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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레니엄 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아우성
우리문학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문학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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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 이대로는 안 된다
문학이 정치 이념에 예속되는 것은 문학의 독자성과 고귀한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구속과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7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은 스스로도 균형을 상실하고 정치 이념의 선전화 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버렸다. 좌파 성향의 『창작과 비평』이 한국 문학을 오염시키고 한국 문학의 절름발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는 좌파 성향의 정치이념을 가진 집단의 하수인을 스스로 자초하여 우리 문학의 독자성과 자유, 그리고 휴머니즘을 상실한 것이다, 그 꼭짓점에는 좌파성향의 문학인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도 창간호에 “한국문학의 전통은 없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이때부터 정치구호와 문학은 그 구분이 애매모호하였고 좌파 운동권이나 노동운동권이 한번이라도 감옥에 갔다 오거나 현행법의 제재를 받으면 하루아침에 급작스레 민주투사가 되어 가들먹 거리는 것이 그 당시의 현상이다.
김지하의 오적시가 그 대표적이다.
그는 이 오적시 하나로 일약 민주 투사가 되었고 또한 시인이기 보다 투사로 불리기를 더 갈망하는
김남주. 그리고 노동 시인 박노해. 백무산. 등도 투사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남주를 위한 시와 사회사의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이라는 핏빛 책자에 사실상 해설과 평론이 필요 없는 그의 완벽한 시에 평론가 시인들이 하나같이 부역하듯이 찬사의 글줄을 써댄 것을 보면 쓰지 않으면 적으로 몰릴지 몰라서 인지 몰라도 한결 같이 적색 일색이다.
이때부터 세상은 모두 이분법 사고방식으로 편향화 되었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적대 성향을 드러내고 상대 죽이기를 연출한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좌파 이념 정치를 선전. 선동하기 위해 문학을 그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기회주의적인 문학인들이 이에 편승하여 한국문학을 투쟁적으로 몰아갔으며 적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우리 문학을 스스로도 이념과 정치에 예속시켜 노예화를 자청하여 순수문학은 사라지고만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굳이 단체의 가질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너도 나도 단체라는 미명하에 자기 세력을 확보하여 이분법적 사고로 적대적 상황을 연출하고 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 단체의 우두머리 자리를 확보하여 정치권에 진입이라는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성을 견고하게 쌓고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의 생각을 사전에 차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정치판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다. 2006. 10. 30. 금강산에서 남북문학인단체의 결성으로 남북문인 100여명이 6. 15 민족문학인협회를 출범시켰다. 과연 이들 좌파성향의 지식인들이 과연 남한을 대표하는 순수 문학인들인가? 누가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였든가? 정권이 그 하수인에게 부여한 것도 대표성인가?
문학은 무엇보다 독자성과 자유를 우선시 한다. 그러함에도 스스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정치권에 노예화 되어 굴욕을 자청하고 스스로 자유를 상실한 것은 바로 문학인이기를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학은 무엇보다도 문학성 여부가 그 평가 잣대가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함에도 스스로
이념의 도구로 전락한 것은 진정 문학인이 지향할 바가 아닌 것이다. 문학은 근본 목적은 인간 정서의 순화와 휴머니즘에 있다. 북한 문학은 사상과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그 수괴를 위해 찬양하는 꼭두각시로 전향하였으며 남한 문학은 좌파 성향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정치인들을 선전하는 도구와 상업주의적인 도구로 전락하여 그 본연의 순수성은 찾아 볼 길이 없다 휴머니즘은 상실한 인간성의 회복이며 문학과 예술이 지향하는 영원한 지향점이다.
그리고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그 태동부터 민주화. 통일. 민족. 체제. 반미친북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1300여명의 땡 벌 같은 문인들이 8500여명의 선량한 문인들의 목을 오늘도 쉬지 않고 죄고 있다.
이 단체는 근간에 와서 그토록 철저하게 믿어 왔던 좌파성에 대한 위기감과 스스로 편협성을 극복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작가회의라는 명칭으로 변경을 시도를 꾀하고 있다.
이 역시 주체 의식을 상실한 기회주의 적인 문학인들의 또 다른 옷 갈아입기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인은 고고하고 청렴한 선비정신이 그 표상인데도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 같은 문학인들이 우리 한국문학을 시궁창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문학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지 집단이나 단체를 결성하여 힘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게 정치권에 빌붙어 군자금이나 받아 쓰고 더러운 힘도 힘이라고 힘으로 말들을 하고 있다. 우리 문학 이대로는 안 된다. 문학이 문학답지 못하고 문학인이 문학인답지 못하는 이 시대에 문학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끝 보이지 않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은 그들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 모두의 책임이다.
문학은 때로는 칼날과 같이 날카롭지만 때로는 우주를 모두 품을 수 있도록 관대하여야 한다. 우리 문학인들 모두 자숙하여 새로운 한국문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립이 아닌 화합과 관용으로 재조명하여야 한다.(끝)
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로 변경) 연대단체
4.3제주도민연대
미군정 탄압에 자주적 무장항쟁으로 대항했던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학살사건의 역사적 재조명을 위한 홈페이지.
5.18기념재단
5.18민중항쟁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된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5.18에 관한 각종 자료와 행사 내용으로 가득!
경실련
공정한 시장경제질서와 경제정의의 안정적 유지를 목적으로 1989년 7월 시민·청년·서민층 등이 결성한 시민운동단체이다. 사회적·정치적 부정부패, 건전한 시민의식의 고양, 빈부격차 등을 해소하고, 건전한 생산활동의 활성화를 중요 목적으로 한다.
국가보안법반대국민연대
국민연대 소개 및 소식과 자료실을 제공하며, 국보법 반대의 근거와 서명 받고 있음. 소식지<활보> 발행. 기타 활동단체 동정과 소식을 제공.
국제민주연대
베트남진실위원회
나눔의집
생존 일본군 위안부들을 위한 시설, 역사관 등 소개
나와 우리
권력을 가진 다수의 목소리가 소수를 억압하고 억누르는 획일주의에 반대하며, 개인의 다양성과 소수의 의견이 함께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동티모르연대모임
동티모르를 돕기 위한 국제연대를 주장한다
민예총
1988년 창립하여 민족예술운동의 새 장을 연 민예총. 해방이후 민주화와 함께해 온 문화예술운동의 성과를 대중화하고,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예술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해방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소로 매월 이달의 친일인물을 선정하여 친일파들의 친일행적을 알리고 있으며, 한일간의 역사문제와 독도문제등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1988년 그 동안 민권 및 인권, 시국사건의 변론을 주로 해온 중진변호사 30명과 소장변호사 16명이 참여해 결성한 변호사 단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매체 비평 및 대안매체 제작, 수용자 운동, 방송 및 신문 모니터, 비디오저널리스트, 영화, 노래패 안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주단체들의 총집합! 연합 및 회원단체 소개와 활동내용, 민주단체 114, 현재 진행중인 행사/캠페인을 볼 수 있다. 민족민주정론지 [민] 발행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NGO 자료관
성공회대에서 운영하는 사이버 민주주의 자료관.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전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외국인 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물리적, 정신적 쉼터인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웹사이트. 최근 새단장하여 더욱 풍부해진 그들의 목소리에 집중!
