적인 성격 또한 고구려왕에 체현되어 이어진다고 여겨졌다. -->고구려왕은 천손, 천상과 지상을 매개할 수 있는 최고 사제로서의 성격을 지님
후에 역대 고구려 왕들에게 천손이란 말을 썼을 가능성도 있으며 나아가 왕뿐 아니라 왕족도 신성한 천손족으로 관념화되었다.
(2)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
고구려와 그 인접국들의 관계를 능비에서는 조공관계로 표현하였다.
1.백제 : 양국은 4C 중엽 이래 대방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상쟁을 벌였다. 그 후에도 계속 대립적인 형세를 유지하여 실제적인 조공 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다.
2.동부여 : 영락 20년(407)의 원정으로 동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407년 이후 설사 고구려와 동부여 간에 조공 관계가 맺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기간에 끝났고 곧이어 동부여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3.북부여 : 4C 후반 이후 고구려의 영역으로 된다. 하지만 북부여지역 전체가 고구려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 아래 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5세기 말에 완전히 북부여국의 명맥이 끊긴다. 그래서 4C후반에서 5C말에 이르는 기간에 고구려와 북부여 간에는 일종의 조공 관계가 맺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조공 관계는 상당한 정도의 규졔력을 동반한 상하 관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4.신라 :5C 전반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세력이깊숙이 개입하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 군이 신라의 영내에 일부 주둔하고 있는 등 고구려의 세력이 여전히 강하였다. 그래서 조공 관계를 상당 기간 지속하여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와 그 인접국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북부여와 신라의 경우가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서 조공 관계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공 관계에 따른 일면
1.의례적인 면 : 조공국인 신라와 북부여는 고구려에 각각 가(珂)와 금(金)과 같은 특산물을 보냄. 고구려는 조공물에 상응한 물자를 답례로 주었던 것 같다.
2.군사적이 면 : 그리고 군사적으로 조공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원병을 보내 지원하였다. 이는 조공국의 왕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여 그 안전을 최소한 보장하는 대신, 고구려는 조공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권을 유지하고자 도모하였던 것이다.
◎화이(華夷)
고구려는 조공 관계를 맺은 고구려와 그 인접국을 대비하여 이를 화(華)와 이(夷)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중원비에서는 신라를 동이(東夷) 아마도 백제는 남이(南夷)라 하였을 것이다. 이는 중국의 화이 관념까지 차용하여 자기 나라가 천하사방의 중심임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원래의 뜻으로 볼 때 하와 이의 대비는 단지 정치적인 상하 관계에 따른 구분 의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화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여타의 집단과 구별되는 우월한 가치를 지닌 집단적인 실체라는 의미를 담은 개념이다.
(3)동아시와 고구려인의 천하
◎왜 고구려에서는 제(帝)라 칭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선 먼저 중국왕조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조공.책봉 관계에 따라 조공국인 고구려가 예에 어긋나게 칭제함에 대한 중국 왕조로부터의 질책과, 그것을 의식한 피책봉국인으로서의 고구려인이 지녔던 천하관에 의해, 죽 황제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그 아래의 제후로서 왕국이 존재해 상하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관념에 라 왕이라고만 칭하였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실제 능비 등이 쓰여졌던 5C에 고구려는 장수왕 원년(413)동진(東晋)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남조와, 그리고 이어 5C 중반 이후에는 북위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와 중국의 남.북조와의 조공.책봉 관계는 극히 명목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실제 5세기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통교하였다.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위에 대해 고구려는 일면 조공.책봉 형식을 취한 평화적 교섭 관계를 유지하고, 남조 및 유연과 연결하여 이를 견제. 그리고 당시 북위와 치열한 상쟁을 벌이고 있던 몽고고원의 유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북위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남조와 유연의 연계를 고구려가 중재해주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이와 같은 대외정책에 북조와 남조는 어떠한 규제력도 가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에 일차적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과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결합된 데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5-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다원적인 세력균형 상태를 유지하였다. 강대한 북위를 사이에 둔 남조와 유연 및 북위 간의 역관계의 연동성에 어느 한 나라가 국제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은 억제되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고구려는 독자적 세력권을 2백여 년 이상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실상을 고려할 때 군주의 칭호에까지 중국의 왕조가 어떠한 간섭과 규제력을 미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여지는 없다. 당시 고구려인의 관념적 밑바탕에는 어디까지나 주몽설화가 있었다. 즉 일신과 하신의 결합하여 낳은 신인인 시조의 후손으로 정교 양면에 걸쳐 최고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군주를 이미 오래 전부터 왕이라 불러 왔는데 이를 새삼 황제라는 이질적인 칭호로 바꾸어 부를 필요가 없었다.
