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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차게 해서 마시는 솔잎차
오병훈(한국수생식물연구소 소장)
대부분의 차는 데워서 마신다. 그러나 솔잎차는 차게 해서 마셔야 제 맛이다. 인적 드문 산막에서 마시는 한 잔의 솔잎차[松葉茶], 밖에는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한 밤, 이럴 때 마음을 달래 주는 명약같은 것이 바로 솔잎차 한 잔의 맛이요 향이다. 눈 내리는 날은 바람도 잔잔한 법이다. 이따금씩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눈송이가 마당에 내려설 때 풀썩하고 비둘기 날갯짓 소리를 낼 때도 있지만 산막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창호지로 스며드는 눈빛만으로도 방 안에서 익어 가는 화롯불이 선명하고 찻상에 놓인 찻잔 정도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사람이 그립고 인정에 목마를 때 진정 외로움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따뜻한 녹차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외로움이라는 그 고된 고갯길을 넘은 이라면 솔잎차의 잔잔한 맛을 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솔잎차는 이성적인 차요, 얼음처럼 차디찬 고독의 음료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일수록 머릿속으로부터 깊은 맛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솔잎차는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까지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 솔잎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그 향에 현혹되어 성급한 마음에 입 안 가득 마시고 나중에는 떨떠름한 맛 때문에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실 때보다 마신 후에 솔바람처럼 입 안에 남는 그윽한 향이 좋고 오래도록 정신을 개운하게 하는 솔잎차의 맛에 점차 빠져 들게 된다. 세상사 잘 풀리지 않는다고 짜증날 때 솔잎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음을 추슬러 보라. 차가 식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혼자 넉넉한 마음으로 솔잎차를 마시는 동안 온갖 상념들의 매듭이 술술 풀릴 것이다. 열정을 다스리고 증오처럼 타오르는 마음의 불길도 그 차가운 기운이 사윈다. 솔잎차는 냉정함을 간직한 이성적 차인 까닭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솔잎차라고 해도 하루에 열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솔잎의 테레핀 성분이 머리를 맑게 하지만 탄닌이나 송지의 피해를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은하게 청량감이 퍼지는 솔잎차
솔잎차를 가공하기 전에 먼저 청정지역에서 오염되지 않은 솔잎을 채취해야 한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송림을 찾아가 자동차가 지나는 길에서 최소한 300m 이상 거리를 두고 자라는 소나무에서 솔잎을 따야 한다. 소나무는 침엽수이므로 한 가지에서 솔잎을 3할 이내만 채취해야 하고 어린 나무의 잎을 따서는 안 된다. 한 가지에서 많은 잎을 따면 그 가지는 말라 죽고 만다. 반드시 여러 그루에서 조금씩 따 모으는 것이 나무의 폐해를 줄이는 방법이다. 생태적 지식이 부족하여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자생지의 송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솔잎 가공 음료수만 해도 30여 종이나 되는데 이러한 거의 모든 제품이 생산 과정에서 산채한 솔잎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의 솔잎 가공식품 제조업체 중에 자체 농장에서 소나무를 심어 솔잎을 채취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줄 알고 있다. 이러한 회사들이 채취한 솔잎이 모두 가공식품 또는 건강 보조식품으로 생산되고 있는데 여기다 차를 즐기는 차인들까지 솔잎을 산채한다면 우리의 소나무는 이 땅에서 견디기 어렵게 된다.
같은 솔잎이라도 묵은 것은 좋지 않고 당년에 자란 새 잎을 채취해야 한다. 어린 솔잎을 뽑으면 기부에 붉은 비늘잎 조각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모은 솔잎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공할 수 있다. 먼저 솔잎을 솥에 쪄서 말리는 방법이다. 솥에서 찐 뒤에는 그늘에서 잘 말려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끓여 그 물을 차게 해서 마신다. 또 다른 방법은 솔잎을 잘 씻은 후 설탕에 절이는 방법이다. 솔잎을 깔고 그 위에 설탕을 뿌리고 다시 솔잎 설탕을 한 켜씩 층이 지게 해서 6개월 정도 두었다가 그 물을 뜨거운 물에 타서 식혀 마신다. 설탕보다는 완전식품이라 할 수 있는 꿀에 재워 두는 것이 더욱 좋은데 1년 정도 두었다 솔잎이 노랗게 변했을 때 물에 타 충분히 저어 주면 찬물에도 잘 풀린다. 마실 때는 색이 짙은 잔보다 백자잔을 쓰면 차의 색이 맑고 투명하여 더욱 운치가 있다. 차를 따르고 2~3알의 잣을 띄우면 운치와 함께 맛을 더한다.