아시아의 친구들
아시아의 친구들은 박노자(노르웨이 오솔로 국립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아시아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벗이 되고자 모인 사람들에 의해 2002년 6월 25일 세상에 태어났다. <아시아의 친구들>은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특히 고양 ·일산 거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사회복지를 위해 활동.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최근소식 및 활동, 지원단체 소개, 관련 사이트 링크 제공. 빵빵한 자료실에는 센타글모음,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세계이주노동현황, 국제이주노동이슈, 국제결혼 가정, 난민과 분쟁, 이주노동자선교자료, 이주노동실무자료, 이주노동자교육자료, 한국인 해외취업 문제, 해외 진출기업 문제, 공동체와 영성, 사진자료 등, 그야말로 도서관
여성문화예술기획
서울여성영화제, 여성미술제, 여성연극, 문화예술교육 등의 행사관련 정보와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수 있으며 여성문화예술기획 잡지의 수록 내용도 접할 수 있다.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외노협 소개 및 투쟁속보, 자료모음, 소식지, 연대를 위한 활동 등 전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북한동포돕기 캠페인, 북한식량난 관련 소식과 자료, 조선족 동포돕기, 교류사업, 관련 사이트 수록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운동 전문화, 대중화를 위한 모임.
전교조
전교조 공식 페이지로서 교육상담, 교육자료, 현장교사들의 소리, 분회활동, 단체교섭 등 소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동자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노동조합 연맹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노동조합 연맹체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함께 우리 나라 노동운동단체의 양대 축을 이룬다.
전태일 열사의 집
전태일 일기장, 평전, 영상자료, 전태일기념사업회 소개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왜곡, 편파보도를 일삼는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모임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지리산권의 두 단체,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과 <지리산을사랑하는열린연대>의 발전적 통합을 통해 결성된 단체.
진보네트워크센터
비상업적, 독립적, 민주적 네트워크로서 상업적인 정보를 배제하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익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자의적인 검열이나 통제가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 공간으로서 이용자가 직접 운영에 참여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운영체계를 토대로 사회운동의 네트워크 기능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투철한 단체이다.
참여연대
시민참여를 통한 정경유착, 부정부패, 비도덕적 기업, 사법, 행정 감시활동, 개혁운동 추진 사회단체.
통일맞이
칠천만겨레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어 통일을 이룩하고 통일이후에 대두될 문 화, 사상의 갈등을 융화시키며, 아울러 사회적, 경제적 이해의 상충으로 돌출할 분쟁 요인 을 해소하며 통일을 민족공동체의 대화합으로 맞이함을 목적으로 설립
풀꽃세상
풀꽃세상(자연)을 위한 생각과 의견 자료를 나누는 풀밭. 부정기간행물 [풀씨]
한국여성민우회
가족, 성, 여성노동, 취업 상담, 과련 자료, 여성 이야기 게시판 운영
환경운동연합
환경을 인간과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생명체로 보면서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방이후예술원파동
▲ 서정주(1915~2000)
한국문인협회(이하 문협)의 밑그림은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문협 정통파’로 이야기되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의 관계는 식민지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 초반 김동리와 서정주는 문청 시절을 함께 겪으며 평생지기가 되었고, 문청이던 조연현이 1940년 즈음 다솔사에 살고 있던 김동리를 찾아가면서 그들의 인연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벌써부터 조직적인 관점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해방 직후에도 이들이 뚜렷한 성향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서정주는 발 빠르게 조직된 좌익문인단체를 기웃거렸으며, 조연현은 마르크시즘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평론을 발표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연현은 자신이 해방 이후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시를 포기하고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 대목을 그냥 넘어가기엔 식민지시대 발표했던 친일평론들, 해방 이후 2년여 동안 썼던 ‘붉은 색’ 묻어나는 평론들의 존재가 너무도 뚜렷하다(자전적 기록의 다른 부분에서도 조연현의 위증(僞證)은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이들이 우익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된 것은 김동리가 상경했을 무렵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김동리가 우익의 논리를 생산하였다는 말이 된다. 김동리의 뒤에는 범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이 만나는 과정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매체의 장악에 얼마나 민감했는가,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는 주도권이 김동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우선 명확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주목할 매체는 『문예』이다. 잡지가 표방하는 방향이나 조직 운영 방식, 추천 심사 위원의 면면으로 본다면 『문예』는 『현대문학』의 전신이라 이를 만하다. 김동리를 위시하여 당대의 작가들 또한 기꺼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문예』는 과연 어떤 잡지였던가.
『문예』는 1949년 8월 창간된 월간지다. 모윤숙이 건물과 자금을 대는 한편, 미국공보원으로부터 종이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발행할 수 있었다. 발행 당시 발행인은 모윤숙이었고, 주간에 김동리, 편집장 조연현이었다. 이에 따라 창간호의 「편집후기」는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의 차례로 실려 있다. 김동리가 조연현보다 한 단계 위에 자리한 격이다. 『문예』 9월호가 나올 때부터 조연현은 주간의 자리로 올라앉았다. 김동리가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이후 김동리는 ‘편집고문’이라는 직함을 통해 『문예』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연현(1920~1981)
김동리가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조연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의 기관지처럼 발행되었던 『서울신문』은 『매일신문』을 전신으로 한다. 해방 직후 『매일신문』이 좌익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자 미군정은 1945년 11월 10일 정간명령을 내렸고, 이에 대응하여 『매일신보』는 11월 23일부터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다. 1949년 5월 3일 이승만 정부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아마 자신에게 비판적인 논조가 문제였을 터인데, 『서울신문』에 정간 처분을 내렸다. 6월 20일 『서울신문』이 속간되었을 때는 이미 친이승만 계열로 간부진이 교체된 상태였다. 이 때 사장은 월탄 박종화였고, 김동리는 박종화 사장 체제에 출판국 차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신문』 출판국 차장’ 자리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김동리가 『문예』 주간 직함을 버리고 『서울신문』 출판국 차장으로 나아갔던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이 왜 능력의 문제라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서울신문』 출판국에서 발행하는 문학 중심의 종합지 『신천지』에 해답이 있다. 문단의 우익 진영에서는 『문예』와 『신천지』를 양 날개 삼아 문단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감당할 적임자로, 조연현이 아닌, 김동리를 꼽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김윤식 교수가 요령 있게 지적하고 있다.
“『신천지』냐 『문예』지냐의 선택 앞에 노출된 김동리, 조연현 두 사람 중 결국 김동리가 『신천지』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다른 유능한 사람들이 그 당시에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때의 분위기는 김동리씨나 나나 둘 중의 누가 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고 조연현이 말해 놓았지만 결과는, 김동리가 선택된 것이라면 우익 저널리즘의 문단적, 문학적 세력의 정상에 김동리가 올라섰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정부 수립과 더불어, 우익 문단의 기틀이 완전히 잡혔으며, 그 실세의 정상에 김동리가 군림하였음이 확연히 드러난다.”(『해방공간의 내면 풍경』, 민음사, 1996, 173면.)
이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살펴볼 논문이 두 편 있다. 먼저 조연현이 김동리를 겨냥하여 발표했던 「문학의 영역-종교와 철학과 문학의 기초적 내용」(『백민』, 1948.5). “관념과 신앙을 사상과 혼동함으로써 문학을 종교나 철학의 영역에까지 유도해 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비판이 골자이다. 여기서 김동리를 견제하고자 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월간 『문예』
조연현의 「문학의 영역」에 대해 김동리는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私考)」(『인간과 문학』, 1948)로 답변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근대 서구의 분과학문적인 접근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대응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후 김동리가, 그리고 정통 문협파가 지향하는 ‘순수문학’이 정치나 이념 대중 등 다른 영역과의 절연을 통해 존립이 가능해지는 개념임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반박은 결국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경고하고자 하는 것은 서양인의 관념적 체계가, 그것도 더구나 근대에 와서 문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정치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하는 것을 너무나 직업적으로 분업화 내지 분열화 시켰다는 사실이다.”
