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1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말씀: 시편 126: 1-6
본문 역사 배경이 어떠합니까? B.C 587년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최강대국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고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후 유대인들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 외국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 에스겔 1:1,3절에 사로 잡힌 자들이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B.C. 539년에 바사의 고레스 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레스 왕은 B.C. 538년에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귀환조서를 내렸습니다. 역대하 36:23은 그 감격적인 모습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조서가 발표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에서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B.C. 537년에 스룹바벨의 인도함을 따라서 49,897명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1차 귀환이었습니다. 그리고 79년 후인 B.C. 458년에 에스라의 인도로 2차로 돌아왔고, 또 14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로 3차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1차에서 3차까지는 93년간 간격이 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망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로서 고향 예루살렘에로 귀환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뜻밖의 해방이었죠? 시편 기자는 그때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시 126:1-2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생활하던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다니, 얼마나 놀라왔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라고 감격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마치 꿈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일제 36년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고 해방 받았을 때 우리 민족이 느꼇을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에서 마주친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그들의 생활 터전도 철저히 파괴 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너져 내린 성벽과 불타버린 도시, 그리고 파괴된 성전뿐 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 다시 시작하자, 다시 믿음과 삶의 공동체를 재건하고 삶의 터전을 이루자” 현재 당면한 이 고통과 시련을 참고 이겨 나가자 결단했습니다.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126편입니다.
4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 보내소서” 여기 남방시내는 유대 남부 네게브 사막를 말합니다. 그곳은 유대지역에서 가장 건조한 곳입니다. 평소 초목이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단지 우기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물이 갑자기 흘러 들어 메말랐던 시내가 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강 주변에 식물들이 짧은 우기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렇게 건조한 광야 가운데 우기때 생명의 젖줄이 되는 생수의 강이 생겨 나는 데 그것이 바로 남방시내 입니다. 지금 사막에 시내가 생겨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오늘 본문은 그들의 황폐한 삶에 새 꿈과 소망을 주시고 그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리고 기도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 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마른 마음에 은혜의 강이 흐르고, 황폐한 인간 관계에 사랑의 강이 흐르고, 척박한 삶의 현실에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풍성한 산업의 복이 흐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소망하였던 유대인들, 그들은 기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5-6절에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여기서 대비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물과 기쁨, 그리고 씨를 뿌리는 것과 거두는 것이 대비 되어 나옵니다. 진리는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우리나라 속담에 “공짜는 없다” 는 말이 있죠? 눈물없는 기쁨은 없고, 씨뿌리지 않는 거둠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비록 현재의 고통과 시련 가운데 눈물의 현실이 있지만, 그러나 함께 씨를 뿌리자 노래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울면서 씨를 뿌리지만, 그러나 네게브 사막 남방 시내처럼,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셔서 곧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둘 때가 올 것 이란 믿음을 그들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망,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 그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6편은 오늘 우리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는 삶 자체가 어찌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6.25때 태어나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우리나라 산업화 세대는 ‘희생하는 세대’ ‘울며 씨를 뿌리는 세대’ 였습니다. 정말 울며 씨를 뿌린 분들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그들이 울며 뿌린 씨앗으로 오늘 이만큼 이라도 살 기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우리 삶이 많이 안정되어 더 이상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슨 씨를 뿌려야 할까요?
먼저,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진정 울며 믿음의 씨를 뿌렸던 선교사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86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후 평생 울며 믿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아펜젤러는 선교활동 중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여 순교를 했고 언더우드는 양화진에 뭍혀 있습니다. 이분들은 믿음으로 태평양을 건너와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놀라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 그 이면에는 바로 이렇게 울며 씨를 뿌리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내 개인 믿음 간직하고 키워가면서 하나님과 가까워 지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이 자라면서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씨를 뿌리며 주위의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해 내는 것을 전도 라고 합니다. 한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피부로 잘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 전도 는 쉽지 않죠? 그러나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전도는 낙심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한 영혼을 다시 주님에게 이끄는 것입니다. 이 모두 믿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젼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남방시내 같은 사랑이 흐르는 이 땅에서의 삶과 저 하늘의 소망, 바로 하나님 나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 비유로 우리에게 설교하셨습니다. 아주 조그만 겨자씨 같은 사랑의 씨, 우리가 그 씨를 이웃과 세상에 뿌릴 때 하나님께서 그 씨를 키워 주십니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가 다 사랑의 씨의 열매들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눈물로 사랑의 씨를 우리 삶속에 뿌려준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사랑의 씨, 은혜의 씨를 뿌리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 격려와 위로와 칭찬의 다정한 말 한마디, 허물을 덮어주는 관용과 너그러움, 넉넉한 열린 가슴과 넓은 마음,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민감함,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우리 삶과 우리 인간관계와 우리 공동체에 아름다운 사랑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이삭 선교사님과 함께 충대 캠퍼스를 심방하였습니다. 농대 가는 숲속을 지나 도서관 앞 연못으로 걸어 오는데 여학생 두명이 헤엄 치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과에 다니느냐? 물으니 미술 전공 이라 하였습니다. 예술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저 물고기들이 어떻게 생겨나 저기서 헤엄치고 있을 것 같냐? 물으니 잘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저 물고기를 지으신 분이 계신데,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말해 주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느냐? 물으니 가본적이 없다 누가 나에게 전도한 사람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성경 말씀도 읽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헤어졌습니다. 오늘날 비대면 시대지만 여전히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울며 씨를 뿌리는 전도인의 삶을 회복해야 하겠다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비유가 나오죠? 우리가 울며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씨앗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 질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 나아가 선한 희생의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씨앗의 역사, 바로 한 영혼에게 다가가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