송화가루 다식과 함께 찻상에 올려 솔잎차를 마신 후에 먹는다. 담소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솔잎차의 맑고 투명한 성정을 즐기려면 다식을 먹지 않는 것이 보다 격조가 있다. 솔잎의 그 은은한 기운을 오래도록 입 안에 잡아 두기 위해서이다. 송화가루는 예로부터 청혈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신선식이라 했고, 송화다식이야말로 한과 중의 으뜸이다. 송편은 솔잎을 깔고 쪄야 제 맛이 나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 송이는 솔밭에서만 얻을 수 있고 복령(茯궉)이라는 귀한 약재 또한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채취한다.
솔잎에는 휘발성 정유물질과 당류, 카로틴, 약간의 비타민C가 들어 있다. 특히 솔잎의 휘발성 정유물질은 세균의 활동을 억제하는 작용이 뛰어나 각종 세균성 질환에 좋은 약재이다. 타박상, 동상에 좋고, 신경통, 루머티스를 다스린다. 두통, 치통에 솔잎으로 술을 담가 마시면 잘 듣는다고 알려져 있다. 솔잎을 물에 달여 마시면 감기에 좋고, 만성 기관지염을 치료한다.
솔잎의 치료효과는 높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나무의 송진은 물에 쉽게 녹지 않고 공기와 만나면 단단하게 굳는 성질이 있다. 그 때문에 송진이 체내에 들어가면 모세혈관을 따라 이동하면서 굳어져 혈전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또 솔잎이 몸에 좋다는 말만 믿고 생즙을 내 마시거나 여러 가지 검정되지 않은 솔잎 가공식품을 먹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솔잎의 송진은 장내에서 소화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솔잎 생즙을 마시면 소화되지 않은 다른 음식물과 함께 체내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변비를 일으킨다. 또 송진을 가루 내어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산사에서 수도하는 옛 고승들이 솔잎을 씹으며 굶주림을 견딘 것도 알고 보면 소화되지 않은 솔잎이 장내에 체류하여 포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생콩을 물에 불려 함께 먹으며 영양문제까지도 해결했다. 불린 콩을 갈아 콩즙을 만들고 솔잎즙을 짜 섞어 먹는 음식이야말로 불가에 비전돼 내려오는 선식이다. 솔잎을 생식하면 암을 예방하고 눈이 밝아지며 추위와 굶주림을 모른다고 했다. 송엽주(松葉酒), 송화주(松花酒), 송순주(松荀酒)는 머리를 맑게 하는 민속주이며 중풍과 치매 같은 성인병을 예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처방에 따라 성인병을 예방하고 잘못 쓰면 도리어 성인병을 불러 오는 것이 바로 솔잎의 이중성이라 할 수 있다. 옛 선현들의 지혜는 이런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솔잎차는 역시 눈 오는 날이나 시리도록 밝은 겨울 달밤에 혼자 마셔야 제격이다. 철저한 고독의 차가 바로 솔잎차가 아니겠는가.
소나무야 소나무야 늘 푸른 소나무야!
다송(東茶訟)』을 쓴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젊어 산중에서 수도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때는 늦가을이라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토굴 생활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진하려고 해도 뜻을 이룰 수 없었던 초의는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압구정 아래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남산 고갯마루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문득 바위 절벽에 뿌리를 서리고 있는 노송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초의는 “저 소나무는 바위를 뚫어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을 살아 왔는데 하물며….” 초의는 소나무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득도를 했다고 전한다.
경복궁 근정전 황제의 용상 뒤 일월도(日月圖)에는 붉은 줄기의 소나무 그림이 있다. 소나무는 군왕을 상징하는 나무인 까닭이다.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에서 충절을 뜻하는 매화와 대나무를 같이 그려도 소나무만은 함께 배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군왕과 신하를 한 자리에 두지 않기 위해서이다.
서울 종로구 화동 23번지는 사육신 중의 한 분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선생이 살던 집이다. 조선 말 순조 때까지만 해도 매죽헌이 손수 심었다는 그 소나무가 살아 있었고 ‘성삼문수식송(成三問手植松)’이란 석비까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매화는 신하의 올곧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대나무 또한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성삼문은 스스로 호를 매죽(梅竹)이라 짓고 죽음으로써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소나무가 군왕을 나타내는 나무인 까닭에 뜰에 소나무를 심어 충성을 다짐했던 것이다.