김동리와 조연현의 사소한 긴장 관계는 잠복한 상태로 문협의 밑그림은 서서히 분명해져 갔다. 1946년 결성된 문단의 우익 세력이었던 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가 1949년 12월 17일 한국문학가협회의 창립으로 발전하는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간부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회장 박종화, 부회장 김진섭, 소설분과 위원장 김동리, 시분과 위원장 서정주, 희곡분과 위원장 유치진, 평론분과 위원장 백철,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윤석중, 고전문학분과 위원장 양주동, 사무국장 박목월.
이 때까지는 문단의 우익 진영 내에서 주도권을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이 그렇게 커다랗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1954년 벌어진 ‘예술원 파동’이 발단이다.
전쟁 중이었던 1952년 8월 부산에서는 ‘문화보호법’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1954년 3월 25일 창건된 것이 예술원이다. 이 때 예술원 회원으로 뽑힌 문학계 인사는 염상섭, 박종화, 오상순, 유치환, 윤백남,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이다. 김광섭, 이헌구, 이하윤, 박계주, 모윤숙 등 문단의 원로급 인사들이 탈락해 있는 데 반해, 40대 초반, 30대 중반의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이 뽑혔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하기야 이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원 회원을 선거한 예술인들의 인선을 등록해 놓은 인물이 당시 문교부 장관 김법린과 김동리였기 때문이다.
백산상회 장학생으로 프랑스 소르본대학 유학을 다녀온 베르그송의 제자 김법린은 김동리와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1934년 불교계의 항일세력이 불단의 주도권을 상실하자 만해 한용운은 그들을 최범술이 주지로 있는 다솔사로 내려 보냈었다. 최범술은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에서 실패한 김법린(金法麟) 전가족, 허영호(許永鎬), 한보순(韓普淳)과 불교계와는 딴판인 김범부(金凡父)선생과 그 전가족(凡父선생 동생 金東里씨도) 등의 생활을 다솔사로 데려와 내가 맡았고, 卍海선생의 생활상의 책임도 져야 했다.”(「청춘은 아름다워라-최범술43」, 『국제신보』)
『현대문학』 제1호 (1955년 1월)
김동리는 그 때 김법린과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하였다. 1930년대 중후반 서정주는 김동리를 찾아 다솔사에 들어와 몇 달 기거한 바 있다. 해방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김법린은 서정주에게 불어를 배워 두라고 권유한 일도 있었다. ‘해방되었을 때’를 믿한 서정주가 이를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훗날 김법린은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문단의 원로급 인사들이 크게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이 때 원로들은 1947년 2월 12일 발족시킨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협을 문총 산하단체에서 제명하는 한편, 김동리 또한 문총 회원 자격을 박탈하였다. 건물과 자금을 제공했던 모윤숙이 『문예』를 폐간시킨 일도 이 때문이다. 서정주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집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된 인물이 김동리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술원 선거 바로 다음에 있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지금의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전신) 그 총회에서 한바탕 되게는 벌인 일인데(……) 제일 많이 공격의 대상이 된 건 김동리씨였다. ‘문단에 섹트sect를 구성해서 정실로 자파의 이익만을 일삼은 사람-모모를 핏셋으로 집어내라!”(「명천옥 시대」, 『미당 자서전』, 민음사, 1994, 349면.)
이러한 갈등을 겪으면서 문단은 선명하게 양분된다. 김광섭, 이헌구, 이하윤, 모윤숙 등 문총계 인사들이 문협을 탈퇴하여 1955년 6월 자유문학자협회를 결성하는 과정은 이를 보여준다. 갈라선 이들은 각각 나름의 발표매체를 확보하였는데, 문협파는 『현대문학』을 만들어 결집하였고 문총파는 『자유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현대문학』은 1955년 1월 창간되었고, 『자유문학』은 1956년 5월부터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韓國文學
상고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이룩된 문학. 크게 구비문학(口碑文學)·한문학(漢文學)·한글기록문학 세 영역으로 나뉘어진다. 구비문학은 민속학의 한 분야로 여겨지기도 했었으나 현재는 한국문학의 기저(基底)로 인식·평가되고 있다. 한자 수용과 함께 한문학의 등장으로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이 공존하게 되었으며, 한국어 기록문학은 처음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린 차자문학(借字文學)으로 시작되었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구비문학을 받아들이고 한문학 영향을 수용하면서 영역이 넓어졌다. 근대에 들어와 구비문학이 약화되고 한문학이 청산되면서 한글로 기록된 문학만이 한국문학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상고시대〕
한국문학의 기원은 구석기시대 시가·무용·음악이 합쳐진 원시종합예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 이후에는 농경 시작과 함께 노래와 춤에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농업노동요와 소박한 형태의 신화·서사시가 생겨났다. 이것은 민족이동이 이루어지면서 고아시아계통의 선행문화와 결합하게 되었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국가가 형성되면서 고조선 <건국신화>, 고구려 <주몽(朱蒙)신화>, 신라 <박혁거세 신화> <김알지 신화>, 가락국의 <김수로왕 신화> 등 건국영웅의 행적을 찬양하는 신화와 서사시로 발전하여 나타났다. 건국신화는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 동예 무천(舞天), 삼한(三韓)의 기풍제(祈豊祭)·시월제(十月祭)같은 국가적 행사를 통하여 전승되었다. 한편 신화적인 질서가 흔들리면서 고조선 때 백수광부(白首狂夫) 처(妻)가 물에 빠져 죽은 남편을 애도하며 부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최초의 서정시로 평가되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
가야의 주술적 구술가요였던
《구지가(龜旨歌)》 등 새로운 형태의 노래가 나타났다. 이러한 노래들의 형식은 향가로 이어진다. 〔삼국시대〕 삼국이 각각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한문을 사용하고 불교·유학을 받아들인 것은 문학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한문은 BC 4세기에 도입되었으나 삼국시대에 와서 국사편찬·금석문에 활용되면서 한국문학이 기록문학으로 접어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등은 당시 한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들이다.
유학과 불교는 보편적인 이념을 구현하면서 문학의 주제를 심화·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신라 유리왕 때에 지어진 《도솔가》와, 같은 시기 길쌈노래인 《회소곡(會蘇曲)》은 종래 건국신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하계층의 화합을 꾀한 노래였다. 고구려 가요로서 노랫말이 온전하게 전하지 않으나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명주가(溟州歌)》 등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에는 주로 온화하고 서정적인 문학이 융성하였고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방등산(方等山)》 《지리산(智異山)》 등의 가요가 있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정읍사(井邑詞)》 1편뿐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향찰(鄕札)이 쓰이면서 향가(鄕歌)가 나타났다. 《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 등 신라 초기 향가는 4구체 형식인데 민요의 정착으로 보인다. 4구체를 거듭한 것이 8구체이며, 신라 귀족문화 발달과 함께 사뇌가(詞腦歌)라는 10구체의 정제된 형식이 나타났다.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는 사뇌가가 화랑과 깊은 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첫 예이다. 설화(設話)를 통하여 당시의 문학을 더욱 광범위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신화적 내용은 점차 퇴색하고 일반백성의 고난과 사랑이 잘 나타나 있는데,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설화, 설씨녀(薛氏女)설화, 백제왕 횡포에 저항한 도미(都彌)의 설화, 사람과 호랑이의 사랑이야기인 김현감호(金峴感虎)설화 등이 그러한 종류이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당(唐)나라의 한문화(漢文化)를 수용하고 불교가 토착화되는 등 문화가 발달하였다. 삼국시대 말기 발생한 향가문학은 설총이 생존한 시기를 전후로 정리된 듯 보이는 이두문자를 통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충담사(忠談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 등이 대표적 작품이며, 《처용가(處容歌)》는 후대에 윤색·첨가되어 조선시대 궁중가무로 이어졌는데, 이들 작품에 공통되는 특징은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정토(淨土)를 염원하는 그 사상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진성여왕 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위홍(魏弘)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엮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신라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만 전한다.