◎고구려를 포함한 예맥.한계(韓系)의 집단들에서 족장 및 수장의 칭호는 원래 가(加).간(干).한(旱)등으로 널리 불렸다. 고구려 후기에 그 주민들 사이에 신봉되었던 신들 중에는 그 성격은 알 수 없지만 가한신(可汗神)도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5세기 이래 거란족 등 유목민 집단의 일부를 자신의 세력 아래 두고 있었다. 또한 3세기 중엽 남중국의 오제(吳帝) 손권(孫權)이 동천왕을 선우로 봉한 일도 있고 하여 고구려인은 선우라는 칭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만큼 가한이나 선우를 군주의 칭호로 사용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최고 군장의 칭호가 일단 가에서 왕으로 변한 후 가는 어디까지나 왕보다 아래의 존재인 왕자나 귀족의 칭호나 관등명으로 사용되었다.
◎군주의 칭호에 관련된 고구려인의 천하관
고구려의 시조가 ‘일월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천하는 문자 그대로 온 세계가 된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세력권 저편에는 그 군주의 칭호를 황제나 가한이라 칭하는 지역이 존재했다. 고구려는 실제적 기반과 전통에 대한 자의식에 의해 황제나 가한을 칭하지 않고 왕호를 계속 칭하였다. 이는 자기 나라가 중심인 ‘천하’와는 별개의 세계로서 황제나 가한을 각각 상징으로 하는 중국이나 다른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꾸어 발하면 고구려인의 천하관의 특징으로 다중성을 나타낸 것이다
(4)천하관과 동류의식
능비에서 왜에 대한 토벌을 자세히 서술한 것은 고구려인의 천하관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왜는 고구려 바깥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런 왜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고구려의 천하에 침입해 온 것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질적인 집단인 왜에 대한 토벌은 동류의식을 느끼게 된 백제나 신라 지역에 행해졌던 원정을 보다 미화하고 광개토왕의 위훈을 기리는 데 있어 좋은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5세기 고구려인의 천하관에 내포된 신라.백제 및 동부여와의 관계에 대한 의식은 아직 동족의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음 시기에 등장할 삼국인간의 동족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소박한 원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광개토대왕릉비
1.비문의 전체 구성
(A) 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B) 와의 정복 활동.
(B1) 영락(永樂) 5년의 을미 (395)의 대(對) 碑麗(契丹) 大輿安嶺 방면 작전.
(B2)<倭以辛卯年來......>의 부분.
(B3)영락 6년 병신(396)의 대 百殘(百濟) 漢江 하류 방면 작전.
(B4)영락 8년 무술(398)의 대 息愼 의 동안주 방면 작전.
(B5)영락 10년 경자(400)의 대 倭 의 洛東江 방면 작전. 이 작전 서술의 도론(導論)
으로 영락 9년의 <倭人滿其(新羅)國....>이 나온다.
(B6)영락 14년 갑진(404)의 대 倭 의 黃海道 방면 작전.
(B7)영락 17년 정미(407)의 작전. 비문의 완결(刓缺)로 자세하지는 않으나 대 倭燕
遼河 방면 작전으로 추정된다.
(B8)영락 20년 경술(401)의 대 東夫餘 松花江 방면 작전.
(C)능의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
2.영락 5년(신묘년395)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고구려의) 속민이었기 때문에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新卯年來渡海破百殘( )( )( )羅以爲臣民
3.영락 10년(경자년,400)기사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을 지나 신라성에 다다랐을 때 왜병이 그 안에 가득하였으나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이하 원문 8자 훼손)... 되돌아 추격하여 임나가라까지 이르러 게속하여 성을 함락하니 성이 곧 함락하였다. 안라인주둔군이 .....신라성.....△성 .....왜가 가득하였다. 왜는 성을 무너뜨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求新羅.......至新羅城倭滿其中官兵方至
倭賊退...追至任那加羅...安羅人戌兵拔新羅城( )城倭滿倭潰城六( )( )...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기사를 근거로 하여 첫째,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고, 둘째, 임나에 일본 주둔군이 상주하는 일본부가 있었다는 정설을 정립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정한론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4. 而倭以新卯年來渡海破百殘( )( )( )羅以爲臣民
(1)일본관학자들의 해석
이왜이신묘년, 래도해, 파백제△△신라이위거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으로 삼았다.
(2)정인보 등 한국 학자 해석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제△△신라이위거민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서 쳐부쉈다. 백잔(제)이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5.의의
(1)광개토대왕비에는 <삼국사기>등 문헌에는 전혀 없는 연호 사용이나 태왕.성왕이라는 왕중왕의 천하관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고, 거란.숙신.부여 등 북방 민족들을 누르고 통일해 가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다.
(2)태왕비에 나오는 수많은 지명과 성 이름은 고구려뿐 아니라 주변 국가의 위치 비정이나상호 관계사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으며, 수묘제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계층이나 성격을 연구할수 있다.
(3)태왕의 대외적인 치적에 대한 평가에 비해 내치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한 경향이 있다.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넓힌 점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태왕은 내정을 정비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장사.사마.참군 같은 중앙관직을 신설했고, 역대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묘지기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또 평양에 9사를 세워 불교를 장려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정복 군주로 부각되면서 이러한 훌륭한 국내정치의 성과가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태왕비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광개토대왕이 얼마나 훌륭한 내치를 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