건강과 장수를 뜻하는 상록수
흔히 소나무와 잣나무를 완성된 인격자에 비유한다. “무성한 소나무에 하례함은 오직 잣나무 뿐[賀得茂松偏是柏]”이라 했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인재가 끊이질 않는다는 말이다. 송백(松柏)이야말로 군자(君子)인 까닭이다. 소나무가 사철 푸른 것에서 장수(長壽)와 건강을 뜻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 그림에서는 수복강령(壽福康寧)을 염원하는 뜻으로 십장생도(十長生圖)에 소나무를 등장시켰다. 솔방울은 결실, 풍요를 뜻하고 다복과 자손의 번창을 뜻한다. 우리의 옛 풍속에 정월이면 한 해를 맞이하는 뜻으로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드렸다. 가까이 모시는 어른들은 직접 세배(歲拜)를 드리고 멀리 계신 분께는 서신으로 새해 안부를 전했는데 수복강녕을 담은 소나무와 학 그림을 즐겨 사용했다. 그 그림을 세화(歲畵)라 하였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圭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소나무를 이렇게 적었다.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송백(松栢)이 맨 뒤에 마른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으니, 모든 식물 가운데 능히 절개를 지키는 것으로는 소나무와 잣나무같은 것이 없다. 절개를 지킬 뿐만 아니라 천 년이 지나도 가지와 잎이 변하지 않으니 이는 하늘이 오래 살게 하는 식물이다.
모든 초목이 푸른 여름에는 사람들이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 청정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모른다고 했다. 겨울이 되어 초목의 잎이 떨어진 뒤에도 송백만이 변함없으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기상이 바로 이 나무와 같지 않겠는가. 소나무를 솔이라 하고 한자로는 송(松)이라 쓴다. 솔은 윗자리[上], 높고[高], 으뜸[元]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나무의 어른이란 뜻이다. 또 나무[木] 중에서도 재상[公]의 자리에 올라 있으니 산의 주인으로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소나무는 버릴 것 하나 없는 자원식물
이 땅에 소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예로부터 소나무를 신령스럽게 생각했으므로 지금도 마을 앞에 송림을 조성하여 당산 숲으로 하는 곳이 전국 각지에 남아 있다. 영목(靈木), 신목(神木)으로 숭상하여 재앙(災殃)과 사귀(邪鬼)를 막아 주는 것으로 믿었다. 출산 때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왼새끼를 꼬아 솔가지와 숯을 꽂아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제를 지내는 제단 주위에 붉은 황토를 뿌리고 솔가지로 부정을 쓸어 낸다. 마을을 수호하는 장승도 소나무 줄기로 깎는다. 산소 주위에 심는 나무도 소나무를 으뜸으로 친다. 송림 아래에는 다른 잡목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니 들쥐나 뱀같은 짐승 또한 살지 못한다.
소나무 목재는 건축재의 최고이다. 현존하는 최고 목조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도 소나무로 지은 건축물이다. 소나무 목재가 없었다면 국보 1호인 숭례문(崇禮門)도, 보물 1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가구를 만들거나 배를 건조할 때 펄프재로 사용한다. 또 송진을 증류하여 여러 가지 휘발성 기름을 얻으며 의약품 원료로도 쓰인다. 기름이 귀했던 시절 관솔 가지를 조명용 기름 대신 썼다. 그 관솔불을 송명(松明)이라 했다. 제주에서는 소나무 가지에 붙인 불이라는 뜻으로 칵불이라 하는데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쉽게 꺼지지 않아 주로 밖에서 일을 할 때 사용했다. 그을음이 많이 나기 때문에 칵불은 돌코냉이라고 하는 돌로 만든 등잔 위에서 피웠다가 일제 때는 항공기 기름을 정제하기 위해 군관민을 독려하여 관솔 가지를 모았다. 솔가지를 태운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만든 먹을 송연묵(松烟墨)이라 하여 최고급으로 쳤다. 『득수루잡초(得樹樓雜 y)』란 책에는 “옛사람들은 먹을 만들 때 송연을 사용했다. 당나라 때는 상당(上黨)의 먹이 향기와 먹색이 고운 최상품이었다”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 백두산의 소나무 목재는 멀리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명산물이었던 것 같다. 김종서(金宗瑞)가 편찬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3권 충선왕(忠宣王) 조에는 백두산의 소나무 목재로 배 100척을 짓고 쌀 3천 석을 싣고 원나라로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