이 시기에 이룩된 설화문학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고대소설의 근원설화(根源設話)로 되살아났다. 즉 조선시대 작품인 《토끼전》은 귀토설화(龜兎設話), 《흥부전》은 방이설화가 근원이다. 신라 한문학은 통일 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설총의 《화왕계(花王戒)》는 꽃을 의인화하는 풍자적 수법을 보이고 있고, 진성여왕의 정치를 비판한 왕거인(王巨仁)의 항거시(抗拒詩) 등은 통일 이면에 내재한 모순과 고민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한문학은 강수(强首)·김인문(金仁問)·설총·김대문(金大問)·최치원(崔致遠) 등 6두품 출신 문인들로 대표되는데, 특히 최치원은 그 문명(文名)을 중국에까지 떨쳤으며 저서로 《계원필경(桂苑筆耕)》이 남아 있다. 한편 발해(渤海)문화에서 민간전승이나 고유한 문학의 자취는 찾을 수 없으나 한문학은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혜공주묘비(貞惠公主墓碑) 및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양태사(楊泰師)·왕효렴(王孝廉) 등의 시에서 그 일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 전기(前期)의 문학은 전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균여(均如)는 화엄사상에 입각한 교화를 펴고자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로 총칭되는 향가 11수를 지었다. 이것이 본격적 향가로서는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와 의종 때 정서(鄭敍)가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정과정곡(鄭瓜亭曲)》에는 향가의 자취가 남아 있다.
958년(광종 9)의 과거(科擧) 실시는
시가와 문장의 능력을 중요시하여 한문학 융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책(時務策) 28조>에 이어 최충(崔沖)·박인량(朴寅亮) 등의 한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 무렵 설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김해지방 수령이 지었다는 《가락국기》 및 신라부터 있었던 책을 보완·개작한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 등 주목할 만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한편 역사보다 설화가 중시되는 풍조를 시정하고 유학에 의한 통치이념 확립을 위해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1170년(의종 24)의 무신정변 이래
약 1세기에 걸친 무신집권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고려문학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비평에 있어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을 지어 위기에 몰린 문학을 옹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강조한 데 비해, 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白雲小設)》에서 문장의 수식보다 내용과 독창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최해의 《동인지문(東人之文)》, 이제현(李齋賢)의 《역옹패설》에도 작자의 문학관이 나타나 있다. 또한 《삼국사기》가 이룩한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벗어나 민족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건국 서사시를 재현한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불교와 민간전승이 어우러진 데서 민족정신의 맥락을 찾고자 했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민족사 전개를 중국과 대비한 서사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이 그것이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는
한문학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행장(行狀)·묘지(墓誌)·전(傳)의 비중이 커지는 한편 사물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쓴 가전체(假傳體)소설로, 돈을 의인화한 임춘(林椿)의 《공방전(孔方傳)》,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麴先生傳)》 등과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이첨(李詹)의 《저생전(楮生傳)》 등이 나왔다. 고려 후기에 성행하던 궁중악에 쓰인 속악가사(俗樂歌詞)는 대부분 민요를 개작한 것으로 보이며 《동동(動動)》 《가시리》 《이상곡(履霜曲)》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서경별곡(西京別曲)》 《청산별곡(靑山別曲)》 등이 있다. 향가가 자취를 감추면서 경기체가(景幾體歌)·가사(歌辭)·시조(時調) 등이 상층문학에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한림별곡(翰林別曲, 1216)》을 ***로 이어지는 안축(安軸)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의 경기체가는 당시 성행하였던 팔관회나 연등회의 연희에 알맞게 만들어진 분장(分章)형식으로,
이 시기 새로 등장한 시가형식이다. 가사는 향찰로 표기된 혜근(惠覲)의 《승원가(僧元歌)》가 발견되면서 고려 후기에 발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가요가 퇴조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시조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우탁·이조년(李兆年)의 작품부터를 시조의 시작으로 본다. 시조는 초기 한문투에서 서정성 넘치는 고유의 정형시로 다듬어져 나갔다.
〔조선시대〕
〈전기〉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 창제로 본격적인 한글문학이 시작되었다. 그 성과로 한국 최초의 정음문학(正音文學)인 《용비어천가(1445)》 《월인천강지곡(1448)》 등이 탄생되었다. 한편 새 왕조를 칭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장(樂章)으로는 정도전(鄭道傳)의 《문덕곡(文德曲)》 《무덕곡(武德曲)》이 기본을 이룬다. 경기체가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경우처럼 악장의 구실을 하다가 형식이 산만해지면서 조선 전기에 사라졌다.
가사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 이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았고 유배가사·기행가사 등으로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송순(宋純)의 《면앙정가》를 거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에 이르러 가사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시조는 고려 유신(遺臣)의 유교적 충절을 읊은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의 《회고가(懷古歌)》에 이어 새 왕조의 건설을 찬양한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외적을 물리치면서 강토를 개척하는 진취적 기상을 표현한 김종서(金宗瑞)의 《전진가(戰陣歌)》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충의가(忠義歌)》 등이 나왔다. 그 뒤 이현보(李賢輔)·송순(宋純)을 중심으로 가단(歌壇)이 형성되었고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 연시조의 성행을 거쳐 정철은 《훈민가(訓民歌)》 등을 통하여 시조의 판도를 넓혔다.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 등은 애틋한 감정으로 애정을 노래하여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한문학에서는 세종의 집현전 설치가 그 융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서거정(徐居正)이 《동문선(東文選)》 《동인시화(東人詩話)》, 어숙권(魚叔權)이 《패관잡기》를 기술하였다. 특히 《동문선》은 한국의 문화적 유산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역대 시문 중에서 뛰어난 것만 뽑아 모은 것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를 지어 사장파(詞章派) 문학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이달(李達)·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 등의 삼당시인(三唐詩人)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재능을 발휘하였다.
고려 때부터 이어진 가전(假傳)은 사물이 아닌 심성을 의인화하는 것으로 변모하였으며, 김우옹의 《천군전(天君傳)》과 임제(林悌)의 《수성지(愁城誌)》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 전기에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이 비속한 설화에도 관심을 가져 음담패설을 한문으로 옮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송세림의 《어면순(禦眠楯)》 같은 골계류가 편찬되었다. 명혼설화(冥婚設話)와 몽유설화(夢遊設話)를 수용한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설화를 소설형식으로 끌어올려 고유신앙과 연결된 생활감정과 역사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를 통하여 구전에만 의존하던 《동동》 《정읍사》 등의 옛 노래를 비로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정착시켰다.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문학의 관심은 현실비판으로 돌려졌고, 지배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의 자각이 반영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 양반 중심적인 문예활동을 비판하면서, 일반 서민들이 창작하여 향유하는 평민문학이 나타났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 박인로(朴仁老)의 《태평사(太平詞)》 《선상탄》,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의 수난과 분발을 수록한 것이고, 병자호란의 참상을 그린 기록으로 궁녀가 쓴 《산성일기(山城日記)》,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의 시조가 있다.
이 시기 시조문학의 최고봉은 윤선도(尹善道)였다. 그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산중신곡(山中新曲)》은 자연시인으로서의 풍모를 뚜렷이 드러내는 것으로, 시조문학의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 그 뒤 중인·서리·시정인 등의 평민 작가들이 그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시조를 통해 사대부들과 경쟁하면서 가단(歌壇)을 이루어 시조창과 창작을 수련하고 시조집을 편찬하였다.
특히 이들에 의하여 사설시조(辭設時調)가 만들어진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763)》,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歌曲源流, 1876)》가 시조문학의 자리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문학에 있어서는 박지원(朴指源)·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려 생동하는 문체를 이룩하였고, 신위(申緯)는 개성적인 표현으로 한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중인·서리·시정인들도 한문학 창작에 적극 참여하여 위항문학(委巷文學)이 성립하였다. 또한 문학의 본질과 사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타나면서 문학사상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허균은 도학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담은 문학을 주장하였고, 김만중(金萬重)은 모방에 급급한 한시보다 민요가 더욱 가치 있다는 견해를 드러내었으며, 홍만종(洪萬宗)은 역대 시가를 모아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해 국문시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였고 이세보(李世輔)는 458수의 작품으로 개인시조집을 엮었다. 경기체가가 자취를 감춘 대신 가사가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길이가 길어지고 형식이 산만해지는 한편,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소재가 확대되었다.
기행가사는 일본과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온 인물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1763)》,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 1866)》 등 장편가사가 나왔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우부가(愚夫歌)》 같은 풍속가사도 성행하였다. 가톨릭 포교를 목적으로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辭), 여자들의 규방가사(閨房歌辭) 등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역사적 내용을 지닌 인물 전설인 야담에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 이희준(李蓍準)의 《계서야담(溪西野談)》,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東野彙輯)》 등이 있다.
조선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고대소설의 개화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로 시작된 한문소설에서는 허균의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 실화(實話)를 다룬 이항복(李恒福)의 《유연전(柳淵傳)》과 권필의 《주생전(周生傳)》을 비롯 심성을 의인화한 정태제(鄭泰齋)의 《천군연의(天君演義)》 같은 가전소설도 나타났다.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한국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 부녀들 사이에서 내간·제문·일기·실기 등을 한글로 짓는 풍속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산성일기》,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궁중 실기류가 지어졌다. 한글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시작으로 남해 유배 시절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이나 임금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지었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에 이르러 한층 세련된 표현을 지니게 되었다.
군담류(軍談類) 소설로는 《조웅전(趙雄傳)》 《유충렬전(劉忠裂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장인걸전(張人傑傳)》 《곽재우전(郭再祐傳)》 《여장군전(女將軍傳)》 등이 있으며, 염정소설로는 《춘향전》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옥단춘천(玉丹春傳)》 《운영전(雲英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이 있다. 이 밖에 《장화홍련전》같은 가정소설, 《심청전(沈淸傳)》같은 도덕소설 등도 출간되었다.
18세기 이래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서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다듬어졌다. 〔개화기〕 이 시기의 문학은 전통적 문화양식의 근대적인 변혁과 새로운 외래적인 문학양식의 수용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양의 침략과 내부적 혼란이라는 현실 아래 위기의식과 구국의지는 이 시기 문학의 기본적인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1860년 동학을 창건한 최제우(崔濟愚)는 국문가사 《용담유사(龍譚遺詞)》를 지어 구국의지를 표현하였으며, 성리학자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반영된 작품으로 대응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절명시(絶命詩)》, 김택영(金澤榮)의 시, 유인석(柳麟錫) 등 항일의병장들의 애국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문학이 퇴조하면서 깊은 사상을 담은 글에도 국한문 혼용을 택하게 되어 한문과 한글의 비중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896년(고종 3) 창간된 《독립신문》에서는 순한글체가 사용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에서는 전기(傳記)를 중요시하였다. 1907년에 박은식(朴殷植)의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와 장지연(張志淵)의 《애국부인전(愛國婦人傳)》이 나와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신채호(申采浩)는 《을지문덕(1908)》 《이순신실기(李舜臣實記, 1908)》를 내놓아 구국의 웅변을 토하였다.
개항기 외세배격을 위한 문학운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문학에 미친 서구와 일본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구체적 흔적은 번역문학에서 나타나는데 《천로역정(天路歷程)》의 번역(1895)과 일본을 통한 중역(重譯)으로 이루어진 조중환(趙重桓)의 《장한몽(長恨夢)》, 이상협(李相協)의 《해왕성(海王星)》 등을 들 수 있다. 창가(唱歌)는 1890년대 후반 《독립신문》 발간과 함께 등장하여 《애국가》 《동심가》 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창가는 그 뒤 널리 퍼져 최남선(崔南善)의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에 이르러 장편화되었다. 한편 소설이 이미 널리 인기를 모으고 있는 데 힘입어 기존 전개방식을 적지않게 받아들이며 개화사상을 나타낸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최초 신소설인 이인직(李人稙)의 《혈의 누(血-淚, 1906)》를 비롯한 이해조(李海朝)의 《자유종(自由鍾, 1910)》, 최찬식(崔瓚植)의 《추월색(秋月色, 1912)》이 대표적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소년의 비애(1917)》 《무정(無情, 1917)》을 발표하여 문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무정》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문체와 내용면에서 근대적 성격이 인정되고 있다. 신소설과 함께 나타난 신체시(新體詩)는 전통적 율격에서 벗어나 창가와 구별되나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남선은 《해(海)에게서 소년에게(1908)》 등으로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3·1운동 뒤〕
일제 무단정치가 완화되는 추세에 힘입어 신문학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근대적인 각성과 민족의 처지에 따르는 고민이 새로운 표현을 얻으면서 문학은 언론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문학이 청산되고 언문일치가 이루어졌으며, 문학의 범위를 시·소설·희곡으로 설정하자는 것도 일치된 의견이었다.
19세기 근대문학 사조인 낭만주의·사실주의·상징주의 등이 도입되었고, 문학지들 또한 많이 등장하였다.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통해 김억(金億)·황석우(黃錫禹) 등이 자유시를 발표하였다. 《창조(創造, 1919)》에는 자유시의 지향을 볼 수 있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가 발표되었다. 《폐허(1920)》에서는 김억·남궁벽(南宮璧)·나혜석(羅惠錫)·오상순(吳相淳)·염상섭(廉想涉) 등이, 《백조(白潮, 1922)》에서는 박종화(朴鍾和)·나도향(羅稻香)·이상화(李相和) 등이 활동하였다. 김소월(金素月)은 시집 《진달래꽃(1925)》에서 민요적 율격을 통해 전통적 정서를 시대의 아픔으로 바꾸어 놓아 깊은 공감을 자아냈고,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에서 민족 현실과 좌절하지 않는 정열을 노래하였다.
한용운(韓龍雲)은 시집 《님의 침묵(1926)》에서 좌절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논리를 사상적 깊이가 담긴 상징적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김동인(金東仁)은 《배따라기(1921)》 《감자(1925)》 등을 통해 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하는 한편 현실 속에서 격변하는 인간의 운명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또한 어두운 식민지라는 현실 아래 현진건(玄鎭健)은 《술 권하는 사회(1921)》 《운수좋은 날(1924)》을 통해,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만세전(1922)》으로, 나도향은 《벙어리 삼룡이(1925)》 등으로 농촌과 도시인의 삶이나 지식인의 좌절과 비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신파극을 극복하고 근대극을 이룩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극단 토월회(土月會)가 조직되고 박승희(朴勝喜)·김우진(金祐鎭)의 활약이 컸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식민지 현실에 대응하여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향하는 경향이 등장하였다. 박영희(朴英熙)·김기진(金基鎭)을 중심으로 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결성되었으며, 문학이란 무산계급의 해방에 복무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진 창작이 강조되었고 계급문학운동은 신경향파(新傾向派)의 시기를 거쳐 목적의식기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이념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소설에서는 최서해의 《탈출기(1925)》, 이기영(李箕永)의 《고향(1934)》, 한설야(韓雪野)의 《황혼(1936)》 등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계급의식에 기초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강조하였다. 30년대는 문학에 대한 일제의 사상적 탄압이 자행되고 35년 카프의 해체를 계기로 1920년대의 집단적 이념 추구 경향은 개인적 정서에 기초한 순수문학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서정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시에서 김영랑(金永郞), 소설에서 이효석(李孝石)의 작품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서정주의적 경향에는 민족주의의 애상과 안타까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30년 《시문학(詩文學)》 발간을 계기로 언어중심·기교위주의 시풍을 개척한 것이 주목된다. 언어의 조탁(彫琢)과 세련된 감각을 추구하였던 정지용(鄭芝溶)은 《정지용시집(1935)》에서 시각적인 심상(心像)을 보여주었고, 김영랑은 《영랑시집(1935)》에서 미묘한 음악적 효과를 구현하였다. 이용악(李庸岳)은 《오랑캐꽃(1939)》 등에서 식민지시대 유민(流民)의 비극적 실상을 형상화 해 보이고 있다. 백석(白石)은 《사슴(1936)》에서 소박한 시골풍경, 구수한 흙냄새, 토속에 걸맞는 문체로 민속화적 색채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장환(吳章煥)은 《나 사는 곳(1947)》에서 고향의 발견과 그 황폐의 인식 속에 전통적인 삶의 안식을 노래하였다.
김기림(金起林)은 《기상도(氣象圖, 1936)》에서, 김광균(金光均)은 《와사등(瓦斯燈, 1939)》에서 도시문명의 감각을 회화적 수법으로 펼쳐보이는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모더니즘은 시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운동으로 김기림·김광균·장만영(張萬榮)·장서언(張瑞彦) 등이 이에 속하였다. 이상(李箱)은 식민지시대 지식인의 자기해체적인 모습을 그린 《오감도(烏瞰圖, 1934)》로 주목을 받았다.
36년 창간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에서 유치환(柳致環)과 서정주(徐廷柱)는 생명의 의지를 추구하는 시풍을 보여주었다. 농촌소설에 대한 관심도 크게 일어나 이광수의 《흙(1932∼33)》, 심훈(沈熏)의 《상록수(1935∼36)》, 이무영(李無影)의 《제일과 제일장(1939)》이 나왔으며, 김유정(金裕貞)은 농촌생활을 해학적으로 다루었다. 세태소설로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이태준(李泰俊)의 《복덕방(1936)》, 박태원(朴泰遠)의 《천변풍경(川邊風景, 1938)》, 염상섭의 《삼대(三代, 1931)》, 채만식(蔡萬植)의 《탁류(濁流, 1937∼38)》 《태평천하(太平天下, 1938)》 등이 이에 속한다. 홍명희(洪命憙)는 《임꺽정(1939)》에서 한국인의 삶을 시대와 역사의 전체적 조명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1931년 유치진(柳致眞)의 주도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가 창립되어 수준높은 번역극·창작극을 공연하는 등 희곡에서도 전환이 일어났다.
새로운 문장을 수련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나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 1940)》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방정환(方定煥)의 아동문화운동에 의해 아동문학이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국어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작품을 일본어로 쓸 것을 강요,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40년대를 국문학사의 암흑기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5년 뒤〕
〈남한〉
일제의 패망과 함께 문학도 활기를 찾았으나 그 진로 설정을 두고 좌우익이 분열되었다. 46년 좌익은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 우익은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와 청년문학가협회(靑年文學家協會)를 각기 결성, 대립하였다.
한편 민족항쟁기 시인들의 시집이 출간되는 큰 수확이 있었다. 이육사(李陸史)의 《육사시집(1946)》과 윤동주(尹東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심훈의 《그날이 오면(1949)》 등이 그것이다. 시의 나아갈 방향설정에 대해 논란이 벌어질 때 박목월(朴木月)·박두진(朴斗鎭)·조지훈(趙芝薰)의 《청록집(靑鹿集, 1946)》이 나와 향토적 정서를 일깨워주었으며, 이용악도 시집 《오랑캐꽃(1947)》에서 이와 상통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희곡에서는 좌경노선을 택한 송영(宋影)·함세덕(咸世德) 등이 좌익성향의 작품을 내놓을 때, 유치진은 《원술랑(元述郞, 1950)》 같은 애국심을 일깨우는 역사극을 창작하였다. 평론에서는 좌우익 논쟁이 치열하였으며 김동석(金東錫)의 《문학과 인간(1947)》, 김동리의 《문학과 사상(1948)》이 논쟁의 산물로 나타난 평론집이다.
6·25 뒤 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학예술》 《현대문학》 등 종합문예지와 《사상계》 등의 종합교양지가 문학활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소설의 경우 지식인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고민을 다룬 안수길(安壽吉)의 《제 3 인간형(1953)》이 나왔다. 황순원(黃順元)은 《카인의 후예(1954)》 《인간접목(1955)》에서 삶의 총체적 인식을, 김동리(金東里)는 《사반의 십자가(1957)》에서 인간 구원의 문제를 형상화하였다. 또 선우휘(鮮于煇)의 《불꽃(1957)》, 김이석(金利錫)의 《실비명(1960)》, 강신재(康信哉)의 《젊은 느티나무(1960)》 등이 발표되었고, 손창섭(孫昌涉)의 《잉여인간(1959)》, 이범선(李範宣)의 《오발탄(1959)》, 전광용(全光鏞)의 《꺼삐딴 리(1962)》 등은 어둡게 살아가는 전후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들이다.
평론에 있어 백철(白鐵)은 《조선신문학사조사》에서 신문학사를 서양문예사조의 도입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였고 조연현(趙演鉉)은 《한국현대문학사(1957)》에서 문단의 주도권 변천을 특히 중요시하였다. 이때 시는 전후파로 불리는 50년대의 새로운 시인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김수영(金洙映)이 함께 펴낸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에서 서구의 시를 받아들여 난해한 경향을 보였으며, 박남수(朴南秀)의 《갈매기 소묘(素描, 1958)》, 김춘수(金春洙)의 《꽃의 소묘(1959)》 등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과 언어감각을 새롭게 하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정서를 살리면서 표현을 가다듬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박재삼(朴在森)의 《춘향이 마음(1956)》과 김관식(金冠植)의 《김관식시선(1957)》, 김남조(金南祚)의 《나무와 바람(1958)》 등이 그것이다.
전후문학은 4·19를 계기로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정치·사회에 대한 각성과 비판의식이 높아지면서 최인훈(崔仁勳)의 《광장(廣場, 1961)》, 이호철(李浩哲)의 《판문점(板門店, 1961)》, 남정현(南廷賢)의 《분지(糞地, 1965)》와 김정한(金廷漢)의 《모래톱 이야기(1966)》 등 민족분단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 발표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와 함께 김승옥(金承鈺)은 《서울, 1964년 겨울(1965)》에서 소시민적 삶의 양상을 표현하였으며, 이청준(李淸俊)은 《병신과 머저리(1966)》를 통해 현실과 관념의 대응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였다.
시에서도 4·19는 시 자체에 대한 인식과 시인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현실적 생명력과 감동을 지닌 시가 요구되면서 김수영·신동엽(申東曄)은 시에 대한 자기변혁을 먼저 시도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뒤에 신경림(申庚林)·조태일(趙泰一)·이성부(李盛夫)·최하림(崔夏林)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황동규(黃東奎)의 지적 감각, 김지하(金芝河)의 풍자의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60년대 중반 이후 시의 현실참여문제가 많은 시인들의 관심사였던 것과 달리 김춘수와 황동규 등은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의 가능성을 시도하였다. 한편 전통적 서정주의의 맥을 이은 시인들로 김규동(金奎東)·박재삼·이원섭(李元燮)·천상병(千祥炳) 등이 있다. 희곡에서는 차범석(車凡錫)의 《산불(1963)》, 강성희(姜誠姬)의 《두 얼굴(1977)》, 천승세(千勝世)의 《만선(1964)》, 대담한 정치풍자를 한 이근삼(李根三)의 《제18공화국(1965)》, 현대인의 심리를 파헤친 오태석(吳泰錫)의 《환절기(1968)》 등이 주목을 끌었다.
70년대에는 산업화과정의 사회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황석영(黃晳映)의 《객지(1971)》,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 이문구(李文求)의 《관촌수필(1977)》, 윤흥길(尹興吉)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1977)》 등은 산업화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변두리 주민 및 농민들의 생활과 노동현장을 묘사한 작품이다. 풍속과 세태에 대한 풍자도 하나의 뚜렷한 소설적 경향이었는데, 방영웅(方榮雄)의 《분례기(糞禮記, 1967)》, 최인호(崔仁浩)의 《별들의 고향(1973)》, 박완서(朴婉緖)의 《도둑 맞은 가난(1975)》, 최일남(崔一男)의 《타령(1976)》 등이 그 예이다.
한편 민족분단과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활발하여 김원일(金源一)의 《노을(1977∼78)》, 전상국(全商國)의 《아베의 가족(1970)》, 이동하(李東河)의 《굶주린 혼(1980)》, 이문열(李文裂) 《영웅시대(1982)》 등이 발표되었다. 근대민족사를 밀도 있게 다룬 박경리(朴景利)의 대작 《토지(1973∼94)》를 비롯하여 황석영의 《장길산(1974∼84)》, 김주영(金周榮)의 《객주(1979∼83)》 등 대하소설이 발표된 것도 한국 현대소설의 중요한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시에서는 참여파로 불리는 시인들에 의해 뚜렷한 시적 경향이 생겨났다. 신경림의 《농무(農舞, 1973)》, 고은(高銀)의 《문의(文義)마을에 가서(1974)》, 조태일의 《국토(1975)》, 최하림의 《우리들을 위하여(1976)》 등이 그 예이다. 이 밖에 정현종(鄭玄宗)의 《사물의 꿈(1972)》 등은 강한 개성을 나타내었다.
평론에서는 문학과 전통과의 새로운 관계정립, 현실참여, 분단시대의 사명에 대한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윤식(金允植)과 김현의 공저 《한국문학사(1973)》가 간행되었다. 이어 백낙청(白樂晴)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978)》에서 문학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한국문학》 등의 종합문예지가 성장하였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이 계간문학지로서 기반을 잡았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80년대는 학생들의 눈을 노동현장으로 돌리게 하고 사회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시대였는데 노동자시인이라 불린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이 출판되어 널리 읽혀진 것도 그러한 것의 반영이었다. 이 시대는 많은 금기를 타파하려는 노력이 계속된 때이기도 했다.
83년부터 조정래가 좌익복권을 기도하여 1948년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을 배경으로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발표하고, 황석영은 베트남전쟁을 제재로 《무기의 그늘(1985∼88)》을, 현기영(玄基榮)은 제주도4·3사태를 작품화하였다. 북한 작품 《피바다》 《꽃 파는 처녀》가 국내에 유포되기도 하였다.
정치적 금기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의 완화책으로 88년 3월·7월에 월북·납북문인의 거의 전면적인 해금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약해졌다. 이 시기 최대 인기작가는 이문열(李文裂)이었으나 박완서(朴婉緖;《엄마의 말뚝》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오정희(吳貞姬;《동경(銅鏡)》), 양귀자(梁貴子;《원미동사람들》), 김향숙(金香淑;《유리파수꾼》) 등의 여성작가들도 착실히 써나가 90년대의 여성작가시대를 준비해갔다.
80년대 말경부터는 <광주>의 체험이 작품으로 결정되기 시작하였다.
최윤(崔允)의 《저기 소리도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1988)》가 대표적이다.
90년대에는 임철우(林哲佑)의 《봄날(1998)》같은 대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89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퇴조는 한국의 지적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혁신세력도 사상적인 구심점을 잃어버린 것처럼 방황을 계속했다. 이들을 대신하듯이 젊은 여성작가들이 나타나 90년대는 마치 여성작가시대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먼저 페미니즘적 요소가 강한 공지영(孔枝泳)이 같은 세대 여성들로부터 커다란 공감을 얻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와 《고등어(1994)》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조금 늦게 신경숙(申京淑)이 제 2 창작집 《풍금이 있던 자리(1993)》가 간행전후부터 각광을 받았다.
이들의 몇개 작품이 경향을 달리하면서도 80년대에 불타올랐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시대를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후일담문학>
이라 불리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 90년대 중반 등단한 은희경(殷熙耕)은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기성 도덕의 틀을 뛰어넘었다. 또한 최영미(崔泳美)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94년에 출판되자 대베스트셀러가 된 일은 그 타이틀과 함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시대가 이처럼 크게 변화하는 가운데 박경리(朴景利)는 19세기 말부터의 민족역사를 묘사한 대장편 《토지(전 5 부, 16권)》를 94년에 완성시키고, 최인훈(崔仁勳)은 몇 십년만에 신작장편 《화두(火頭, 1994)》를 발표하는 등 대가들도 건재함을 보였고 최명희(崔明姬)는 유일한 작품 《혼불(1981∼96, 전 10권)》을 남겼다.
감옥에서 나온 황석영(黃晳映)이 오랜만의 신작장편 《오래된 정원(2000)》을 간행하였으며 그는 이 작품이 동인문학상 후보작에 오르자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북한〉 1945년 직후 북한의 문단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이 기조를 이루었으나 한설야·최명익(崔明翊)으로 대표되는 재북작가와 이태준·임화(林和)·박세영(朴世永) 등 월북작가 그리고 김사량(金史良)·조기천(趙基天) 등 해외에서 북한으로 온 작가들이 대립한 혼란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시 작품들은 주로 소련을 해방자로 찬양하거나 항일무장 투쟁, 봉건제 타파,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대표작품으로 이기영(李箕永)의 《두만강》 《땅》, 김사량의 《노마만리》,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등이 있다. 6·25 때는 전투의식과 남한·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작품이 활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임화의 시 《누이야,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 조기천의 소설 《조선은 싸운다》, 한설야의 소설 《대동강》 등이 있다.
6·25를 거치면서
북한작가의 인적 구성은 납북·월북에 의해 남한출신 작가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등 큰 변화를 겪었으나 휴전 뒤 남로당계가 숙청되자 임화·김남천(金南天)·박산운(朴山雲)·이원조(李源朝)·이용악·김기림·이태준·박태원 등 대부분의 남한출신 작가들은 비판을 받고 문학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50년대부터 60년대를 거치면서 당(黨)의 전후복구사업 방향에 맞는 경제·정치 선동을 위한 작품이 양산, 당으로부터 작품 주제를 통제받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일인체제가 강화되면서
개인의 창작이 아닌 집체창작 위주로 창작활동이 전환되었으며, 김일성 일가와 그에 <충직한 영웅>들을 형상화한 작품창작에 주력하였다. 집체창작은 70년대 이후 보다 활발해졌다.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은 이른바 혁명적 대작으로 완성하기 위해 연극·가극·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북한 문학은 전체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카프문학과 소련 현대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소재는 현실적·혁명적·사회주의적 내용과 특정인의 영웅성을 묘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북한 문학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소설화한 집체적 시리즈 총서 《불멸의 역사》를 비롯하여 소설 《갑오농민전쟁》 《충성의 한길에서》, 시 《은혜로와라 조국의 품이여》 《백두산》, 희곡 《밀림아 이야기하라》 《피바다》 《성황당》, 시나리오 《조선의 별》 등이다. 80년대 이후 남대현의 《청춘송가》나 백남룡의 《벗》과 같이 애정, 직업선택, 세대간 갈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작품들이 나타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일 등장 이후 그를 형상화하는 일이 중요한 문학적 주제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총서 <불멸의 향도(嚮導)> 시리즈이다.
90년대 최대 출판사업은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함께(1992∼)》였는데 거기에는 조금이나마 역사기술의 사실에 대한 수정이 보였다. 이러한 자세는 문학작품을 받아들이는 방법에도 반영되어 92년 《주체문학론(김정일)》에도 이광수·최남선·김억·방정환 등이 언급되어 있고 김동인의 작품집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사상이나 정치, 사회문제와는 관계없는 남녀간 애정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어 시사적이다.
문학사에서는 고대신화·민간설화·향가 등을 제외하고 있으며, 소설사(小設史)를 패설문학(稗設文學) → 금오신화 → 홍길동전 → 판소리와 소설 → 박지원 → 신재효 → 나도향 → 최서해 → 조명희(趙明熙) → 이기영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박지원의 《호질》 《양반전》을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고전문학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으로 고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론은 문학적 기교면보다 정치적 경향성 구현을 문제삼는 정치평론적 성격이 강하다.
〔연표〕
AD 고조선 여옥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17 년경 고구려 유리왕 《황조가(黃島歌)》 28 신라 유리왕 때 《도솔가(兜率歌)》 42 년경 가락국 수로왕 때 《구지가(龜旨歌)》 224 신라 물계자 《물계자가(勿稽子歌)》 579 년경 서동의 《서동요(薯童搖》 594 융천사 《혜성가(彗星歌)》 612 을지문덕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647 《풍요(風謠)》 불려짐 661 ~681 광덕 《원왕생가(願往生歌)》 681 ~691 설총 《화왕계(花王戒)》 692 ~702 득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702 ~736 《헌화가(獻花歌)》. 김대문 《화랑세기(花郞世紀)》 《계림잡편 (雛林雜編)》 737 ~741 신충 《원가(怨歌)》 742 ~765 월명사 《제망매가》, 충담사 《안민가(安民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희명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760 월명사 《도솔가(兜率歌)》 798 영재 《우적가(遇賊歌)》 875 ~886 처용 《처용가》 879 최치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888 위홍·대구화상 《삼대목(三代目)》 편찬 973 균여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047 박인량 《수이전(殊異傳)》 1120 예종 《도이장가(悼二將歌)》 1145 김부식 《삼국사기》 1147 임춘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1170 년경 정서 《정과정곡(鄭瓜亭曲)》 1193 이규보 《동명왕편》 1214 ~41 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 《국선생전(麴先生傳)》 1254 최자 《보한집(補閑集)》 1259 《한림별곡》 1260 이인로 《파한집(破閑集)》 1285 일연 《삼국유사》 1287 이승휴 《제왕운기》 1308 《쌍화점(雙花店)》 1309 년경 안축 《관동별곡》 《죽계별곡(竹溪別曲)》 《근재집(謹齋集)》 1340 년경 이곡 《죽부인전(竹夫人傳)》 《가정집(稼亭集)》 1342 ~48 이제현 《익제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樑翁稗說)》 《소악부(小樂府)》. 14세기 연대미상의 《동동》 《처용가》 《사모곡》 《청산별곡》 《가시리》 《정석가(鄭石歌)》 《서경별곡》 《이상곡(履霜曲)》 《만전춘(滿殿春)》 《상저가(相杵歌)》 《유구곡(維鳩曲)》. 이첨 《저생전(楮生傳)》 등
1392 정몽주 《단심가》, 이방원 《하여가》, 이색 《목은집(牧隱集)》 1393 정도전 《납씨가(納氏歌)》 《문덕곡(文德曲)》 1419 년경 권근 《상대별곡》 1425 변계량 《화산별곡(華山別曲)》 1431 맹사성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1445 《용비어천가》 1446 훈민정음 반포 1447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1456 변효문 《완산별곡(完山別曲)》 1459 《월인석보(月印釋譜)》 1466 ~72 김시습 《금오신화(金鰲新話)》 1474 서거정 《동인시화(東人詩話)》 1475 《악학궤범(樂學軌範)》 1478 서거정·노사신·강희맹 《동문선(東文選)》 편찬 1478 ~81 《두시언해》. 정극인 《상춘곡》, 서거정 《골계전》 《필원잡기》 1498 조위 《만분가(萬憤歌)》 1550 황진이 《박연폭포시》 《송별소양곡시(送別蘇陽谷詩)》 1556 백광홍 《관서별곡(關西別曲)》 1560 정철 《성산별곡(星山別曲)》 1565 이황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1567 양사언 《미인별곡》, 이황 《환산별곡(還山別曲)》, 어숙권 《패관잡기(稗官雜記)》 1577 이이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1580 정철 《관동별곡》 《훈민가》 1583 년경 김시습 《매월당집(梅月堂集)》, 송순 《면앙정가》, 임제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허난설헌 《봉선화가(鳳仙花歌)》 1588 정철 《속미인곡(續美人曲)》 1592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1607 년경 허균 《홍길동전》 1611 박인로 《누항사(陋巷詞)》 1613 《계축일기(癸丑日記)》 1618 윤선도 《우후요(雨後謠)》 1622 유몽인 《어우야담(於于野談)》 1651 윤선도 《어부사시사(漁父四寺詞)》 1652 홍만종 《시화총림(詩話叢林)》. 작자미상 《임진록(壬辰錄)》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1675 김만중 《서포만필(西浦漫筆)》 1688 년경 김만중 《구운몽》 《사씨남정기》 1725 김도수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76) 1728 김천택 시조집 《청구영언》 편찬 1746 김수장 시조집 《해동가요》
편찬(~70) 1763 김인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1786 정극인 《불우헌집(不憂軒集)》 간행 1800 년경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양반전》 《허생전》 《호질(虎叱)》 1801 유씨 《조침문(弔針文)》 1805 혜경궁 홍씨 《한중록(閑中銖)》 1832 연안 김씨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1860 최제우 《용담유사(龍潭遺詞)》
1675 ~1863 《춘향전》 《숙향전(淑香傳)》 《숙영낭자전》 《옥단춘전》 《장화홍련전》 《흥부전》 《심청전》 《토끼전》 《이춘풍전》 《배비장전》 1866 홍순학 《연행가(燕行歌)》 1869 이원명 《동야휘집(東野彙輯)》 1876 안민영·박효관 시조집 《가곡원류(歌曲源流)》 편찬 1884 신재효 《춘향가》 《박타령》 《심청가》 《토끼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 등 판소리 여섯마당 정리 1895 유길준 《서유견문(西遊見聞)》 1905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이태리국 아마치전》 1906 《거부오해(車夫誤解)》 《신단공안(神斷公案). 이인직 《혈의 누》 《귀(鬼)의 성(聲)》 1907 장지연 《애국부인전》 《라틴부인전》 1908 안국선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최남선 《소년》지 창간·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신채호 《을지문덕》 1910 황현 《절명시(絶命詩)》, 이해조 《자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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